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6/224)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람 있게 방학을 보낸 학생들은 개학이 두렵지 않았지만, 대책 없이 놀기만 한 학생들은 못내 아쉬운 나날이었다.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3 수험생이 되는 학생들에게는 겨울방학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한 주도 안 되는 휴식을 마치고 보충수업에 한창인 그들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시간표였고, 학생들도 열의를 가지고 수업에 임했다. 대한민국의 수험생이 어떤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명성고등학교 2학년 교실.

웅성웅성.

점심시간이 되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드는 시간이었다.

“어디 보자…….”

바스락.

석진은 식당으로 내려가지 않고, 아침에 사온 조간신문을 꺼내서는 보기 좋게 활짝 펼쳤다.

“오늘은 무슨 기사가 실렸나.”

동빈과 관계된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어떤 사고를 치느냐에 따라 실리는 면이 달랐다. 석진이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1면에 있는 톱기사였다.

국내 최대의 폭력 조직 일망타진!

“설마 동빈의 작품은 아니겠지…….”

석진이 의심의 눈초리로 1면 헤드라인을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인지 자세하게 기사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전국을 무대로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된 사상 최대 폭력 조직이 무더기로 체포됐다. 이들의 죄명은 살인, 폭력, 납치부터 마약 거래와 총기 밀매 등 수십 가지 항목에 해당한다. 워낙 방대한 조직이고 자동화기로 무장까지 했기에 군대를 동원했을 정도였다.

군경합동수사본부는 58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현장에서 체포하고, 이 중 상당수를 구속할 방침이다. 또한 이 조직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150여 명을 불구속 기소하고, 달아난 조직원 100여 명을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진짜 장난 아니네…….”

군대까지 동원되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우리나라에 자동화기로 무장한 폭력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엄청난 숫자가 검거된 것에 혀를 내둘렀다. 신문사도 이러한 면에 초점을 맞추어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었다.

“동빈이에게 유리한 일인가?”

학교 폭력에 관한 기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폭력 조직 검거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아주 좋아… 이대로 며칠이 지나면…….”

석진은 이번 사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언론들이 폭력 조직 검거 기사에 열을 올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동빈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증거였는데…….

“석진아, 뭐 해?”

화악!

부반장인 유나가 석진이 보던 신문을 빼앗았다. 장난이 분명했지만 열심히 신문을 읽던 석진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깜짝이야…….”

석진은 굳은 표정으로 유나를 바라보았다. 진정이 되지 않는지 아직도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눈 튀어나오겠다. 또 동빈이에 관한 기사가 뜬 거야?”

“아니.”

“그런데 왜 이리 놀라는 거야? 어디 보자…….”

유나는 갈취(?)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석진이 무슨 기사를 보았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이야, 국내 최대의 범죄 조직이 잡혔네. 군경합동수사본부 발표에 따르면… 어머나! 여기 사진… 수사본부의 책임자가 동빈이가 교관님이라고 부르던 할아버지잖아?”

유나는 석진이 찾지 못한 점을 발견했다. 멋진 군복에 선글라스를 써서 헛갈리긴 했지만 송 교관이 분명했다. 피아노 학원을 밥 먹듯이 찾아오는 그의 생김새를 유나가 착각할 리 없었다.

“정말이야? 그 북한 사투리 쓰시는 할아버지 말이지? 주철이 잡아다가 네 남자 친구 삼으려 했던…….”

“그래! 이렇게 보니까, 엄청 멋진 분이네. 혼자서 거의 수십 명의 깡패들을 쓰러뜨렸대! 그것도 맨손으로…….”

“주철이 말이 사실이었군. 포스가 엄청난 분이라고 했거든.”

“이 신문 나 줘. 엄마 보여 드려야겠다.”

“그래라.”

“땡큐.”

유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단지 신문을 얻으려 그녀가 석진을 찾아왔을 리 만무했다. 대충 신문을 접어 넣은 유나는 진짜 본론을 꺼냈다.

“석진아, 동빈이 소식은 정말 모르니?”

“…….”

“너한테는 연락을 할 것 아니야?”

“…….”

석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질문을 받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만 말해 봐. 응?”

“너, 뭐 하는 거야?”

뻣뻣하기로 소문난 그녀가 양손을 뒤로 한 채, 괜히 몸을 꼬았다. 설마! 애교를 부리는 것인가? 하지만 보는 사람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으응~ 말해 봐. 넌 어디 있는지 알고 있잖아? 응…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잖아? 석진아아~.”

“모, 모른다니까…….”

“아이이잉~ 석진아아~.”

“제, 제발… 혀 짧은 소리는…….”

“아잉! 알려 줘. 석진아아~ 아잉이이~.”

“다, 닥쳐!”

썰렁~.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말까지 튀어나왔겠는가!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른 석진은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

“아, 아니야… 내가 조금 심했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심했다. 어디서 그런 희한한 애교를 배워 왔는지… 유나의 어색한 몸동작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고, 공포의 혀 짧은 소리에서 그만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어… 그런데 동빈이 어디 있는지 정말 몰라?”

“저번에 말했잖아. 나는 대구에서 그냥 올라왔다니까.”

“이러다 퇴학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방송 사고만 해도 엄청난데… 더 이상 사고 치면 정말 안 된단 말이야.”

동빈에 대한 학교 처벌의 수위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경찰에 구속된다면 당연히 퇴학이지만, 법적인 부분도 이견이 많았다. 학생이 싸운 것은 잘못이지만, 퇴학을 당할 정도는 아니라는 동정론이 고개를 들었다. 금품을 갈취한 것도 아니고 선량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진을 응징하는 차원이란 반박이었다. 그러나 동빈이 계속 싸우고 다닌다면, 이러한 동정론마저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동빈이 고집을 누가 꺾겠냐? 나도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했지만, 그놈이 말을 들어 먹어야지.”

“어디 있는지만 알려 줘. 우리 엄마가 설득하면 될 거야. 동빈이 때문에 우리 엄마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아?”

“미안하지만 나도 정말 몰라… 대신 동빈이하고 연락이 되는 놈을 알려 줄게.”

“그게 누군데?”

“주철이…….”

“뭐, 뭐야? 해외 연수 떠나서 보충수업 못 듣는다고 했잖아!”

유나는 기도 안 찬다는 반응이었다. 담임선생님까지 감쪽같이 속이고 동빈을 따라다닌 것이었다.

“여기, 주철이 전화번호. 안 받아도 난 책임 못 져!”

“에휴~ 내가 주철이한테 먼저 전화할 줄은 몰랐다.”

유나는 석진이 전해 주는 메모지를 받았다. 앙숙이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엄마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항은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4킬로미터의 부두 시설을 가지고 국내 화물의 약 40퍼센트, 컨테이너 화물의 80퍼센트를 처리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항구이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부두를 따라 정박해 있는 수많은 선박들과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초대형 크레인은 부산항의 역동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광활하기 그지없는 야적장에 빼곡히 쌓여 있는 엄청난 수의 컨테이너! 세계 각국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잣대나 다름없었는데…….

딩딩딩딩. 딩딩딩딩.

빼곡히 늘어서 있는 컨테이너 사이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조용한 야적장이라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저쪽이다! 빨리 잡아!”

우르르.

야적장 주위에서 수색하던 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핸드폰 소리가 결정적인 단서였던 것이다.

“에이… 씨!”

주철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때문에 볼 장 다 봤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어떤 새끼야!”

전화를 건 사람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전원을 끄지 않은 자신의 실수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뭐, 뭐야…….”

촤르르.

주철은 신발이 미끄러질 정도로 급하게 멈춰야 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주철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뛰어나온 것이다.

“조, 졸라 난감하네…….”

뒤에서는 다른 놈들이 떼거지로 쫓아오고 있었고, 양 측면은 컨테이너로 가로막혀 있기에 도망치기도 수월치 않았다.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강남의 양주철… 어디 또 도망쳐 보시지.”

“…….”

놈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전면과 후면에서 동시에 주철을 압박해 들어왔다. 주철은 사방으로 고개만 돌릴 뿐,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죽여 줄까? 겁도 없이 우리한테 도전을 해?”

“요즘은 자신이 김동빈이라 착각하는 놈들이 너무 많아. 일진이 무슨 동네 양아치 수준인 줄 알아?”

놈들은 인상을 쓰면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동빈의 영향으로 일진들의 명성이 땅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이었다. 찍소리도 못 했던 학생들이 한꺼번에 반항을 했고, 이제는 초등학생도 일진 알기를 뭐처럼 알았다. 동빈 때문에 받은 상처를 주철에게 되갚으려는 수작이었다.

딩딩딩딩. 딩딩딩딩.

“뭐 해? 양주철… 전화는 받아야지.”

일진들이 선심을 베풀었다. 주철이 숨은 곳을 알려 준 것에 대한 보답일지도 몰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주철은 핸드폰 폴더를 열어젖혔다.

딸깍.

“여보세요.”

-어머! 주철아, 나 유난데… 내 전화는 안 받을 줄 알았는데 정말 뜻밖이다.

“그래, 동빈아…….”

-무, 무슨 소리야? 여보세요? 나 유나야! 유나!

주철은 최후의 꼼수를 생각해 냈다. 일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름을 거론한 것이다.

“저 새끼, 진짜 김동빈과 통화하는 것일까?”

“김동빈이 약 먹었냐? 저런 새끼와 친구 하게?”

“아니야, 둘이 같은 학교 다닌다고 하던데…….”

효과가 있었는지 일진들의 태도가 변했다. 이를 놓칠세라, 주철의 연극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당근이지! 이 근방에 있는 일진 새끼들은 다 모아 놨다.”

-야? 모으긴 뭘 모아?

“쌈만 하는 새끼들치고 머리 좋은 놈 봤냐? 한판 뜨자고 했더니 난리도 아니게 몰려들었다.”

-주철아, 너 자꾸 왜 이러니?

“그래, 졸라 멋지게 등장해라. 이 새끼들 더러운 표정 좀 보게.”

주철의 얼굴은 오만방자함으로 가득했다. 위기에 빠진 쪽은 자신이 아니라 일진이라는 항변! 물론 야적장에 모인 일진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양주철, 이제 촌스러운 연극은 그만 하지.”

“무척이나 섭섭하네! 내 말이 거짓이면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자살한다.”

-너 미쳤어? 혀는 왜 깨물어!

주철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자신이 했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동빈을 대신해서 놈들을 끌어 모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동빈이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동빈이 올 동안 숨어서 기다리려 했건만, 유나가 산통을 깬 것이다.

“아주 쌩쇼 한다.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안 그래?”

“지랄인지 아닌지 전화 받아 보면 되잖아? 내 친구가 당장 바꾸라고 하거든.”

“……!”

주철은 자신의 핸드폰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그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에 일진들이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뭐 해? 어서 받아?”

“개새끼… 뻥치는 거면 진짜 죽여 버린다.”

짙은 눈썹의 일진이 나섰다. 무리의 제일 앞에서 날쳤던 놈이지만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상당히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팔 떨어지겠다. 빨리 잡아.”

“씨발…….”

여유가 넘치는 주철의 표정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괜히 전화 받아서 동빈에게 찍히는 것은 아닌가? 별별 잡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화악.

잠시 머뭇거렸던 것을 만회하려는 행동인가? 짙은 눈썹은 거칠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 핸드폰을 얼굴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기…김동빈?”

-……?

놈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전화 통화라 이 정도지, 실제로 봤다면 말조차 못 붙였을 것이다.

“여, 여보세요… 김동빈 맞아?”

-넌 또 뭐니? 내 목소리가 남자 같니?

“……!”

짙은 눈썹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괴물 김동빈이 여자일 리는 없었다. 속임수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당해 보니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개새끼…….”

“알면서 속은 게 병신이지!”

후앙.

“……!”

주철은 선제공격을 시도했다. 순간적으로 몸을 틀면서 롱 훅을 날린 것이다.

퍼억!

짙은 눈썹의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주철의 권투 실력은 동빈도 인정할 정도 아니던가. 파괴력이 좋은 훅이 정확히 명중했으니 제대로 서 있을 놈은 거의 없었다.

풀썩.

짙은 눈썹의 몸뚱이는 뻣뻣이 굳은 상태로 뒤로 넘어갔다.

“이봐, 핸드폰은 줘야지.”

주철은 놈이 쓰러지기 전에 핸드폰을 거둬들였다. 선제공격으로 한 놈을 처리하긴 했지만 나머지 50명이 문제였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그냥 밟아 버려!”

와르르.

놈들은 주철을 향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싸움에 일가견 있는 주철이었지만 혼자 감당하기는 힘든 숫자였다. 수중에 막대기라도 있으면 몰라도… 100퍼센트 지는 싸움이었다.

“에이… 씨!”

주철은 한 놈을 밀쳐내면서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고는 흠칫하여 물러서는 놈을 공략했다.

“내가 호락호락 당할 성싶으냐!”

퍼퍼퍼퍽.

빠른 좌우 연타로 놈들의 혼쭐을 빼놓은 주철! 철부지 일진 정도라면 한꺼번에 몇 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뭐 해, 씨발! 걍 달려들어!”

“연장 뒀다 어디다 쓸 거야! 그냥 조져 버려!”

“미친다. 졸라 많이도 몰려드네!”

머릿수의 불리함은 곧바로 나타났다. 몇 놈 처리하고 나니 벌써부터 숨이 벅차 왔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시파… 다 덤벼! 맨 처음 오는 놈부터 아작 내 버린다!”

“뺀질한 새끼…지랄을 떨어라!”

와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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