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3/224)

군사박람회

날씨가 점점 쌀쌀해진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수능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험생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며 최대한의 몸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3년간의 땀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 무장도 중요한 시기였다. 끝까지 페이스를 잃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수능의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었다.

D-2.

언론에서도 수능에 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다.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수능을 포기한 학생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수능 한파가 오겠다는 보도는 괜찮다. 시험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는 전문가의 견해는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동빈의 생각이었다.

띠리링.

“와아, 미치겠다!”

동빈은 TV를 끄고는 소파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도 식힐 겸 뉴스를 틀었는데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왜 이렇게 공부가 안 되지? 이러다 빵점 맞는 거 아니야?”

동빈은 소파에 묻었던 얼굴을 벌떡 치켜들었다. 불안함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 정말 가관이었다.

“크윽! 한 글자라도 더 봐야 하는데! 아니야, 지금은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 열심히 외운 거 까먹으면 안 돼!”

강심장인 동빈도 수능의 압박은 이겨 내지 못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크악! 이젠 전화 받는 것도 지겨워!”

동빈은 연방 울리는 핸드폰 소리를 외면했다. 받으면 뭐 하나… 시험 잘 보라는 내용이 분명한데, 잘 볼 자신이 없으니 문제였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에이… 씨!”

웬만하면 좀 알아서 끊지. 계속 울리는 핸드폰 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냥 받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얻었다.

“여보세요?”

동빈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공부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선생님.”

동빈을 가장 좋아하는 체육 선생의 전화였다. 학교에서도 볼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더니, 이젠 전화까지 걸어 용기를 주려는 모양이었다.

-뭐든 끝마무리가 중요한 거다. 마지막까지 긴장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네…….”

-설령 떨어진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겠니?

“……?”

어째 말투가 이상하다. 정말 동빈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듯한 음성이었다.

-솔직히 음대보다는 체대가 훨씬 낫지. 만약 떨어지면 너의 운명은 체대라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

동빈의 예감이 적중했다. 체육 선생은 아직도 체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떨어지면 체대로 바꾸어 도전하자는 의미가 분명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다. 중요한 것은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그, 그렇지요…….”

-동빈아, 이만 바빠서 끊어야겠다.

“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험 잘 보고… 선생님은 내년을 기약하겠다. 동빈이, 파이팅!

“…….”

딸깍.

통화를 마친 동빈의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내년을 기약하자니? 재수 없는… 아니 재수하란 소리와 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격려라고 하기에는 약간 떨떠름한 전화였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겨를도 없이 또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 번호를 보니 체육 선생의 전화는 아니었다.

“여보세요?”

동빈은 마음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받았다.

-나, 반장 형인데.

“네?”

동빈은 상당히 큰 목소리로 반문했다. 뜬금없이 반장 형이라니? 지금 동빈 학급의 반장은 유나였다. 설령 다른 반의 반장이라고 해도 동빈의 형뻘은 없었다.

-저번에 석진이랑 같이 알바 했잖아. 단역배우 말이야.

“단역배우면… 아, 네~!”

동빈은 이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석진과 같이 단역배우 일을 할 때 알게 된 사람이었다. 이름 대신 반장 형이라 부르라고 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이번에 시험 본다며?

“네… 그렇게 됐습니다.”

수능이 중요하긴 중요한 모양이다. 이처럼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의 안부 전화도 여러 통 받았다. 윤지나 기자와 공현철 사범 커플, 선아를 비롯한 동빈의 추종 세력 등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화를 꽤나 받았다.

-시험 잘 봐라. 학생에게 수능은, 앞으로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갈림길이다.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시험장에 뼈를 묻는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라.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공부한 만큼 나오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말이야… 혹시라도 대학 못 들어가면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을래?

“네?”

또 대화의 내용이 이상해졌다. 어째 사람들이 붙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인생이란 모르는 거다. 공부가 체질이 아닌 사람도 있고… 그래서 말인데, 형이 얼마 전에 스턴트맨 스쿨을 차렸거든. 동빈이 네가 온다면 최고의 대우를 약속해 줄게. 수강료 전액 무료에 영화 출연 항상 0순위… 내가 따로 용돈도 챙겨 줄 수 있어.

“…….”

-전화로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나중에 시험 끝나고 석진이랑 함께 나와라. 내가 근사하게 한잔 쏠게.

“가, 감사합니다.”

시험 잘 보고… 강의 시간 됐거든, 끊는다.

“네…….”

동빈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두고 보자… 반드시 붙고 만다. 꼭 붙어서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에이… 부정 타게시리…….”

하필 이 순간에 핸드폰이 울리다니… 잔뜩 분위기 잡았던 동빈의 얼굴이 단번에 무너졌다.

“오늘 내 핸드폰 불나는구만.”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세 통째였다. 이상한 말을 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면 그냥 끊어 버리리라! 동빈은 독한 마음을 품고 발신자 번호를 살펴보았다.

“어라? 박 형사님이잖아?”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근 경찰서의 박 형사였다.

“이분은 내가 먼저 전화했어야 했는데…….”

딸깍.

“안녕하세요. 박 형사님.”

동빈은 활기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방송 사고 때문에 자수하러 찾아간 것이 최근의 만남이었다. 그 뒤로는 열심히 공부만 했다는 증거였다.

-우와! 웬만한 스타보다 인기가 많다는 것이 사실인가 보네? 왜 이리 통화하기가 힘들어?

박 형사는 여러 번 동빈에게 전화를 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 이번에는 기대도 않고 눌렀는데 통화가 이어진 것이다.

“인기는 무슨… 오늘 갑자기 전화가 폭주를 하네요. 박 형사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전화를 주셨습니까?”

-TV 보니까, 수능이 모래라고 하더라고. 동빈이, 너 수험생 맞지?

“당연히 맞지요. 제 주민등록번호까지 기억하시는 분이…….”

박 형사는 동빈의 전담 형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서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동빈에 관한 웬만한 신상 정보는 외우고 있었다.

-요즘은 봉사 활동 안 하나? 좋은 자리 알아 놨는데.

“에이… 농담도…….”

-그래, 농담이니까 끝까지 사고 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걱정 마십시오. 다시는 사고 칠 일 없을 겁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혹시나 대학 떨어지면 경찰 시험 한번 봐라. 내가 보니까 넌 완전히 경찰 체질이야.

“…….”

아! 결국 박 형사까지 동빈을 배신하고 말았다. 자신을 원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수능을 코앞에 두고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요즘 불의를 보고 참는 사람들이 워낙 많잖아? 너처럼 정의감에 불타고 신체 조건까지 뛰어난 애는 드물지. 네가 경찰이 되면 폭력배들도 상당히 난감할 거야!

“나, 난감하겠죠.”

-어이구, 목소리가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연이은 충격 때문에 동빈은 골치가 다 아팠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게 서운했던 것이다.

-시험이 모레인데 아프면 안 되지. 나 끊을 테니 몸 관리 잘해라.

“네…….”

딸깍.

동빈은 핸드폰을 접고 소파에 몸을 기대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우와, 미친다… 여보세요?”

오늘 정말 핸드폰에 불이 날 지경이다. 얼마나 통화를 오래 했는지 수화기가 뜨거울 정도였다.

-나, 박천수다.

“……?”

-오랜만이군. 나를 2층에서 떨어뜨린 건 용서해 주지. 어차피 대학은 못 들어갈 것 같으니 우리 조직에 들어오면…….

“에이… 씨!”

딸깍!

동빈은 과격하게 전화를 끊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제는 깡패까지 자신을 무시했다. 동빈은 단단히 열을 받았는지 씩씩거리며 거실 주위를 맴돌았다.

“뭐에 그리 화가 난 것이냐?”

“자, 장군님…….”

분을 식히려 손으로 부채질하던 동빈이 주춤했다. 안방에서 나온 장군이 동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이 모레라 불안한 것이냐?”

“아, 아닙니다.”

“괜찮다, 동빈아. 이번 시험에 너무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네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한 것으로도 난 만족한다.”

장군은 동빈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예전부터 공부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장군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진 않겠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건 먹칠이 아니다. 안 하는 것이 먹칠이지.”

“…….”

불안하고 초조했던 동빈의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 장군의 말이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이다. 대학에 붙든 떨어지든,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욕심을 내서 조금 더 바란다면… 동빈이 네가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학부모의 자격으로 졸업식에 가고 싶구나.”

“……!”

동빈은 졸업식장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던 장군의 모습을 떠올렸다. 축 처진 어깨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는데…….

“걱정 마십시오, 장군님.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졸업하겠습니다!”

동빈은 상당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죽은 아들에 대한 대리 만족이라도 상관없었다. 법적인 아들로서 장군의 소박한 바람 정도는 반드시 들어주고 싶었다.

“너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잠시 나갔다 올 거니 기다리지 말거라.”

장군은 출입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외출을 하기 위해 안방에서 나왔던 모양이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장군님?”

“군사박람회 간다. 초청장을 받아서 말이다.”

“어? 군사박람회는 수능 보는 날 똑같이 시작하지 않습니까?”

동빈도 군사박람회에 관심이 많았다. 시험이 끝나면 가려고 예약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렇기에 정확히 언제 시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전에 귀빈들을 초청해서 파티를 연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군사박람회 파티의 초청장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였다. 원 회장이 따로 리스트를 만들었으니 어떤 사람들이 올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 회장은 가장 귀한 손님 자격으로 장군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장군은 참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대문까지 장군을 배웅하려 했던 동빈은 뜻밖의 방해꾼을 만났다. 이놈의 전화가 끝까지 말썽이었다.

“괜찮다, 나오지 말고 전화 받아라.”

“아닙니다, 나중에 받으면 됩니다.”

“나중에 받다니? 그건 전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다. 나오지 말고 전화 받아라.”

“알겠습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동빈은 현관까지만 장군과 함께할 수 있었다. 장군의 완고한 고집 때문에 전화부터 받아야 했다.

“여보세요. 누구?”

동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되묻는 눈치였다.

“난 전혀 반갑지 않은데?”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인 모양이다. 동빈이 대놓고 면박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얼쑤? 도와 달라고? 그것도 지금 당장? 내가 약 먹었어?”

동빈은 진짜 남을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중요한 시험이 바로 이틀 뒤라 자기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뭐라고! 그게 진짜야?”

그러나 동빈의 태도는 금세 바뀌었다. 잔뜩 부릅뜬 눈을 보니 충격적인 내용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어디라고? 알았어, 금방 갈게.”

우당탕탕.

동빈은 전화를 끊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었다. 급하게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벗어 놓은 옷가지를 그대로 놔두고 밖으로 튀어 나간 동빈은, 시급을 다투는 일인지 정신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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