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2/224)

겨울의 기억

멀뚱멀뚱.

어린 동빈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집 밖에는 요상한 등불이 걸리고, 마당에서는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아버지는 나무 상자에 담겼고, 이상한 옷을 입은 동빈은 직접 손님들을 맞아야 했다. 마을 어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넌 그냥 나만 따라 하면 된다.”

이장이라는 사람이 고아가 된 동빈을 보며 말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는 동빈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어이구, 불쌍한 김 씨… 그리도 건장했던 사람이 이리도 허무하게 가다니…….”

개장수 김 씨의 죽음은 뜻밖의 일이었다. 황소도 때려잡을 만큼 건강하게 보였건만… 멀쩡한 외모와 달리 김 씨의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사인을 조사한 의사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고, 여태껏 살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라는 위로(?)까지 덧붙였다.

“이장님, 초상이야 우리가 대신 치른다 해도… 저 어린애는 어쩌지요?”

“글쎄…….”

이장은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개장수 김 씨에게 일가친척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한 것이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다면 고아원으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이장님,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합니다. 저 애가 불쌍한 것은 사실이지만 마을에서 어쩔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라.”

“복잡한 일은 나중에 처리하세. 일단은 내가 돌볼 것이니 자네들은 걱정 말게.”

“알겠습니다, 이장님.”

마을 사람들은 이장의 말에 따라 동빈의 거취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초상 치르는 일에 전념했다. 쓸쓸히 떠나는 개장수 김 씨가 외롭지 않게 모두가 애를 썼다.

조촐한 장례가 끝났고, 그와 동시에 마을에서 동빈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동빈은 화장한 뼛가루를 뒷산에 뿌리고 나서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 싫어서? 아니면 누구도 믿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 때문에?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동빈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고향에서의 두 번째 밤.

동빈은 첫날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따끈한 군고구마를 먹으며 주인 할아버지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어디… 드라마 할 시간이 됐구먼.”

벽시계를 슬쩍 쳐다본 주인 할아버지는 서둘러 채널을 돌렸다.

또각또각.

치이익…….

리모컨이 고장 났는지 직접 채널을 바꿔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특별 생방송 <학교 폭력 이대로 좋은가!>에서는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함께 최선의 해법을 모색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 우측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교육계를 대표해서…….

“오늘은 드라마 안 하나 보네?”

또각또각.

치이익…….

주인 할아버지는 아쉬운 표정으로 채널을 돌렸다. 시사 프로그램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른 채널도 마찬가지였다.

-현장 특파원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리 예고해 드린 것처럼 학교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서 밀착 취재를 했습니다.

“이게 뭐여? 학교에서 난리라도 났나?”

할아버지는 멍한 표정으로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학교 폭력을 문제 삼으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그냥 다른 데 틀지요?”

“여긴 채널이 두 개밖에 안 잡혀… 아까 그 특별 생방송인가 뭔가를 볼 텐가?”

“…….”

동빈은 죄송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것도 나비 효과라고 해야 하나? 바닷가의 처절한 대결 때문에 산골 할아버지가 드라마를 보지 못한 것이다. 민박 할아버지의 유일한 낙을 빼앗은 것 같아 동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방송은 역시 생방송이제…….”

또각또각.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는 다시 채널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빈의 행동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학교 폭력에 대한 프로그램을 시청해야 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경찰이 학교 폭력의 주범인 일진들의 신변 보호를 할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 경찰이 이렇게 할 일이 없습니까? 선량한 학생들이 요청하면 인력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진들도 대한민국 학생입니다. 지금은 김 모 군의 폭행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반드시 김 모 군을 체포하여,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김 모 군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선량한 학생들을 괴롭힌 일진 새끼들부터 반성하라고 하세요!

-여보세요, 방송에서 새끼가 뭡니까! 새끼가!

동빈의 폭력을 두려워한 일진들이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한 것이 커다란 화두였다. 두 명의 점잖은 신사들이 말싸움에 가까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김 모라는 학생과 일진인가 뭔가가 문제구먼.”

“그렇죠, 뭐…….”

“쯧쯧쯧… 같은 학생끼리 왜 피 터지게 싸우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학생도 덩치가 크니 조심하는 게 좋아. 친구들이 나쁜 짓 하자고 꼬셔도 절대 넘어가지 말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민박 할아버지는 동빈과 함께 밤늦도록 TV를 시청했다. 그 김 모라는 학생이 바로 옆에 있는 민박 손님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동빈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충분히 쉬었으니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친구들과 약속한 시간을 지키려면 꽤나 서둘러야 했다.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

떠날 채비를 마친 동빈은 할아버지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새 정이 든 모습이었다.

“학생, 진짜로 아침밥 먹지 않을 거여?”

“괜찮습니다.”

“어쩌나, 밥을 많이 했는디…….”

주인 할아버지는 쓸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돈이 되는 손님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운 건 아니었다. 혼자서 쓸쓸히 지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서운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디 좀 급히 들러야 해서요.”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

주인 할아버지는 검정 봉투를 내밀었다. 동빈이 밥을 먹지 않는다기에 따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바스락.

봉투를 받은 동빈은 내용물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음식 종류였다. 군고구마를 포함한 각종 주전부리가 들어 있었다. 삶은 계란에 군밤까지… 한 끼 식사는 넉넉히 되고도 남을 양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할아버지.”

“다행이구먼, 젊은 사람이라 이런 거 싫어할 줄 알았는디…….”

“전 이런 게 더 좋습니다. 요즘은 웰빙이 유행이잖아요.”

“허허허… 무공해인지, 유기농인지 뭔지 하는 거 말이제?”

주인 할아버지는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민박 손님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친손자와 이별하는 모습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정이 그리워지는 모양이었다.

“이젠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주위에 절이 있지 않았나요? 규모가 매우 작다고 하던데?”

“예전에 청암사라고 있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었제. 천하의 몹쓸 놈들 때문에… 아이고, 내가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주인 할아버지는 서둘러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남들에게 함부로 말하기는 껄끄러운 내용이란 뜻이었다.

“제가 그런 유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잠시 절터에 들러도 상관없겠지요?”

“글쎄… 사고가 있고 나서 갑자기 군사 보호 시설로 지정되었제. 그때부터 마을 주민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혀.”

“그렇군요.”

동빈은 수궁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청암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절이 들어섰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학생, 차 시간 다 되었어.”

“네, 안녕히 계세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돈 받고 하는 민박인디… 은혜는 무슨…….”

주인 할아버지는 손사래까지 치며 쑥스러워했다. 은혜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감동적인 손님 대접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동빈 또한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예전에 하지 못했던 고마움의 표시를 이제야 전하는 것이다.

“날씨가 춥습니다. 들어가세요.”

“괜찮아. 어여 가, 어여…….”

주인 할아버지는 동빈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봐 주었다. 10년이란 세월은 지났어도 인자했던 성품은 그대로였다.

폐허로 변한 청암사의 삭막한 풍경.

복구를 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했는지 곳곳에서 불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쯤인 것 같은데…….”

동빈은 비스듬한 경사면을 따라 올랐다. 조각난 기왓장과 무너진 흙더미… 10년 전까지만 해도 건물이 있던 장소였다.

디디딩… 디디딩…….

피아노 소리를 듣고 어린 동빈은 발길을 멈추었다. 급하게 도망이라도 치는 중인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때 묻은 얼굴, 거지가 울고 갈 정도로 지저분한 옷차림에 커다란 군용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그냥 갈까? 아니야 조금만 더…….”

동빈은 잔잔한 피아노 선율의 포로가 되었다. 이건 배신이라 할 수 있지만, 솔직히 서울로 간 소녀보다 뛰어난 실력이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넋을 잃고 몰래 구경하는 것이었다.

정적.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거기 누구지?”

“…….”

젊은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러나 동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을 숨기는 것도 아니다. 눈싸움을 하듯 스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무안하지. 중이 피아노 치는 게 그리도 이상하니?”

“난 그런 거 상관 안 해. 빨리 피아노나 쳐.”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행동이다. 동빈은 어서 피아노를 치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피아노 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른들은 어디 계시는데?”

“어른 없어. 난 아빠가 죽어서 도망치는 길이야.”

“도망?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디로 갈 건데?”

정말 맹랑한 꼬마였다. 그러데 아버지의 죽음과 가출을 연결 짓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엉망인 행색을 보니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난 산으로 올라갈 거야.”

“사, 산이라고? 이 엄동설한에?”

“응, 피아노 듣고 올라갈 거야. 빨리 연주해.”

“…….”

젊은 스님은 아직도 동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겨울 산에 혼자 오른단 소린데… 죽기로 작정을 했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아니, 매스컴의 영향일 수도 있었다.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아버지가 죽자 산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이 아버지의 복수 때문이며, 주인공이 열심히 수련하여 마침내 원수를 물리치면서 막을 내린다. 물론 이것은 현실과 매우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꼬마야, 산에서 어떻게 지내려고? 추위야 둘째 치고, 뭘 먹고 살아갈 건데?”

젊은 스님은 차분하게 꼬마를 설득하려 했다.

만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려 했지만, 꼬마는 한술 더 뜨는 반응을 보였다.

“걱정 마. 산짐승 잡아먹으면 돼. 여기 칼도 가져가잖아.”

“허걱!”

스님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꼬마가 갑자기 칼을 꺼내 들 줄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어린아이의 철없는 행동이라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꼬마의 산행을 막아야 했다.

“꼬마야, 준비가 철저한 건 좋은데… 함부로 살생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란다. 산짐승들이 불쌍하잖니?”

“어차피 세상은 그런 거야.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 사는 게 바로 전쟁이야.”

“……!”

꼬마의 상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말을 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고, 강력한 살기까지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꼬마, 이름이 뭐지?”

스님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꼬마에게 다가갔다. 천성적으로 타고났는지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난 동빈이야.”

“그래… 동빈아, 겨울 산에는 나중에 가지 않겠니? 큰스님에게 말씀드려 볼 테니, 나와 함께 지내자꾸나.”

“싫어.”

어린 동빈은 단번에 스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꽉 다문 입술을 보니 쉽게 고집을 꺾을 것 같지는 않았다. 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무작정 싫다고 하면 내가 섭섭하잖니? 여기에 있으면 공짜로 입혀 주고 먹여 준단다. 그러면 힘들게 산짐승을 잡을 필요도 없고… 산짐승들도 너를 피해서 도망칠 필요도 없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란다. 어때?”

“그래도 싫어.”

“흠… 그러면 말이다, 어떤 조건이면 여기서 지낼 건지 동빈이가 나에게 말해 보렴.”

“…….”

어린 동빈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조금은 난해한 질문이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었다.

“어서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줄게.”

“정말이야? 뭐든지 다 들어줄 거야?”

“그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스님은 교묘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웬만한 부탁은 들어줄 용의가 있었지만, 대책 없는 요구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부처님의 이름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다음, 동빈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나 피아노 가르쳐 줘.”

“피아노?”

“응!”

동빈의 요구는 의외로 소박했다. 너무 소박하여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피아노를 가르쳐 주면 정말 이곳에 머물 것이냐?”

“그럼! 대신 또 조건이 있어. 여름이 되면 마을로 가야 해.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거든!”

“어렵지 않은 조건이구나. 우린 이제부터 함께 지내는 거다. 동빈이라고 했지? 어서 들어오너라. 내 법명은 청수라고 한단다. 사실은 나도 스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이것이 동빈과 청수 스님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청수 스님은 동빈의 보호자이자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않은 밝은 세상을 보여 준 사람이었다.

바스락.

“……!”

자그만 인기척에 동빈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곳을 살펴보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숨겼다.

사사삭.

눈 깜짝할 사이에 동빈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았는지, 아니면 땅으로 꺼진 것인지 모를 정도로 신속한 동작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인기척은 점점 가까워졌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 주위가 수상했다.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움직임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 소나무 숲을 헤치며 다가오는 것이 확실했다. 그것도 여러 명이 한꺼번에 무리 지어 오는 낌새였다.

바스락… 바스락…….

정체 모를 집단이 청암사에 모습을 드러낼 무렵, 그들에게 날렵하게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동빈이었다.

파파팟.

주춤.

“크억!”

“모두 꼼짝하지 마세요.”

동빈은 건장한 상대의 목을 조르며 기선을 제압했다. 한 명을 포로로 잡아서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누, 누구냐!”

“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보면 모르냐? 우리는 군인이다.”

위장복과 무장 상태를 보니 군인이 분명했다. 일개 분대 규모인 그들은 동빈과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게 덤빈 것인가? 그 정도로 무모한 동빈은 아니었다.

“군인이라는 걸 누가 모릅니까? 어디 소속인지 물었습니다.”

“민간인이 소속을 알아서 뭐 하게?”

“일반 군인은 아닌 것 같아서요… 특수부대 같기는 한데… 어딘지는 자세히 모르겠네요.”

“……!”

특수부대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민간인에게 포로로 잡힌 것도 모자라 정체까지 들키다니… 자신들이 방심한 탓도 있지만, 덩치 큰 상대도 수상한 면이 많았다.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그들이 반항도 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당한 것이다.

“네놈부터 정체를 말해라. 군사작전을 방해한 이유가 뭐지?”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혹시 나 잡으러 온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우리가 민간인을 왜 잡아? 긴급 작전 중에도 대민 피해는 최소로 하는 것이 군인들의 책임이다.”

“그렇군요. 죄송했습니다.”

동빈은 포로로 잡았던 군인을 풀어 주었다.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지, 군인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민감하게 행동한 것이다.

“이건 사과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대학생 같은데 군사 지역에서 뭐 하는 거지?”

“그냥 뭐…….”

“요즘 간첩이 나타날 리도 없고… 범죄자일지 모르니 우리가 조사를 해야겠어. 민간인들의 피해를 막는 것도 군인의 임무거든.”

군인들은 동빈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단순한 민간인이라 하기에는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전 그런 사람 아닌데…….”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거야. 10년 전에 이곳에서 매우 안 좋은 사건이 있었거든.”

군인들은 퇴로를 차단하며 동빈을 압박했다. 삭막한 분위기를 보니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나도 일을 골치 아프게 만들기는 싫습니다.”

“…….”

동빈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그쪽에서 가지고 있는 무전기를 한 번 쓰고 싶습니다.”

“……?”

군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핸드폰이 없나? 민간인이 왜 무전기를 빌려 달라는 말인가? 당연히 거부해야 했지만 현재의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기에 이리도 당당히 요구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한 번 신세를 졌잖아. 그냥 빌려 줘.”

“네, 알겠습니다.”

선임병의 허락이 떨어졌다. 동빈이 포로를 풀어 준 것에 대한 답례인 모양이었다. 무전병은 본부와 연락이 닿자 동빈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곳에서 받으라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무전기를 받은 동빈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이럴 때는 매우 순박해 보였지만, 본부와 무전을 하면서 태도가 확 달라졌다.

“통신 보안 코드 700. 직속 라인 로미오. 국방부 특별법에 의거, 코드를 부여받은 특수 신분의 요구 사항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 오늘 벌어진 사항에 대해서…….”

“……!”

교신 내용을 엿들은 특수부대원들은 바싹 긴장했다. 어느 정도 동빈의 신분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저기… 바꾸라고 하는데요?”

동빈은 무전기를 특수부대원들을 향해 내밀었다. 아무나 받으라는 표시였고, 찜찜한 표정의 선임병이 나섰다.

“통신 보안… 단결! 아닙니다. 당장 철수하겠습니다.”

물론 본부와의 무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군인들은 조용히 청암사를 떠났고, 동빈의 추억 여행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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