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10/224)

수험생

동빈의 인기는 아이돌 스타가 부럽지 않았다.

고교를 평정한 일화가 알려지면서 엄청난 격려가 폭주했다.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뿐만 아니라 벌써 자서전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다.

동빈이 자수를 하고 얼마 후, 경찰은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을 내렸다. 봉사 활동 명령.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것에 비해 의외로 미약한 처벌이었다. 여론에 밀렸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결국 형사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퇴학 같은 중징계를 내리지 않고 봉사 활동 처분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 거대한 배후 세력이 작용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 배후 세력이 방송 사고를 조장했던 원 회장 라인이라는 것이었다.

“우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햇빛이냐?”

“그러게…….”

대한민국 수험생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집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고, 이처럼 점심을 먹은 다음에나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동빈과 주철 그리고 석진은 운동장이 정면으로 보이는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젠장! 날씨 우라지게 좋다. 이럴 때는 오토바이 타고 야외로 나가야 하는데…….”

주철은 맑고 푸른 하늘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공부만 해야 하는 처지가 한스럽게 느껴졌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아니냐. 수진이도 나처럼 하늘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석진도 덩달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모범생인 그도 고3 생활은 꽤나 부담스러웠다. 성적에 대한 압박과 어떤 대학, 어떤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골머리를 썩었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 학생도 있었다.

“어허, 수험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놀러 갈 생각만 하다니!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겠어?”

동빈은 언제나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넘쳐 났다. 물론 열정만 넘치니 문제였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적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동빈아, 그만 좀 하지. 솔직히 대학은 네가 가장 문제잖아?”

“에이… 씨! 농담도 못 하냐?”

성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동빈은 본전도 찾지 못했다. 이럴 때는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리는 게 상책이었다.

“석진이, 넌 무슨 학과에 들어갈 거야?”

동빈은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을 물었다. 석진의 성적이라면 어느 대학, 어느 학과든 다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직도 전공할 분야를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빈은 곧 죽어도 음대를 고집했고, 주철은 아버지의 성화 때문에 경영학을 전공해야 했다.

“글쎄…….”

석진은 뒷말을 얼버무렸다.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었기에 동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주철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말 좀 해 봐라. 무슨 학과에 지원할 거야?”

“아직은 대답할 단계가 아니라서…….”

“넌 골라 가는 재미가 있잖아! 그냥 어디 가고 싶다고 하면 끝나는 거 아니야?”

“골라 가는 재미는 무슨…….”

석진은 계속 뒷말을 흐렸다. 병적으로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주철은 슬슬 열 받기 시작했다.

“괜히 답답해 죽겠네! 친구끼리 못 할 말이 어디 있어? 저번에 담임하고 면담할 때 말이야, 법대 들어간다고 했다며?”

“아니야, 그건 담임이 일방적으로 주장한 거지. 귀찮아서 난 고개만 끄덕였어.”

“우와! 그러니까 진짜로 원하는 학과가 뭔데? 제발 말해 줘… 궁금해서 나 돌아가실 것 같아!”

주철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물론 장난기가 다분한 행동이었지만, 석진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럼 말이야, 내 말 듣고 뭐라고 딴지 걸기 없기야!”

“당연하지! 나처럼 친구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빨리 좀 말해 봐.”

“사실은 말이야…….”

석진이 입을 벌리자 주철은 숨까지 멈추었다. 속으로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석진의 다음 말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꼭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가고 싶었어. 예전부터 쭉…….”

“야, 야, 야! 넌 개념이 있는 놈이냐!”

“…….”

주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약속을 어겼다. 입에 거품을 물고서 석진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성적으로 고작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가겠다고? 너 미쳤지? 아니, 우리 열 받아 죽게 하려고 작정한 거지, 그렇지?”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노무 새끼야! 혹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지 못해서 안달이 난 거냐? 그럼 사회복지사 말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란 말이다. 열라 벌어서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 도우라고! 그게 더 많은 사람을 돕는 길이야.”

“저기… 친구의 의견을 존중한다며?”

“그 말 취소야! 내가 속물처럼 보이겠지만 곰곰이 잘 생각해 봐라. 너희 집 졸라 가난해, 그지? 너희 어머님은 너 하나 믿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야. 장차 교수나 판검사 혹은 고위 공무원이 될 거라고 확신하는 분인데, 네 생각을 말하면 어머님이 뭐라고 하시겠냐? 입을 뻥긋하는 순간, 너희 어머니는 쓰려지셔. 남들 도우려다가 가족을 희생할 거야?”

주철은 상당히 격한 어조로 말을 끝냈다.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충고였지만, 석진은 괜히 억울한 표정이었다.

“난 사회의 이런 편견이 마음에 안 들어. 공부 잘하는 애들은 꼭 교수나 판검사, 고위 공무원이 돼야 하냐? 머리가 좋을수록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학과에 들어가라고 해야지.”

“이거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영 아니었네! 내가 다시 설명해 주리? 흥분을 가라앉히고 엑기스만 설명할게. 꼭 사회복지학과를 나와야 사람을 돕는 건 아니잖아.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갖고 행복하게 살면서 남까지 도우란 말이야. 이젠 생각이 좀 바뀌었냐?”

“아니, 주철이 네가 그러니까 더욱 사회복지학과에 가고 싶은데… 사회복지사가 판사나 검사, 고위 공무원보다 못한 게 뭐야?”

“뭐, 뭐라고!”

주철의 충고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석진의 표정을 보니 반드시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열망이 느껴졌다. 혼자서는 석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으니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동빈아, 네가 좀 말려 봐라.”

“알았어!”

주철의 마음이 통했는지 동빈이 호기롭게 나섰다. 어떻게 석진을 만류할지 주철도 궁금한 순간이었다.

“석진아…….”

“왜… 왜 그러는데?”

동빈은 석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이렇게 진지한 동빈의 표정은 참 오랜만이다. 석진도 긴장을 했는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와락.

동빈은 석진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친구를 두어서 기뻐 미치겠다는 표현이었다.

“정말 존경스럽다.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여자 친구도 있지. 엄청난 효자에다 봉사 활동도 열심히 했잖아.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니… 석진이 너 같은 애가 있어서 아직 세상이 아름다운 거야.”

“고, 고맙다. 동빈아…….”

“쌍으로 지랄을 해라.”

주철은 허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동빈을 믿은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석진아, 어머니께는 어떻게 말할 거냐?”

주철은 다시 진중하게 물었다. 장난스럽게 끝낼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의 소원은 내가 사법 고시에 합격하는 거야.”

“내 말이 그거다. 그래서 어쩔 거냐고?”

“사회복지학과 다니면서 사법 고시에 합격하면 되지. 열심히 공부하면 군대 가기 전까지 합격할 수 있겠지, 뭐.”

“정말 가능하겠냐?”

“난 공부처럼 쉬운 게 없더라.”

석진은 절대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철도 더 이상 되묻지 않았다.

“석진아,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

동빈이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법과가 아닌 다른 학과를 다니면서 사법 고시에 붙는 건 매우 힘들었다. 남들은 척 들으면 아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방금 말했듯이 난 공부가 제일 쉬워. 충분히 붙을 수 있어.”

“석진이, 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놈이다. 나는 몇 번이나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할 거야. 정말 대단해.”

“동빈아, 내가 아무리 대단해도… 너의 100 대 1 전설만 하겠냐?”

“…….”

진짜 괴물은 바로 동빈이었다.

젊은 나이에 사법 고시에 붙은 사람은 꽤 되지만, 전국에 있는 고등학교를 평정한 건 동빈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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