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은 원 회장의 뒤를 따라 특별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웅성웅성.
첫 느낌은 매우 어수선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열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국방에 관한 핵심 인사들은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방부 장관을 포함해 육해공군 참모총장,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등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니 나누는 대화 또한 열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국내 인사들은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니, 해외에서 오신 분들을 소개하지. 미국과 영국 등 군사 강국에서 특별히 자리해 주셨네.”
“이상하군요. 그쪽 분들은 저도 안면이 있는데… 제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군요.”
“여기에 오신 분들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군사 업체의 회장님들이지. 박람회 건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오셨다네.”
“전쟁이 일어나야 돈을 버는 사람들이군요.”
“그렇게 나쁘게 해석할 필요 있나? 좋게 말하면 세계의 질서를 뒤에서 조종하는 엄청난 인물들이지.”
원 회장은 장군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전반적인 설명을 했으니 개별적인 소개로 넘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이쪽은 미국에서 오신 분이네. 이번 박람회를 성사시키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주셨지.”
원 회장은 육십 대 정도의 금발 신사에게 다가갔다. 인상은 괜찮은 편이었고 비만인 듯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원 회장님을 통해서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제임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장군과 제임스는 일상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대화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적대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꼭 한 번 오고 싶었는데 별로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느낌이 어떻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사람들도 매우 친절하고… 음식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소탈한 웃음까지 지으며 만족함을 표시했다. 무시무시한 군사 업체의 대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 장군님, 벌써 가시려는 겁니까?”
제임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장군을 제지했다. 예의상 잡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느낌이 강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제임스 회장님과 계속 이야기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해야 합니다. 국방부 장관도 계시고 육군 참모총장도 계시니…….”
“그런 사람들과는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제임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만하다고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분들은 제 상관이십니다.”
“저는 무기 구입의 결정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저들이 문제 삼지는 않을 겁니다.”
“독선적인 성격이시군요. 이 자리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관계자들도 많이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들은 떨거지에 불과합니다. 명색이 세계 박람회라 제가 부탁 좀 했습니다. 이 자리는 오직 저하고 김 장군님을 위해서 마련된 것입니다.”
제임스는 점점 막무가내로 나왔다. 장군은 불편한 심기를 참고 원 회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는 물음이었다.
“…….”
원 회장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자신이 나서도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제임스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이고, 그와 친분이 있는 원 회장 스스로도 대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제임스 회장님… 저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군은 다시 제임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면 돌파를 시도하려는 행동이 분명했다.
“저희 회사의 무기를 구입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이건 저 혼자 결정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장군님의 최종 결정만 남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 제품은 성능과 가격 그리고 기술 전수까지 부족한 점이 없습니다. 한국과 미국 양국의 친분도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임스는 고압적인 자세를 접었다. 세일즈맨처럼 고객을 설득하여 계약을 유도하려는 모습이었다.
“위원회에서 각국이 제출한 자료에 대한 분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귀사의 제품에는 커다란 메리트가 없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메리트가 없습니까?”
“성능 대비 가격입니다. 조사 결과 최고의 성능을 보였지만, 약간 우위의 장점에 비해서 지나치게 가격이 높습니다.”
“약간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미안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가격을 더 낮추든가, 추가적인 기술 이전을 약속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한 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
장군의 태도는 너무나 확고했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장군이 얻을 수 있는 개인적인 이득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100퍼센트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보게, 제임스 회장님의 심기를 건들지 말게나. 기업이 이윤을 쫓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보다 못한 원 회장이 끼어들었다. 장군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회장님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아니, 어느 나라냐는 편견을 떠나서 좋은 제품을 싸게 사고 싶은 것 또한 소비자의 권리입니다. 당연한 권리조차 하지 못한다니요. 전 회장님의 말 자체를 이해 못 하겠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이리도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야…….”
원 회장은 조리 있게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장군보다 낫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신 분들에 대한 예의는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거기 서지 못해!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내 체면은 살려 줘야 할 것 아닌가!”
“벌써 잊으셨습니까? 회장님과 저는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제가 체면을 봐 드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어허, 아직도 오해가 풀리지 않았단 말인가?”
“오해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군요… 조만간 회장님의 가증스러운 가면을 제가 직접 벗겨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이, 이보게!”
장군은 원 회장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심히 뒤돌아서더니 출입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김 장군님, 멈추십시오.”
“…….”
제임스가 다시 나섰지만 장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김 장군님의 의견을 제가 수용하겠습니다. 수정된 자료를 빠른 시일 안에 제출하지요.”
“제임스 회장, 이것은…….”
갑작스러운 제임스의 태도 변화에 원 회장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국에 대한 일은 그의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원 회장님은 빠지십시오.”
“제, 제임스 회장…….”
연이은 충격에 원 회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제임스가 자신을 무시하고 장군과 직접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김 장군님, 며칠만 여유를 주십시오.”
“그 정도 부탁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습니다.”
좀 전과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장군과 제임스는 화해의 뜻으로 악수부터 했다.
“김 장군님과 함께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건 제 연락처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은 제 연락처입니다.”
둘의 관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개인적인 연락처까지 주고받으며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빠른 시일 안에 수정안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전 이만…….”
제임스와 인사를 끝낸 장군은 성큼성큼 문밖으로 향했다. 제임스는 웃음을 머금고 장군의 뒷모습을 지켜봤지만, 원 회장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제임스 회장,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니오? 로비를 하려면 제대로 하시오. 그동안 당신에게 들어간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
원 회장이 따지듯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핀잔뿐이었다. 제임스에게 지원받은 액수가 너무나 컸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번 무기 구입 건이 어떻게 되든, 원 회장과는 더 이상 인연을 맺고 싶지 않습니다.”
“……!”
원 회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제임스를 놓치는 것은 가장 큰 지원 세력을 잃는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회장, 무엇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유나 알고 싶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원 회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더 이상 후진국이 아니더군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로비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선진국형 로비와 후진국형 로비… 한국이라는 나라는 바뀌어 가는데 원 회장의 마인드는 그대로군요. 기회가 된다면 또 봅시다.”
제임스는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원 회장의 곁을 떠났다. 이러한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원 회장은 제임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원 회장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제임스라는 엄청난 물주가 적군에게 넘어갔으니, 그 피해는 배가될 것이 분명했다.
“최 비서!”
“네, 회장님.”
원 회장은 거친 음성으로 비서를 불렀다. 상관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비서는 신속하게 다가왔다.
“지금 당장 긴급회의를 소집해! 지방에 있거나 시간이 걸리는 놈들은 화상으로 연결하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원 회장의 비서는 매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래야 상관의 불편한 심기가 나아진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한편 파티장을 빠져나온 장군은 차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군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지 운전기사가 차량 뒷문을 열고 대기하고 있었다.
“타시지요, 장군님.”
“잠깐만 기다리게. 조금 생각할 것이 있어서…….”
“……?”
운전기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에 타서 생각하면 벌금이라도 낸단 말인가? 장군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지?”
“저한테 묻는 겁니까, 장군님?”
끄덕끄덕.
장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쉬운 말을 장군이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운전기사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진짜 쥐가 고양이를 무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고사성어가 있지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데… 하물며 궁지에 몰린 호랑이가 조용히 당할 리 없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운전기사는 너무나 쉬운 문제를 어렵게 대답했다. 너무 쉬워서 대답하기 곤란했던 것이다.
“원 회장… 이제야 미끼를 물 마음이 생겼겠지.”
“…….”
장군은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있는 운전기사가 다 무안할 지경이었다.
“자네는 그냥 들어가게. 내가 직접 운전하겠네.”
“네?”
뒷문 근처에 있던 장군은 운전석 쪽으로 이동했다. 정말 손수 운전을 하려는 모양새였다.
“키 주게. 왜? 내 운전 솜씨를 못 믿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무슨 이유로…….”
장군은 국가의 보호를 받는 인물이었으므로 혼자서 운전하는 이유를 따로 보고해야 했다.
“동빈이 선물도 좀 사고… 겸사겸사 바람 좀 쐬고 싶을 뿐이네.”
“아! 그러고 보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모레가 바로 수능 시험일이라 엿이나 찹쌀떡을 사려는 것이 분명한데… 왜 혼자 운전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어서 키 주게.”
“여기 있습니다.”
운전기사는 장군의 독촉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키를 받아 든 장군은 곧바로 운전석에 올랐다.
부르릉.
“나 먼저 들어가겠네.”
장군은 시동을 걸자마자 차를 움직였다. 운전기사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조심해서 운전하십시오, 장군님.”
“하하하… 이래 봬도 무사고 40년이네.”
부르릉.
장군은 가볍게 손까지 흔들어 주며 전시장을 떠났다. 차분한 성격 덕분인지 상당히 매끄럽게 차를 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