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3/224)

얼떨결에 동자승이 된 동빈.

계절이 한 바퀴 지나고 겨울이 또 찾아왔다. 작년보다 더욱 추운 날이 많았지만, 동빈은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청수 스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올해는 학교도 간다고 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리 행복한 표정이 아니었다. 동빈은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긴급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 이틀 전 교도소를 탈출한 죄인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입니다. 대부분 죄질이 흉악한 장기수들이며, 무기까지 소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경찰은 탈출한 범인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려…….

“동빈아, 왜 그리 시무룩한 것이냐?”

“…….”

청수 스님이 숙소로 돌아왔다가 시름시름 앓는 개처럼 기가 죽은 동빈의 모습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말해 보거라. 요즘은 통 말도 없고…….”

“…….”

동빈은 여름이 지나면서 이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점점 더 심각해진다는 증거였다.

“동빈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청수 스님, 그게요…….”

“괜찮다,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혹시 말이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궁금한 것이냐?”

“그딴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다행이구나. 진짜로 뭐든지 물어보아라.”

청수 스님은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워낙 발육 상태가 좋은 동빈이라 괜한 걱정부터 앞섰던 것이다.

“청수 스님, 부처님은 대자대비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지.”

“정성을 들이면 소원을 들어주신다고도 했잖아요.”

“그랬었지.”

“부처님이나 청수 스님 중 한 분은 거짓말을 하셨어요.”

“으잉? 그게 무슨 소리더냐?”

청수 스님은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아니면 부처님이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정성을 들였는데 아무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요. 겨울도 많이 지났는데 누나가 안 오잖아요.”

“오호라, 그래서 요즘 동빈이가 통 기운이 없었구나.”

청수 스님은 동빈의 고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름방학 때 온다고 약속을 했던 소녀가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동빈이 얼마나 열심히 정성을 들였는지는 청수 스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보기 싫어서 안 오는 거예요.”

“아니란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야.”

“정말요?”

“그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중생들의 정성을 외면하지 못하신단다. 그렇게 열심히 치성을 드렸으니 꼭 보답을 받을 것이야.”

“좋아요! 지금 또 부처님께 정성을 드릴 거예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중생들의 정성을 외면하지 못하잖아요!”

불끈!

청수 스님의 말은 동빈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동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당장이라도 법당으로 뛰어갈 기세를 보였다. 잔뜩 풀이 죽었다가 곧바로 기운을 차린 것이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떻겠느냐? 내일부터 정성을 들여도 늦지는 않는단다.”

“아니에요. 하루라도 정성을 빠트리면 안 돼요. 부처님도 까먹을 수 있잖아요!”

“하하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부처님은 기억력이 굉장히 좋으신 분이지. 3월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공부를 하는 것도 괜찮겠지… 우리 한글 공부할까?”

파다닥!

동빈은 공부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을 뛰쳐나갔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동빈이 공부와는 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동빈아, 공부해야지 어디를 가는 것이냐?”

“정성이 더 중요해요!”

동빈은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정성보다는 공부가 하기 싫은 표정이었다.

“부처님도 쉬셔야 한단다. 똑같은 소원으로 계속 응석 부리면 부처님께서 좋아하시겠느냐?”

“괜찮아요. 이번에는 다른 소원을 빌 거예요.”

동빈은 공부를 하지 않으려고 별 꼼수를 다 동원했다.

“어떤 소원을 빌려고 하는데?”

“고기 먹게 해 달라고 기원할 거예요. 부처님은 정성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

공부를 싫어하고 무척이나 단순했던 동빈… 결국 이 아이는 10년 뒤에 학교 꼴찌를 하게 된다.

그리고 며칠 뒤.

“우와! 신~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은 동빈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물론 동빈이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아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기 직전, 서울에 갔던 소녀가 다시 마을을 찾은 것이다. 청수 스님에게 이 소식을 들은 동빈은 한없이 기쁜 표정이었다.

“그렇게 좋으냐?”

“네! 지금 당장 마을에 갈 거예요!”

“그래… 내가 말린다고 되겠느냐? 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청수 스님은 동빈의 하산을 허락했다. 동빈이 얼마나 이날을 기다려 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저녁 공양 때까지 돌아오겠습니다.”

“괜찮다. 오늘은 큰스님도 안 계시니, 천천히 놀다 오너라.”

“정말 감사합니다!”

쪼르르.

동빈은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른 동작이었다.

기웃기웃.

동빈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저택을 기웃거렸다. 소박한 시골의 집과는 달리 멋들어진 양옥이었다. 거실에 피아노가 있다면 말 다한 것이다. 서울 소녀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별장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안 나오지?”

동빈은 까치발까지 하고 2층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정말 서울에서 내려온 것인가? 아무리 돌을 던져도 반응이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려도 소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스윽.

“이건 너무 큰가……?”

동빈은 돌멩이 하나를 집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까딱 실수하면 애먼 유리창만 박살 나는 것이다. 답답하게 시간만 흐르는 상황이었다.

“에이… 할 수 없지….”

동빈은 돌멩이를 버렸다. 그러고는 대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딩동딩동.

“누구세요?”

“…….”

초인종을 누르자 귀에 익은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소녀의 집을 봐 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누구시냐고요?”

“저 동빈인데요…….”

“어머나! 동자스님 오셨어요?”

그녀도 동빈을 잘 알고 있었다. 초여름부터 계속 기웃거렸으니 모르면 더 이상했다. 청암사의 귀여운 동자승이라 대접도 괜찮은 편이었다.

“서울 누나 왔어요? 왔다고 하던데…….”

“죄송해서 어쩌지요? 조금 늦으셨네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동빈은 화들짝 놀라서 반문했다. 늦었다니? 어떤 의미로 해석할지 난감한 것이다. 서울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벌써 서울에 올라간 것인지. 동빈의 단순한 머리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어머나, 동자스님이 많이 놀라셨네요. 정말 우리 아가씨 못 만난 거예요?”

“……?”

점점 모를 소리만 한다. 소녀를 만났다면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길이 엇갈린 모양이네요. 아가씨는 청암사로 가셨는데.”

“……!”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급한 마음에 지름길로 달려온 것이 화근이었다. 청암사의 지름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어 일반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았다.

“안에서 기다리세요. 동자스님이 절에 없으면 아가씨도 도로 내려올 겁니다.”

“아니에요. 제가 다시 올라갈게요.”

파다닥.

동빈은 부리나케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엇갈리지 않으리라! 보통 사람들이 이용하는 오솔길로 간다면 절대 어긋날 염려는 없었다. 숨이 가쁘기는 했지만 동빈은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아늑함의 대명사인 청암사.

자그만 규모만큼이나 스님의 숫자도 적었다. 기인으로 알려진 청암사의 큰스님은 다른 스님을 받지 않았다. 속세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물었고,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귀찮아서.

그러던 큰스님이 다른 스님을 연달아 받아들였다. 피아노를 치는 스님인 청수와 동자승 동빈.

가끔 찾아오는 신도들은 청수 스님의 뛰어난 피아노 실력과 족제비처럼 날랜 동자승의 재주에 흠뻑 빠져 들었다. 세 스님의 오붓한 산사 생활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헉헉… 헉헉…….”

쉬지 않고 달려온 동빈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지만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추위로 붉게 상기된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점차 번져 갔다.

“헉헉… 진짜 힘들다…….”

동빈은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청암사 입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소녀를 만나지 못했으니 청암사 내부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청수 스님과 피아노를 함께 치면서 동빈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살금살금.

동빈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처럼 개 사냥에 나선 것인가? 절대 아니다. 동자승이 어찌 살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처럼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우왁!’ 하고 갑자기 나타나면 소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청수 스님도 덩달아 놀라겠지? 즐거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이렇게 가슴 설레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뜨끔!

이상한 일이다. 기대감에 요동치던 심장이 꽁꽁 얼어붙은 기분이었다. 정말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까? 동빈은 가슴이 점점 오그라드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냄새는…….”

코끝을 자극하는 피 냄새가 청암사 내부에 진동을 했다. 불길한 기운의 동빈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사삭… 사삭…….

법당과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기운은 더욱 강해졌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사내들의 거친 목소리가 겨울바람 속에 섞여 있었다.

“씨발! 뭔 절에 돈이 하나도 없어.”

“실컷 배 채우고 여자까지 따먹었으면 됐잖아? 졸라 영계라 진짜 삼삼하던데?”

사삭… 사삭…….

동빈의 움직임은 더욱 기민해졌다. 청암사를 놀이터 삼아 지냈기에 법당에 몰래 접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배 채우고 재미는 봤는데, 뒤처리가 문제군. 피아노 치던 땡중 새끼야 그렇다 치고, 저년은 왜 죽였어? 나는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졸라 피가 그리웠거든. 이제야 속이 풀리는 것 같아. 날 살려 둔 게 법원의 실수지.”

“맞아, 우린 어차피 잡히면 죽을 목숨이잖아. 하고 싶은 짓은 실컷 하다가 졸라 멋있게 가는 거야.”

“이런 개새끼! 멀쩡한 시체는 왜 잘라? 피 튀기게 말이야.”

“내가 말 안 했었나? 나는 이게 즐거움이야…….”

“씨발, 변태들만 다 모였어.”

법당 외벽에 붙은 동빈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그들의 대화로 상황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비참한 결과…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믿고 싶지 않았다.

부슥…….

동빈은 창문 틈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눈을 가까이 붙여서 법당 내부를 살펴보았다.

흔들흔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청수 스님의 발이었다. 놈들은 사람을 죽이고 장난삼아 법당 대들보에 매달아 놓았다. 흔들거리는 시체의 움직임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상태는 더욱 비참했다. 몹쓸 짓을 당하고 죽은 것도 모자라 토막까지 당한 것이 분명했다.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는 피 묻은 자루가 그 증거였다.

쿵.

데굴데굴.

운명의 장난인가? 자루가 쏟아지면서 분리된 신체 일부들이 쏟아졌다. 소녀의 머리는 한참이나 구른 후 동빈의 시선과 마주치는 부근에서 멈추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소녀의 얼굴을 동빈은 외면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이 맞았어.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거야…….”

동빈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움직였다. 그리 멀리는 아니었다. 법당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팍팍팍.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한 동빈. 뾰족한 돌로 자국을 내어 꽁꽁 얼어붙은 부분을 제거했다. 자주 땅을 팠던 곳인지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번쩍.

동빈이 땅속에서 꺼낸 것은 서슬 퍼런 칼이었다. 동빈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칼날을 노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또한 개 사냥을 할 때와 비슷했다.

“로미오는 바보야. 줄리엣이 죽었다고 따라 죽다니… 나처럼 복수를 해야지…….”

동빈은 서슬 퍼런 칼날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고는 법당을 향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대는 모두 다섯 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리할 모양이었다.

“개만도 못한 새끼들…….”

동빈의 신형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 산짐승들의 간담까지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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