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멋있지 않나요?”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김진석은 깜짝 놀라 뒤를 바라봤다.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이지만 김진석은 그가 익숙했다.
“히포그리프 기사단은 히포그리프에게 선택을 받아야 할 수 있어요. 재능도 실력도 아닌 오로지 운에 달렸죠. 처음 뵙겠습니다. 기사 찰스라고 합니다.”
기사 찰스. 플레이어가 비명의 숲에서 탈출했을 때 가이크 성까지 안내해 주는 NPC가 바로 찰스다.
그는 NPC 중에서도 강력한 NPC다. 로스트 월드 게임에서 가장 높은 레벨은 99레벨이다. 기사 찰스의 레벨은 60.
낮지도, 높지도 않은 레벨 같지만 플레이어를 제외하고 NPC는 레벨을 올리기 힘들고, 특이하게도 로스트 월드 게임은 스토리 진행도에 따라 NPC가 성장한다.
기사 찰스의 최종 레벨이 60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레벨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거지만 그렇다고 이제 게임 속 세계에 들어온 김진석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싸울 이유도 없지만.
“반갑습니다. 김진석이라고 합니다.”
“김진석이라… 특이한 이름이군요.”
“특이할 수밖에요. 저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로스트 월드에서 플레이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정확히는 플레이어는 아직 살아남은 천사가 악마를 죽이기 위해, 인간을 돕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불러들인 자를 플레이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 줄여서 이방인이라고 불리며 NPC들은 이방인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다.
그런데…….
“이방인이요? 설마 비명의 숲 너머에서 오신 겁니까? 그 앞에서 발견되시긴 했는데…….”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천사 종족이 다른 세계에서 불러들인 이방인… 모르십니까?”
“예? 천사가 아직 살아 있습니까? 악마들에게 몰살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찰스는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봤다. 로스트 월드 게임에서 이방인, 즉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은 없어서는 절대 안 될 존재다.
보통 게임 대부분은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없다면 당연히 세계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김진석은 자신과 같은 사람이 없을 거라곤 예상하긴 했다. 특이한 상황이었고,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인터넷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니깐.
그런데 이 세계에 이방인이란 말 자체가 없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로스트 월드 게임 속 세계에서 애초에 이방인이란 존재가 없는 것 같았다.
“…미치겠군.”
게임 스토리 후반에는 당연히 플레이어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다. 그만큼 강해졌고, 지식이 늘어났으니.
하지만 그건 처음에 물심양면 도와주던 NPC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게임은 MMORPG가 아니라 그냥 생존 게임이 되었을 거다.
그리고 그 생존 게임을 김진석이 하게 생겼다.
“…찰스 님이 저를 도와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성을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요.”
이방인은 둘째 치고 기본적으로 성격이 좋은 찰스에게 부탁했다. 로스트 월드 게임에서 기사 계급은 상당히 높은 계급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거다. 그런 그가 자신과 같은 일반인에게 신경 써 주는 건 그의 성격 때문이다.
찰스는 자신을 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전형적인 주인공 성격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이방인이 아니더라도 도와줄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김진석은 그를 이용했다.
원래의 튜토리얼이 아닌 검은색 글씨가 주는 튜토리얼을 조금 더 수월히 깰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고작해야 가이크 성을 둘러보는 것이지만 가이크 성에 자신과 같은 일반인은 없다. 모두가 싸울 수 있는 병력이고 정예 병력이다.
혼자서 가이크 성을 둘러본다면 바로 눈에 띄어 잡히고 어디서 왔는지 심문을 받겠지. 물론 그건 찰스와 함께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함께 다니는 동안 김진석, 자신의 얘기를 지어내야 했다.
“아… 상관은 없습니다. 대신 출신은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가이크 성… 지금 김진석 님이 계신 이곳이 가이크 성입니다. 가이크 성에서 출신이 불확실한 자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찰스의 눈에는 의심스럽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조금 전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 * *
“정말 김진석 님은 비명의 숲 너머에서 왔습니까? 이런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했는데, 비명의 숲 너머에서 온 사람들은 전부 마족이었거든요. 그곳은 강력한 마족이 득시글거린다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전 간신히 그곳에서 탈출했죠.”
거짓을 말하기 위해 사실을 섞는다. 그러면 거짓이 조금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아직 스토리 처음 부분인 만큼 비명의 숲은 공략되지 않았다.
가이크 성은 비명의 숲 기준으로 남쪽에 있었고,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비명의 숲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
찰스처럼 대략적으로 강력한 마족이 살고 있다, 라고 알고 있을 뿐. 비명의 숲의 악명 높은 소문에 그 누구도 비명의 숲 너머로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북쪽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편한 환경은 아니다. 강한 마족이 살아가고 있었고, 그 마족에게서 뿜어 나오는 마기는 인간에게 절대 이롭지 않았다.
김진석은 그곳에서 간신히 탈출한, 운이 좋은 사람으로 둔갑했다. 최대한 약자로 자신을 어필해야 도와줄 테니.
“그런데 이상하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침착해.”
“앗! 대장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찰스가 대장님이라고 부를 자는… 단 한 명뿐이다.
“반갑다. 다렌이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저 녀석의 상관이지.”
다렌 대장, 말 그대로 직책이 대장이다. 하지만 그의 부하라곤 찰스 하나뿐이다. 인원이 부족하다거나 다렌이 문제라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다렌을 따라갈 수 있는 자가 찰스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렌이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빡빡하다는 말도 많아서 그걸 유일하게 맞춰 주는 게 찰스뿐이기도 했지만.
“반갑습니다, 다렌 님.”
즉, 그의 레벨이 가이크 성에서 가장 높다는 것이다. 현재 그의 레벨은 60. 찰스가 끝까지 성장했을 때의 레벨이 지금 그의 레벨이다.
다렌은 로스트 월드 세계관에서 영웅들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NPC 중 하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말했다시피 바로 그의 깐깐한 성격. 로스트 월드 스토리에서 플레이어, 이방인을 만났을 때도 그는 계속해서 의심했다.
그래서 그가 플레이어를 시험해 보려고 퀘스트를 계속해서 내줬다. 그게 플레이어를 성장시켜 줬지만 문제는 지금.
이 로스트 월드 세계에는 이방인이란 존재 자체가 없었다.
김진석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 맞나?”
“예? 예… 맞습니다만……?”
그런데 생각했던 질문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출신이 그곳이 맞는지, 북쪽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마나도 쓸 줄 모른단 말인가?”
“어… 당연하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사나 마법사들이나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거 아닙니까?”
로스트 월드에선 일반적인 병사는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 훈련을 받아도, 뭘 해도 아예 선천적으로 마나가 없으면 평생 그 마나를 얻는 일도 없다.
애초에 게임 세계에서 일반적인 병사는 사실상 소모품이다. 게임을 할 때는 별생각이 안 들었지만 지금은 김진석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막막했다.
“맞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헬 하운드를 잡을 수 있었던 거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등에서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찰스는 나를 안내해 주겠다는 말을 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
로스트 월드의 평상복은 현실 세계와 비슷하다. 그리고 마침 2월 22일. 봄이 오고 있어서 그런지 날씨도 전부 풀렸고, 김진석은 평범한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있었다.
물론 긴바지에서 오른쪽이 전부 타 버려서 찰스에게 옷을 빌려 입었지만 다행히 찰스도 그와 비슷하게 키도 크고 체격이 비슷해서 옷도 잘 맞았다.
그런데 다렌은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찰스가 처음 말 걸었을 때도 투구는 벗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말을 걸을 때도 헬멧조차 벗지 않았다.
“너에게서 마족의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과거 인간을 속이고 인간 사이로 파고들어 서로 이간질하게 했던 마족과 수법이 똑같다. 그때는 우리가 없어서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렌은 김진석을 마족, 그것도 악마에게 붙은 마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렌에 말에 힌트가 있듯 그는 인간이 아니다.
다렌의 정체는 엘프. 물론 그 사실을 숨기고 있진 않다. 엘프와 인간은 악마가 나타난 이후 바로 서로 간의 협력을 맺어 악마와 함께 싸워 왔다.
그만큼 엘프와 인간은 서로 친밀한 관계이다. 특히 엘프는 마족에게 매우 민감하다.
“나조차도 마기를 못 느낀다는 건 네가 마족이 아니거나 아니면… 마기를 감추는 게 능한, 강력한 마족이겠지.”
그렇게 말하며 다렌의 거대한 대검은 점점 김진석의 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진석은 그 짧은 시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급하게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안 그래도 생각나는 게 없는데 대검을 목까지 들이대고 있다면 더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대장님!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대검은 놓고 말하세요!”
“찰스, 넌 그래서 안 돼. 저 녀석이 정말 강력한 마족이었다면 넌 이미 목이 달아났을 거다.”
다렌은 고작 한 손으로 그 거대한 대검을 김진석에게 겨눈 채 곁눈질로 찰스를 보며 말했다. 점점 그 거대한 대검이 김진석의 목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
김진석의 눈앞에 검은색 글씨가 나타났다. 그 글씨는 원래 가이크 성을 둘러보라는 말이었지만 점점 글자가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 가이크 성을 탈출하라.
“…뭐?”
그와 동시에 하늘을 날아다니며 진형을 유지한 채 훈련하던 히포그리프 기사단의 움직임이 급작스럽게 바뀌었다.
김진석은 말 그대로 코앞에 놓인 대검을 애써 무시한 채 검은색 글씨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보니 히포그리프 기사단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리니 다렌은 이미 거대한 대검을 들고 김진석을 지나쳐 성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님?”
“그자를 붙잡아 놔라. 이 전투가 끝나면 물어볼 게 산더미다.”
그때 밖에서 엄청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하늘이 울리고 천둥이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젠장… 드레이크다.”
“드레이크요? 검은 대지에는 원래 드레이크는 살지 않는데…….”
드레이크. 로스트 월드에서 드레이크는 꽤 강력한 몬스터다. 온몸에 철갑 같은 비늘을 두르고 네발로 기어 다니는, 도마뱀이지만 얼굴은 흉포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크기만 해도 4미터가 넘어간다.
드레이크를 달리 부르는 별칭은 용이 되지 못한 도마뱀.
그런 드레이크의 레벨은 자그마치 80. 일반 병사들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드레이크 한 마리 잡을 수 없다.
드레이크는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닌 강한 다수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찰스와 다렌 둘이서도 드레이크 한 마리 잡기 버겁다. 아니, 불가능하다.
로스트 월드에서 스토리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지금, 드레이크 한 마리도 벅찬 상대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