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1/224)

화창한 봄은 짧게 지나갔다.

햇볕이 따갑다고 느껴지는 순간 여름이 찾아왔고, 지금은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시점이었다. 수험생들은 입시의 스트레스도 모자라 찜통더위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앉아만 있어도 등에 땀이 흘렀지만 제대로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남들이 더욱 열심히 공부하면 자연적으로 뒤처지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날씨처럼 수험생들의 경쟁심도 활활 타올랐다.

동빈이 피아노를 배우는 학원.

늦은 시간까지 동빈은 실기 연습에 한창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음대에 가기 위한 성적은 한참 부족하지만, 피아노 실력은 웬만큼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동빈은 오늘도 젊음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원장님, 어때요?”

연주를 끝낸 동빈은 장 원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스스로는 만족했는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매우 훌륭했어. 역시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구나.”

“감사합니다. 원장님!”

동빈의 흐뭇한 미소는 함박웃음으로 변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씻은 듯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동빈이의 가장 큰 장점은 테크닉이야. 감정 표현만 보충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겠어.”

“정말요? 그럼 제가 원하는 대학에…….”

“아니야, 동빈아. 꼭 그 대학만 고집할 필요는 없지… 동빈이의 꿈은 전문 연주자 아니었나? 어떤 음대에 들어가든 피아노를 계속 배운다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

“…….”

장 원장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은 사라지고, 현실을 직시하는 쪽으로 몰아갔다. 수능 시험일이 가까워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싸움 같은 거 하지 마. 그러다 손이라도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알겠습니다.”

장 원장은 언제나 같은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한때는 피아노 레슨을 중단하겠다는 강경책을 썼지만, 그때 충격을 받은 사람은 동빈이 아니라 송 교관이었다. 목숨 걸고 막은 송 교관 덕분에 동빈이 이렇게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끼이익.

“학교 다녀왔습니다.”

출입문이 열리면서 유나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공부에 지치고 더위에 찌들었는지 완전히 녹초가 된 모습이었다.

“유나 왔구나.”

“응… 동빈이 넌 언제 봐도 기운이 넘쳐 보인다.”

“건강 하나는 타고났잖아. 그런데 벌써 자율 학습 끝났어?”

“아니… 너무 피곤해서 오늘 좀 빨리 왔어…….”

철퍼덕.

유나는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얼마나 몸이 좋지 않은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유나야, 괜찮니?”

“괜찮아, 엄마…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장 원장은 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유나의 말처럼 특별한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올라가서 씻어.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니?”

“엄마… 나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쯧쯧쯧, 우리 딸이 얼마나 피곤했으면… 조금만 기다려. 내가 유나 좋아하는 생과일주스 만들어 올게.”

“고마워… 엄마.”

자식이 수험생이면 부모들까지 덩달아 고생하기 마련이다. 장 원장은 생과일주스를 만들기 위해 서둘러 위층으로 향했다.

“유나야, 그렇게 피곤하니?”

“당근이지… 날씨도 날씨지만 어제도 세 시간밖에 못 잤단 말이야. 머리도 지끈지끈하고 미치겠어.”

“그 정도면 충분히 잤구만.”

“어머… 방금 뭐라고 했어?”

벌떡.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던 유나가 몸을 일으켰다. 세 시간이나 잤으면 충분하다고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을 하냐?”

“요즘 내가 얼마나 신경이 예민한데 그런 소리를 하니?”

“무, 무슨 소리야?”

“세 시간이나 잤으면 충분하다니? 그럼, 동빈이 넌 하루에 몇 시간 자는데? 말해 봐!”

“나는… 두 시간…….”

“…….”

뭐라고 잔소리를 퍼부으려 했던 유나는 주춤했다. 다른 건 몰라도 동빈처럼 정직한 학생은 없었다. 그렇다면 두 시간밖에 안 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너 게임 하니?”

“아니, 수험생이 무슨… 열심히 공부만 하고 있지.”

“그런데도 성적이 그 모양…….”

유나는 할 말을 잃었다. 두 시간밖에 안 자고 열심히 공부만 하는데, 동빈의 성적은 그녀가 함부로 언급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난 공부 체질이 아닌가 봐. 암만 노력해도 쉽지가 않네. 놀아서 그런 성적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더라.”

“기운 내. 그래도 피아노 실력은 점점 늘고 있잖아? 난 동빈이가 훌륭한 연주자가 될 거라 확신해.”

이제는 유나가 동빈을 위로하는 처지였다. 동빈만큼 공부하고도 그렇게 형편없는 성적을 받는 학생은 절대 흔치 않았다.

“고맙다. 사실 나 많이 답답했거든. 공부는 못하는 놈이 싸움만 잘한다는 소리도 부담스러웠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세상에 동빈이 너처럼 바른 생활 사나이가 어디 있다고! 그런 말 하는 놈들은, 내가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해 줄게!”

불끈.

유나는 전투 자세까지 취하며 반전을 꾀했다. 다 같이 힘든 수험생 생활…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던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흠… 자세가 제법인데!”

“정말? 난 유명한 몸친데?”

유나는 주먹을 내지른 자세를 유지하며 물었다.

“아니야, 격투기 쪽은 재능이 있는 것 같아… 여자치고는 체격 조건도 괜찮고, 순간적인 힘을 모으는 능력은 타고난 것 같아. 맨손 대결에서는 그런 주먹이 효과가 상당히 크거든. 유연성 떨어지는 것만 보강하면 뭐… 웬만한 남자 정도는 거뜬히 이길 수 있겠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대학 떨어지면 여자 격투기 선수로 본격적으로 나서 볼까?”

완전히 장난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반 정도는 진심이 담겼다고 볼 수 있었다. 100 대 1의 신화를 창조한 동빈에게 칭찬을 들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참, 요즘 혜영이는 병원에 안 가더라.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몇 번 주먹을 휘두르던 유나가 화제를 바꿨다. 격투기 쪽은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응… 혜영이 진짜 캐나다 갔어.”

“어머, 언제 떠났니? 동빈이, 너 무척 섭섭했겠다.”

유나는 혜영이 떠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공부에만 열중하다 보니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떠난 지는 보름 정도 됐는데…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떠났기에 미련은 없어.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지.”

“에이… 얼굴 보니 서운하다고 써 있는데, 뭐. 내가 괜찮은 여자 소개시켜 줄까?”

“아니야, 고등학생 때는 열심히 공부만 해야지. 여자 친구는 대학 가서도 충분히 사귈 수 있잖아.”

“어째 담임하고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을 하냐? 이럴 때 보면 꼭 애늙은이 같기도 하고…….”

유나는 동빈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전학을 왔을 때부터 당최 짐작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떠올린 것이다. 멍청한 듯 보일 정도로 순수해 보였는데 갑자기 고교를 평정하고… 아무튼 흔치 않은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끼이익.

위층으로 올라갔던 장 원장이 내려왔다.

“유나야, 미안… 과일이 다 떨어져서 지금 사 와야겠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집 안 구석구석을 다 뒤졌지만 과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일만 없는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재료 자체가 없었다.

“엄마, 동빈이 것도 만들어 줘요.”

“난 괜찮은데? 전 됐어요. 원장님.”

“아니야, 조금만 기다렸다고 먹고 가. 금방 시장에 갔다 올게.”

장 여사는 서둘러 밖으로 나섰고, 동빈과 유나는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대화를 하다 보니 재미있는 화제가 넘쳐났다. 동빈은 늦게까지 유나와 수다를 떨다가 시원한 생과일주스까지 얻어먹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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