8화
김진석은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끌어내서 눈앞에 보이는 성 같은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이 말리 성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성이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다면 음식도 있겠지. 그런데 김진석이 간과한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방인이란 존재도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지?”
그때 전에 보았던 푸른 글씨가 나타났다.
[이미 몬스터를 죽인 적이 있어 각성합니다.]
“왜… 이제야?”
그 의문은 푸른 글씨가 사라지고 검은색 글씨가 나타나며 곧바로 해결되었다.
- 몬스터를 잡아라.
- 금화와 장비를 회수하라.
말리 성으로 향하라, 에서 몬스터를 잡아라, 로 바뀌었다. 그런데 아마 김진석이 이미 헬 하운드를 잡은 적이 있어서 바로 다른 글씨로 바뀐 것 같았다.
카이와 동기화가 되는 것처럼 김진석의 몸에 푸른 오오라 같은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훨씬 오오라가 적게 나왔다.
김진석은 우선 말리 성으로 가기 전에 근처 나무 뒤로 들어가 숨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무턱대고 들어갈 수도 없었으니.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푸른 오오라가 전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세계에 들어온 순간부터 핸드폰이 작동하지 않아 체감상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사실이다.
그렇게 대략 30분이 지나고 김진석의 몸에서 푸른 오오라가 사라지고 푸른색 글씨가 갱신되었다.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측 상단에 레벨이 표시됩니다.]
“레벨은 그렇다 치더라도… 표시된다고?”
그때 김진석이 보는 곳에서 오른쪽 위에 김진석의 레벨이 표시되었다. 김진석이 어느 곳을 바라보더라도 정확히 오른쪽 위 끝에 표시되었다.
그런데… 레벨이 이상했다.
“레벨이… 20이라고?”
각성하면 무조건 1레벨부터 시작할 텐데? 설마…….
“카이와 동기화 중일 때 죽인 가디언의 경험치도 들어오게 된 건가?”
그렇다면 레벨이 20인 이유가 있다.
게다가 레벨을 각성하게 되면서 굶주림이 전부 해결되었다.
“그런데… 벌써 각성하면 안 되는데?”
로스트 월드는 게임 자체가 플레이어에게 대부분 불친절했다. 로스트 월드에는 수많은 직업이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다는 건 말 그대로다. 원래는 더욱 많은 튜토리얼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부 스킵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튜토리얼. 몬스터를 잡으면 레벨을 각성함과 동시에 직업을 준다. 그 직업은 몬스터를 잡는 무기에 따라 직업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직업도 없이 레벨이 20이라고?”
그때 푸른 글씨가 나타나더니 김진석의 의문을 다시 한번 해결해 주었다.
[김진석 님의 직업. 플레이어.]
“플레이어? 내가 그냥 안으로 들어와서 그렇게 된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레벨이 생겼다는 건 좋은 징조다. 김진석 본인도 이제 게임 속 캐릭터처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니깐.
김진석은 우선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확인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무에 대고 힘을 천천히 줬다. 처음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가면 갈수록 나무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주먹으로 쳤더니 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계속해서 나무를 때리니 결국 나무가 주먹 모양으로 부서져 넘어졌다.
“나무를 진심으로 때렸는데 고통도 별로 없다. 그나마 있던 고통도 사라졌어.”
경이로운 회복 능력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HP가 회복되는 시스템이 있는데, 그게 김진석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 같았다.
“…재밌네?”
게임 속 캐릭터가 됐다고 생각하니 지금의 처지도 생각나지 않는 김진석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검은색 글씨가… 아?”
검은색 글씨가 바뀌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헬 하운드를 잡았을 때 바로 기절해 버렸고, 두 번째 가디언을 잡았을 때도 금화나 장비를 회수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결국엔 몬스터를 잡아야겠군. 어떤 몬스터를 잡으란 말은 없었으니깐… 그나마 레벨이 낮은 몬스터를 잡으면 되겠지?”
문제는 그 레벨이 낮은 몬스터가 말리 성 너머에 있다. 말리 성은 가이크 성과 비슷하게 꽤나 거대한 성이다.
모든 튜토리얼을 끝내고 이곳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처음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갖춰져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말리 성이다.
성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도시였고, 게임을 갓 시작한 초보들이 적응하기 딱 좋은 곳이 말리 성이라는 곳이다.
“문제는 그 혜택을 난 받지 못한다는 거지. 성을 최대한 돌아가자.”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말이다.
“어차피 난 여기에 어울리지 못한다.”
애초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깐. 하지만 지식은 빠삭하다. 정확히는 강해질 수 있는 지식이.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주인공이 없는 로스트 월드의 세계, 즉 플레이어가 없는 지금의 로스트 월드다.
로스트 월드는 MMORPG 게임답게 플레이어 중심으로 진행되는 세계다.
그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없는 세계는 어떻게 될까.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김진석이 알고 있었던 세계가 망가진다는 것. 그리고 힘이 없는 자는 죽는다는 것.
로스트 월드는 애초부터 그리 밝은 세계관이 아니다.
이미 악마에게 당해 세계가 망가져 있었지만, 그리고 악마가 사라지고 난 뒤로 후폭풍이 남아 있었지만 인간들의 노력으로 복구되고 있는 세계였다.
그리고 스토리상 마지막으로 향하면 전에 로스트 월드를 침입했던 악마들이 다시 나타난다. 그 악마들은 플레이어가 여럿이 모여 잡는, 레이드 몬스터이다.
모니터 속에서도 여럿이서도 잡기 힘든 몬스터를 김진석은 현실에서 혼자 싸워야 한다. 영웅들도 등장하긴 하지만 기껏해야 주인공, 플레이어를 보조하는 역할, 그게 전부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이기에 영웅들이 얼마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그것만 믿고 가만히만 있을 순 없었다.
즉…….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보다도 더.”
* * *
“쉽네?”
김진석은 말리 성을 돌아 레벨이 낮은 몬스터들이 있는 일명 초보자 사냥터에 도착했다. 꿩과 비슷한 몬스터나 토끼와 비슷한 몬스터 등이 있었다.
그것들의 레벨은 기껏해야 1에서 2. 마나가 없는 사람들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몬스터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그것들은 몬스터였다. 레벨이 낮은 만큼 숫자도 많아 꽤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낸 몬스터기도 했다.
그런 몬스터를 김진석은 그저 발차기 한 방으로 죽일 수 있었다.
“딱히 힘을 싣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달려오는 녀석들에게 그저 가볍게 축구공을 차는 그 정도의 힘을 실어 찼을 뿐인데 너무나 쉽게 죽어 버렸다. 빛으로 변해 사라지고 떨어진 금화 하나를 주었더니 검은색 글씨가 나타났다.
- 레벨 10을 달성하라.
- 레벨 20을 달성하라.
- 레벨 30을 달성하라.
순식간에 글씨가 세 번이 바뀌었다. 이제는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레벨 업을 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튜토리얼이 끝난… 건가?”
도대체 왜 날 이 세계로 떨어뜨린 거지? 그렇게 생각하는 김진석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주변 엄폐물에 몸을 숨겼고, 이내 갑옷과 마법사처럼 보이는 장비를 입고 있는 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얼레? 여기 토카와 꿔크가 살던 곳 아닌가? 왜 안 보여?”
토카는 토끼를 닮은 몬스터, 꿔크는 꿩을 닮은 몬스터다.
“그러게, 기껏 장비도 다 맞추고 왔더니.”
“무슨 고작 토카와 꿔크 잡는데 그렇게 무장하고 왔냐?”
“야이, 쟤네한테 안 물려 봤지? 멀리서 마법만 쓰니 모르겠지. 토카한테 잘못 물리면 살점 그대로 떨어진다?”
갑옷을 입은 남성과 마법사와 같은 차림새를 한 여성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리서 들린 토카와 꿔크 소리에 달려갔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김진석은 엄폐물에서 나왔다.
“장비라… 이 세계가 게임 속 세계라지만 진짜 HP가 있는 건 아닐 테지. 실제로 내가 헬 하운드를 목 졸라 죽였으니 그건 확실할 거다.”
하지만 게임 속 세계든 아니든 몬스터를 잡는 데 장비, 아이템이 꼭 필요한 건 사실이다. 평생 토카와 꿔크만 잡고 살 건 아니니깐.
“그래도 다행이다. 이놈들을 잡으면 고기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
토카와 꿔크를 죽이니 금화와 더불어 그들의 생고기가 떨어졌다. 물론 생고기를 먹을 순 없으니 불에 구해야 했다.
“내가 왜 여기서 생존 게임을 하고 있어야 한담.”
불을 구하지 못한 김진석은 다시 굶주림이 찾아왔고, 혹시 모르니 생고기를 입으로 뜯어봤다.
“어? 생각보다 괜찮네?”
음식도 아닌 음식 같은 것도 많이 먹어 본 김진석이다. 최근에서야 삼각 김밥이나 라면으로 한 끼를 먹었다지만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뭐, 설마 몬스터 잡고 나온 고기에 기생충 같은 게 있겠어?”
김진석은 한입 베어 문 생고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인벤토리란 모든 RPG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아이템이나 포션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게임 속에선 키보드 하나를 누르면 인벤토리가 열렸지만 이곳에선 아니었다. 김진석은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푸른색 글씨가 알려 주었다.
[아이템을 획득한 뒤 인벤토리에 집어넣으실 수 있습니다.]
진짜 튜토리얼은 푸른색 글씨가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김진석에겐 로스트 월드에서 볼 수 있었던, 친숙한 글씨였다.
김진석은 인벤토리를 여는 법을 몰라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냥 모르겠다 싶어서 생고기를 둘 곳이 없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주머니에 넣자마자 생고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원래 로스트 월드에서도 오랫동안 아이템을 줍지 않으면 사라지게 해 놓았는데, 김진석은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느새 다가온 토끼 몬스터를 발로 차 죽이고 나온 생고기를 바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또 마찬가지로 생고기가 사라졌다. 김진석은 도대체 생고기가 어디로 갔는지 주머니를 뒤졌는데, 분명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였는데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걸 잡고 꺼내 보니 분명 사라졌던 생고기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제야 김진석은 인벤토리를 사용하는 법을 알아냈다.
원하는 물건을 생각하고 꺼내면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던 물건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상하지만…….
“인벤토리.”
인벤토리란 말을 입으로 내뱉으면 어떤 것을 알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토카 고기 5개]
[꿔크 고기 6개]
[금화 20개]
“금화 스무 개로 뭘 할 수 있겠어.”
로스트 월드 세계에 뇌물이란 개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겠지. 금화 스무 개로는 최하급 포션 두 개밖에 못 산다.
토카나 꿔크를 잡아 봤자 금화 하나 정도밖에 떨어뜨리지 않는다. 최하급 포션이 금화 열 개로 살 수 있었다.
체력은 고작 50 회복. 레벨 1 때는 체력이 100이니 엄청 많이 회복되는 거지만 캐릭터를 조금만 키워 보면 HP가 순식간에 천, 만이 넘어간다.
로스트 월드에선 여타 다른 게임과 달리 스텟이란 개념이 없다. 그저 HP와 MP, 그리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있을 뿐.
직업마다 올라가는 HP와 MP, 공격력과 방어력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 김진석의 레벨이 20이니 대충 HP가 천에서 2천 정도 될 것이다.
체력이 있다면.
“내 스텟을 보는 방법은 없는 건가?”
그때 푸른 글씨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튜토리얼이 끝나면 활성화됩니다.]
- 레벨 30을 찍어라.
“검은색 글씨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네. 푸른색 글씨가 내게 많이 도움이 되는군.”
무성의한 검은색 글씨와는 전혀 다른 푸른색 글씨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김진석이었다. 엄폐물에 쪼그려 앉아 은폐하며 생고기를 뜯어 먹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토카나 꿔크를 잡아 봤자 아이템을 안 주니 레벨 더 높은 녀석들을 잡아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