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찌는 듯한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다.
벌써 9월이건만 이놈의 더위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학교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어노는 학생들의 모습만 봐도 답답할 정도였다.
“야, 빨리 좀 넘어.”
“알았으니까, 밀지 좀 마.”
명성고등학교 학생들이 담을 넘고 있었다. 땡땡이를 치는 게 분명했다. 담을 넘자마자 그들은 재빨리 튀기 시작했다.
“씨발… 졸라 덥다.”
“에이, 귀찮아. 그냥 저곳에 숨자.”
이제 보니 놈들은 철없는 고딩들이었다. 이 애들이 벌써 3학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그들은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라? 저 양아치 새끼들 또 훔쳤구만.”
골목 안에는 양아치들이 벌써 진을 치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이 근방 불량배들이었다. 철없는 고딩들과는 그냥저냥 아는 사이였다.
“어이, 우리가 훔친 물건에 관심 있어?”
“씨발, 괜히 우리까지 엮이게 하지 말고 너희들끼리 놀아.”
철없는 고딩들은 양아치들과 거리를 두고 앉은 후,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면서 슬쩍 그들을 살펴보았다.
“키키키, 어디 보자! 군바리가 돈이 좀 있으려나?”
양아치들은 자그만 손가방을 열었다. 말을 들어 보니 군인의 물건을 훔친 모양이었다.
“이건 여권이네! 그 군바리, 공항버스에서 내리더니… 요즘은 군복 입고 해외여행 가나…….”
“쓸데없는 것 찾지 말고 돈 좀 찾아봐.”
“알았어!”
휘익.
양아치들은 여권을 그냥 던졌지만, 공교롭게도 철없는 고딩들 앞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건 또 뭐야…….”
창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여권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어떤 재수 없는 놈이 강탈당했나…….”
그는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여권을 펼쳤다. 그러고는 여권의 이름을 확인했는데…….
“재수 없는 놈 이름이 김동빈이라…….”
“……!”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철없는 고딩들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시, 씨발… 조, 졸라 살 떨리는 이름이다. 그지…….”
모두들 슬슬 겁먹기 시작했다. 김동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펼 수 없었다.
“여, 여권 사진은 어때? 확실히 그 새끼는 아니지?”
“씨발… 그 새끼랑 똑같아!”
재수 없는 쪽은 철없는 고딩들이었다. 사태 파악이 끝나자 놈들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졸라 튀어!”
파다다닥.
철없는 고딩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내달렸다. 혼비백산한 그들의 모습에 양아치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야, 왜 하이방 까고 그래?”
“씨발, 양아치! 왜 그 새끼 걸 훔쳤어!”
“무슨 걱정이야? 우리는 오토바이로 튀었어. 그 군바리 새끼는 절대로 따라오지 못해.”
“그건 너희 새끼들 생각이지!”
철없는 고딩들에게 김동빈은 공포 그 자체였다. 괜히 엮일까 두려워 최선을 다해 달렸지만… 김동빈과의 인연은 참으로 떨쳐 내기 힘들었다.
“헉헉… 이노무 새끼들… 감히 내 가방을 훔쳐…….”
“으헥!”
땀범벅인 동빈을 보고 철없는 고딩들이 기겁을 했다.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동빈의 체격은 더욱 좋아졌다. 대충 보아도 키가 190은 넘어 보였다. 제대로 맞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헉헉… 헉헉… 또 너희들이야…….”
“아니요, 아니요. 우리가 아니고 저놈들이에요.”
철없는 고딩들은 동시에 양아치들을 가리켰다.
“지, 진짜 김동빈이다…….”
툭.
양아치들은 열심히 뒤지던 동빈의 지갑을 떨어뜨렸다. 김동빈이 누군지 기억해 낸 것이다.
잠시 후.
동빈은 강탈당했던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똑바로 살아라, 응.”
“네, 알겠습니다!”
양아치와 철없는 고딩에게는 가벼운 주의만 주었다. 고국에 오자마자 무력을 쓰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어디… 애들은 잘 있나 확인 좀 해 볼까.”
꾸욱. 띠리리리.
동빈은 핸드폰을 꺼내서는 단축키를 눌렀다. 그동안 번호가 바뀌지 않았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지루한 연결음이 끝나고 통화가 이루어졌다.
-여보세요.
“또 목소리 깐다.”
-너!
주철은 동빈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채고 너무나 기뻤는지 비명 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진짜 오랜만이다. 3년이 조금 넘었지?”
-그래, 이놈아! 이제야 제대했구나! 어째 우리나라는 지키지 않고 해외로 파병을 갔냐? 면회 가서 허탕 친 게 몇 번인 줄 알아?
“일이 좀 꼬여서…….”
동빈은 명성고등학교 담을 지나며 전화를 받았다. 구릿빛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 해외로 갔으면 네가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미안하게 됐다. 그런데 석진이는 잘 있냐?”
-물론 잘 있지. 그놈 올해 사법 고시 패스했잖아.
“진짜 잘됐다! 그럼 그놈 사법연수원 들어간 거야?”
-아니, 걔 군대 갔잖아.
“군대? 어디 부대로 들어갔는데?”
일이 좀 꼬였다. 오늘 다 봤으면 했는데, 석진이 입대할 줄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부대로 찾아가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생겼다.
-그놈 공익이야, 오늘 전화해서 보면 돼.
“뜻밖인데?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여자 친구도 있지, 엄청난 효자에, 사법 고시까지 패스한 놈이 공익을…….”
-또 지랄한다. 어디야? 내가 차 끌고 나갈게.
“나 명성고등학교 후문에 있다.”
-거긴 또 뭐 하러 갔냐? 나도 그쪽 근처라 금방 갈 수 있다.
“그럴 일이 있어서… 그나저나 유나도 잘 있지?”
동빈은 학교에 대한 애착이 컸다. 가방을 강탈당해서 어쩔 수 없이 왔지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유나는 말도 꺼내지 마라. 저번에 미팅 나갔는데… 우아~ 짜증! 퀸카들이 모이는 자리에 왜 유나가 나오냐고! 걔나 나나 둘 다 시껍해서… 에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무슨 바람이 들어 나타난 거냐? 평생 안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불공정한 사회를 평정하러 왔지!”
정적.
주철은 할 말을 잃은 반응이었다. 고교를 평정한 동빈… 드디어 사회까지 평정하는 것인가!
“짜식! 흠칫했지? 농담이야, 농담.”
-에이… 씨! 그런 농담 하지 마, 진짜 놀랐잖아. 아! 보인다. 너도 나 보이냐?
“오케바리, 검은색 승용차!”
동빈은 전화를 끊고 주철의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보고 싶었던 친구와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동빈은 오늘부터 다시 민간인이 되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