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8/224)

장군의 차량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식당에서 VIP 손님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공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고, 식당 내부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딸깍.

차에서 내리려 문까지 열었던 동빈이 주춤했다.

“저기… 장군님도 식사를 하시지요?”

혼자만 식사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동빈은 괜히 머리를 긁으며 무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괜찮다. 급히 들를 때가 있어서 말이야.”

“그렇군요. 먼저 내리겠습니다.”

“잠깐… 달리 힘든 점은 없더냐? 돈이 부족하다거나…….”

동빈이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장군이 물었다. 장군도 그냥 보내기 섭섭했던 모양이다. 거의 두 달 만의 만남인데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전혀 부족한 점 없습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쿠웅.

동빈은 서둘러 내려서는 차량 문을 닫았다. 점점 어색해지는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빈아, 조심해서 지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장군님.”

동빈의 대답은 언제 들어도 믿음직했다. 장군은 지체 없이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 기사, 출발하지.”

“네, 알겠습니다.”

부르릉.

잠시 멈췄던 차량이 다시 움직이며 출구 표시가 있는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군님, 어디로 모실까요?”

“국방부로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국방부로 모시겠습니다.”

목적지를 확인한 운전기사는 더욱 천천히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면 빠를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 눈치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으음?”

핸드폰 소리에 장군의 표정이 변했다. 비상시 연락 수단이나 최고 윗선과 연결된 핫라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장군이 직접 들고 다니는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장군은 매우 냉담하게 전화를 받았다. 최고 윗선의 전화는 아니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원 회장님이시군요. 이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리저리 물어서 알아냈지. 내가 발이 좀 넓은 편이라서.

“회장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이 번호를 쓸 정도의 위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부터는 여기로 연락하지 마시고 보좌관을 통해서 연락 주십시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자네의 보좌관을 통해서 연락하든가, 아니면… 내가 이 번호를 쓸 수 있는 위치에 오르든가 말일세.

전화상의 대화만으로도 팽팽한 김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장군이나 원 회장 모두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무슨 용무로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까?”

-자네 얼굴 좀 봤으면 해서 말일세.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과 장소만 말씀하십시오.”

-내 성격 급한 건 자네도 알지? 지금 당장은 어떤가?

“좋습니다. 제가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둘의 만남은 급진전을 이루었다. 장군이나 원 회장 모두 이번 싸움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번에 나하고 만났던 요정 기억하나? 강북에 있는…….

“알고 있습니다. 곧장 그리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오게나. 내가 점심을 굶어서 말일세.

“금방 도착할 겁니다. 음식부터 시켜 놓으십시오.”

딸깍.

통화를 마친 장군은 운전기사를 바라보았다.

“장 기사, 목적지가 바뀌었네.”

“어디로 모실까요?”

“저번에 원 회장과 만났던 곳을 알고 있나?”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선을 바꾸었다. 약속 장소로 가려면 좌회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통 한옥의 멋을 제대로 살린 고급 식당.

원 회장은 요정이라 불렀지만 그건 예전의 명칭이었다. 지금은 부유층이나 외국 손님들을 위한 곳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하지만 원 회장은 아직도 요정이란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끼이익.

장군의 검은색 승용차가 멈춰 섰다.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 거의 급정거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어서 오십…….”

딸깍.

대기하고 있던 지배인이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차량 문이 열렸다. 장군이 직접 문을 열고 내린 것이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 지배인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전 안내가 필요 없습니다.”

“아, 네…….”

장군은 짤막한 말로 지배인을 위로했다. 한 번 왔던 경험이 있기에 직접 찾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네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게.”

“네, 장군님.”

운전기사에게 당부를 끝낸 장군은 출입문으로 들어섰다. 잘 꾸며진 정원을 지나자 양 갈래 길이 나타났고, 저번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장군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군님.”

“괜찮소, 안내는 필요 없을 것 같소.”

“알겠습니다.”

그녀는 두말없이 물러갔고, 장군은 예전 기억을 따라 발걸음을 계속했다.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이 보이니 제대로 찾은 모양이었다. 장군은 건물 내부의 밀실 위치까지 정확히 기억해 냈다.

드르륵.

지체 없이 방문을 연 장군은 원 회장의 모습을 확인하고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원 회장의 스타일은 저번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반백이 성성한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겼고,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조끼를 걸친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제가 빨리 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음식을 시키지 않으셨군요.”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 서둘러서 음식 내오라고 하겠네.”

교자상에는 찻잔 하나만 달랑 올려져 있었다. 장군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원 회장은 황급히 종업원을 부르려 했다.

“됐습니다, 회장님.”

“아니, 왜?”

“갑자기 식욕이 떨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입에 대기 싫군요.”

“날 자꾸만 무안하게 만드는군.”

“제 변덕이 심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앉으시지요.”

“마음 변하면 언제라도 이야기하게나.”

원 회장이 앉자 장군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앉은 자세 또한 매우 비슷했다. 의젓하면서도 당당함이 느껴지는 모습… 나이가 들어도 강함을 잃지 않는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말을 할까요?”

“그렇게 하게나.”

팽팽한 긴장감을 깨고 장군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겉치레는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 태세였다.

“오늘이 제 아들 졸업식이었습니다.”

“이거 난감한 일이군.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안됐다고 위로를 전해야 하나…….”

원 회장은 장군의 눈빛을 외면했다. 만날 때를 잘못 정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너무 심려하진 마십시오.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기태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는 정말 못 참을 것 같았는데… 역시 시간이 약인가 봅니다.”

“그때 나도 걱정이 많았네. 자네처럼 냉철한 사람이 그렇게 많이 흔들릴 줄은 몰랐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니 다행이구만.”

“아, 이거 죄송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니 또 기분이 울적해지는군요. 아니… 모든 걸 다 부숴 버리고 싶습니다.”

“…….”

원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변덕을 부리다니? 그러나 장군은 원 회장의 반응과 상관없이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차디찬 강물에서 꺼낸 아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침착함이나 냉철함 따위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군대를 동원해서 내 아들 그렇게 만든 놈들을 아작 내고 싶었습니다. 광화문 거리에 알몸으로 묶어 놓고 탱크로 깔아뭉개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탱크는 내가 직접 조종하려고 했습니다.”

“너무 과격한 생각을 했었군.”

“맞습니다. 너무 과격한 생각이었는지 제 참모들이 만류하더군요. 그래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참았는데… 하늘이 도우시는지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내 아들을 죽인 일진이라는 새끼… 그 새끼가 무럭무럭 크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 아기를 낳을 때까지 꾹 참는 것이지요. 그 새끼가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그놈을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 새끼가 보는 앞에서 그놈의 자식을 물에 빠트려 죽여 버리면, 그제야 제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질 것 같았습니다.”

“…….”

원 회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장군의 말을 경청했다.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공감하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에 가까웠다. 장군의 말이나 행동은 정신병자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마음속에 비수를 감추고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언제부턴가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군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던 제 참을성이 한계를 드러낸 겁니다. 고작 사흘 만에…….”

“이보게, 자네의 아픈 마음은 모르는 바 아닌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원 회장도 참을성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푸념이나 들으려고 장군을 만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증오로 가득 찼던 시간이 지나자 무력감이 몰려오더군요. 그놈들에게 복수를 하면 뭐 하나… 그런다고 죽은 기태가 살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때부터는 폐인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술 먹고 난리를 치는 그런 폐인이 아니라 마음속의 폐인이지요.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보좌관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더군요.”

“매우 중요한 정보라니?”

원 회장은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장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 아들을 그렇게 만든 일진이라는 놈의 배후 세력을 찾아낸 겁니다. 기태는 단순한 학교 폭력으로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

원 회장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기태가 죽어서 누가 제일 큰 이득을 보았는지 살펴보니 금방 나오더군요. 당장이라도 쳐부수고 싶었는데,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다시 삶의 목표를 찾았다고나 할까요? 그놈만큼은 철저히 부숴 주마. 아니, 부술 수 없다면 상처라도 내 주마.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최대한 큰 상처로 갚아 주마. 이것이 바로…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뭘 바라나? 그 배후를 칠 수 있는 힘을 빌려 달라는 뜻인가?”

“이제 연극은 그만 하셔도 됩니다.”

“자,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원 회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억울하다는 하소연이었지만, 장군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당시 차세대 전투기의 도입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지요? 뭐가 그리 급한 일이라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뚝딱 처리되었더군요. 제가 있었으면 절대 승인을 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어험!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아. 자네는 아들 때문에 지금 제정신이 아닐세.”

“어디를 가십니까? 아직 제 얘기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원 회장을 제지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을 보니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이 사람,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만…….”

원 회장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군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고 반쯤 몸을 튼 자세를 유지했다. 원 회장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회장님, 상대가 죽기 살기로 덤빈다면 왜 그러는지 자세히 알아보셨어야지요. 이번 싸움은 회장님과 나!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끝나게 됩니다.”

“설령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사건의 배후라 해도 말이야… 누가 죽을지는 뻔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원 회장은 평상시의 목소리를 회복했다. 여전히 장군의 시선을 외면하고는 있지만, 당황했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전쟁에서 방심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지요.”

“그건 내가 자네한테 했던 말 같은데?”

“회장님의 충고 덕분에 이 정도까지 컸습니다. 그 충고의 보답으로 말씀드리는데…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저는 사랑하는 아내도 먼저 보내 봤고… 하나뿐인 자식의 죽음까지 겪었습니다. 저한테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 결국 피를 보자는 소리구만…….”

원 회장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그의 인생에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제 말은 끝났습니다. 이제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

“싫으면 제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장군은 원 회장이 기분 상할 짓만 골라서 했다. 더 이상 선배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라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원 회장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자네가 그 문을 나가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적이 되는 것이야. 적이라는 개념은 잘 알고 있을 걸세.”

“회장님… 우린 벌써 적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충고 드리겠습니다. 동빈이는 그냥 두십시오.”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 지금 적한테 자비를 구하는 것인가?”

원 회장은 장군의 눈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자신에게 자비를 바라지 말라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회장님의 참모들이 실수한 것을 제가 지적해 드리는 겁니다.”

“내 참모들이 실수를 했다고?”

“동빈이에 대해서 조금 더 조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제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만…….”

드르륵.

장군과 원 회장의 대화는 예상보다 금세 끝났다. 장군의 일방적인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고, 혼자 남게 된 원 회장의 얼굴은 뭐 씹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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