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1/224)

“누구여? 안에 누구 있는감?”

“……!”

옛 생각에 잠겨 있던 동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깊은 상념에 빠졌던 모양이다. 상대가 이렇게 가까이 올 동안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특수 훈련을 받은 존재도 아니고 술 취해 비틀거리는 노인이었다.

“잉? 누군가 했더니…….”

“아,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마을 주민은 아니었다. 동빈에게 민박집을 소개시켜 준 할아버지였다. 보물이라도 되는지 소주병을 품속에 소중히 끼고 있었고, 얼굴 또한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후가 한창인데 벌써부터 한잔 걸친 모양이었다.

“학생이 여기는 웬일이여?”

“죄송합니다. 그냥 구경 좀 하느라고요.”

“이런 촌 동네에 뭐 구경할 게 있다고… 그나저나 이장님은 잘 계시는감?”

“네? 이장님요?”

동빈은 거의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이 마을 이장을 만난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술에 취해서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아, 민박 말이여… 그 노인네가 이장님이랑께. 손님 왔다고 얼씬도 못 하게 해서 말이여… 내가 술주정한대나 어쩐대나.”

“네…….”

동빈은 이제야 술 취한 노인의 말을 이해했다. 민박집 할아버지가 바로 이장이었던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아니라 예전에 오랫동안 이장을 했던 경력이 있었다. 한번 입에 붙은 호칭이기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불렀다.

“그란데 오늘도 막차 시간이 지나 부렀구먼?”

“이런저런 구경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날이 어두워지기 직전이라 또다시 민박을 해야 할 처지였다.

“날 어두워지기 전에 싸게 민박집으로 들어가. 귀신 나오면 어쩌려고 그려.”

“귀신요? 하하하…….”

순간적으로 멈칫했던 동빈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술 취한 노인의 태도가 이상했다.

“요즘 애들은 귀신 안 믿지?”

“아닙니다. 귀신 나오기 전에 빨리 돌아가겠습니다.”

동빈은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해병대도 잡는 귀신을 동빈이 무서워할 리 없었다. 주정뱅이 할아버지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서울엔 귀신이 없는지 모르지만 시골은 다르지. 오늘이 말이여, 이 집 주인 제삿날이여. 간밤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내가 온 것이여… 개장수 김 씨한테 술이나 한잔 주려고 말이여.”

“……!”

동빈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이 아버지의 제삿날이었던가? 정확한 날짜는 몰랐다. 이처럼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날이란 기억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심각하게 부른다냐… 김 씨의 제삿날은 맞지만 귀신은 농담이여! 놀려 주려고 한 말인데 정말 믿은겨? 이 술도 내가 먹으려고 사 온 거여.”

주정뱅이 할아버지는 장난이 과했다고 시인했다. 이렇게 순박한 서울 학생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귀신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습니다. 그 술… 저한테 파세요.”

“술? 젊은 학생이 벌써부터…….”

“제가 먹을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 선물하려고요.”

“그려… 우리 이장님도 엄청난 주당이제. 에라, 인심 썼다.”

주정뱅이 노인은 자신의 술병을 흔쾌히 넘겨주었다. 민박집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준다는 소리로 들은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하긴… 내 집에 가면 쌓인 게 술인데… 조심해서 들어가 보드라고.”

주정뱅이 노인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기분 좋게 손을 흔들면서 비틀비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으스스한 기운이 넘치는 뒷산.

동빈은 10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이곳을 찾았다. 아버지의 뼛가루가 뿌려졌던 장소가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따깍.

동빈은 주정뱅이 노인에게서 받은 술병을 땄다. 그러고는 야산 주변에 골고루 술을 뿌렸다.

“아버지… 술 드세요.”

이젠 앙상한 겨울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잊었던 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난 것이다.

“저는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기억할게요.”

동빈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춥기만 했던 겨울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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