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맞이하는 고향의 밤.
동빈은 평상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몸이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주인 할아버지와 오붓하게 TV를 보기도 그렇고… 마땅히 할 일이 없기에 잠을 청한 것이었다.
부스럭부스럭.
동빈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몸을 뒤척였다. 복잡한 도심처럼 소음이 심한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전부였다.
“우와, 미치겠네!”
동빈은 푹 뒤집어쓴 이불을 걷어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무 조용한 것도 탈이라고 해야 하나?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는 느낌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양을 몇 마리나 세야 잠이 오는 거야?”
민간요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불면증은 정말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염소로 한번 바꿔 볼까… 아니다. 개나 소나, 양이나 염소나… 에이… 씨! 모르겠다!”
벅벅벅벅.
동빈은 뒤통수를 심하게 긁어 댔다.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 줄은 몰랐다는 하소연이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뜀박질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바로 그때였다.
“학생, 무슨 일 있는가?”
문밖에서 주인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얼마나 부산을 떨었으면 주인 할아버지가 직접 행차를 했단 말인가? 창피하고 무안해서 잠이 더욱 달아나 버렸다.
“아, 아니요. 별거 아닙니다.”
동빈은 생난리를 멈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러나 주인 할아버지는 못 미더운 듯 다시 한 번 반문했다.
“정말 괜찮은가? 비명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잠이 안 와서 그냥…….”
그냥 뭐? 잠이 안 와서 일부러 소리를 쳤단 말인가? 적당히 둘러댈 내용이 없자 동빈은 끝말을 얼버무렸다.
“잠자리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잠이 안 오겄제.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한 게 있는디… 문 좀 열어 주겠나?”
“주, 준비요?”
동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잠이 안 오는 데 잘 듣는 특효약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동빈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자, 잠시만요. 곧 열어 드릴게요.”
머리 정리가 웬만큼 끝나자 동빈이 문을 열었다.
드르륵.
동빈은 야식 정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물건은 약간 의외였다.
“심심하면 음악이라도 들으라고… 좀 오래됐지만 아직은 쓸 만할 것이여.”
주인 할아버지는 굉장히 낡은 라디오를 들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동빈의 나이보다 오래되어 보였다. 어쩌면 몇십 년이 넘은 골동품일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동빈은 흔쾌히 라디오를 받았다. 주인 할아버지의 성의를 외면할 수 없었고, 괜한 뜀박질보다는 라디오를 듣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 편히 쉬라고.”
“네, 들어가세요.”
주인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남기고 뒤돌아섰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작동은 되겠지?”
조용히 문을 닫은 동빈은 라디오를 자세히 관찰했다. 굉장히 오래된 물건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하긴, 라디오가 갖출 기능이 몇 개나 되겠는가? 주파수만 잘 잡고 스피커만 멀쩡하면 그만이지.
“이게 파워 같은데…….”
딸깍.
상단에 위치한 스위치를 올리자 파워가 들어왔다. 동빈은 안테나를 세우고 적당한 채널을 맞추려 노력했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아날로그식 주파수였다. 상당히 큰 단추를 돌려야 주파수의 눈금이 변했다.
치익… 치익…….
-이상으로 뉴스를 마칩니다. 이 프로그램은…….
치익… 치익…….
-네, 이 시간 교통 상황입니다. 강남대로 부근에서…….
치익… 치익…….
거친 잡음과 함께 여러 개의 채널이 지났다. 마땅한 프로를 찾지 못했는지 동빈은 계속 주파수를 바꿨다.
-만리동에 사시는 고영수 님이 보내 주신 사연입니다.
치익… 치익… 디디 디딩~.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을 듣고 동빈의 손이 멈칫했다. 피아노를 전공하기 때문에 보이는 반응일까? 그러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주는 정통 클래식이 아니라, 한참 예전에 유명했던 영화의 주제음악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동빈은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에 점점 빠져 들었다. 괜히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을 찾은 것이다.
“이제는 눈 감고도 칠 수 있는데…….”
피아노를 잘 치게 되면 꼭 배우고 싶었던 곡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는 치고 싶지 않다는 이중적인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디리리 딩… 딩…….
어느새 동빈의 기억은 이 곡을 처음 들었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갔다. 동빈이 여섯 살 무렵의 여름이었다.
“어때? 진짜 아름다운 음악이지?”
연주를 마친 소녀는 어린 동빈을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대에 찬 환한 미소를 짓고서…….
“응, 좋아…….”
동빈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음악은 전혀 몰랐다. 안 좋다고 하면 큰일 날 것 같았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말한 것이다.
“동빈이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무슨 곡인지 궁금하지 않아?”
“응! 무지 궁금해.”
물론 이번에도 궁금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 대답은 긍정적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영화의 주제곡이야. 난 영화보다 이 음악이 더 좋더라. 참! 원작은 소설이야. 좋은 소설이 좋은 영화가 되고… 그 안에 좋은 음악이 깔린 거야.”
끄덕끄덕.
어린 동빈은 심오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참! 상처는 다 나았어?”
“응, 여기……”
동빈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한여름에 긴팔을 입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상처가 완벽하게 아물지 않았다. 이를 바라보는 소녀의 표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이걸 어째… 많이 아프지?”
“아니?”
“정말 안 아파?”
“응, 이 정도는 아픈 게 아니야.”
정말 아프지 않은 것인가? 어린 동빈은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상처 때문에 꽤나 고생할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동빈아… 난 괜찮으니까, 아프면 아프다고 그래.”
“아니야, 이건 그냥 따가운 거야.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죽을 정도가 되어야 아픈 거래.”
“…….”
소녀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동빈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보통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여섯 살인 나이보다 큰 체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체적인 것보다는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다 할 수 있었고, 마을에서도 이상한 아이로 취급당했다. 하지만 동빈이 소녀를 구해 준 덕분에 친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누나, 서울 간다며?”
“응?”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녀가 당황했다. 딴생각을 하느라 동빈이 무슨 말을 했는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서울이란 단어 정도만 어렴풋이 들렸을 뿐이었다.
“언제 서울 가냐고?”
“아! 곧 올라가야지. 학교는 가야 하니까…….”
소녀는 여름방학 동안 요양차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몸도 많이 회복되고 방학도 끝나 가기에 조만간 서울로 가야 했다.
“학교… 누나는 몇 학년인데?”
“난 5학년. 동빈이도 곧 학교 가야지?”
“몰라. 아빠가 그러는데, 학교는 갈 필요 없는 거래.”
“그래…….”
소녀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상태가 매우 심해서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는 동빈의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동빈이 보통 아이들과 다른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너무나 명백하여 5학년인 소녀가 보기에도 동빈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서울 갔다, 언제 올 건데?”
“응?”
소녀는 또 동빈의 질문을 놓쳤다.
“학교는 방학이 두 번이잖아? 겨울방학 때 올 거지?”
동빈은 이미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니 겨울방학 때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글쎄… 이번 겨울은 힘들 것 같은데…….”
“왜? 겨울도 방학이잖아?”
동빈은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똑같은 방학인데 왜 차별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이번 겨울방학 때 반드시 와야 한다는 바람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내가 몸이 아파서 공부를 많이 못 했거든. 병원도 가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고…….”
“…….”
동빈은 입을 꾹 다문 채, 소녀의 말을 경청했다. 결국 못 온다는 소리 아니던가? 빨리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춥기만 한 겨울이 더욱더 싫어졌다.
“대신, 내년 여름방학 때 꼭 올게.”
“정말……?”
잔뜩 굳어졌던 동빈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럼! 약속하는 의미로 이 노래 다시 들려줄게…….”
소녀는 다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악보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동빈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주를 곧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배시시.
동빈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어여쁜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좋았다. 소녀의 뽀얀 손이 피아노 건반 위를 지날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
정적!
동빈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들을 수 없었다. 자신을 보며 뭐라고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환하게 웃던 소녀의 모습 또한 아스라이 사라져 갔다. 무언지 모를 불안감이 동빈의 마음속에 엄습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학생, 일어났는가?”
“……!”
주인 할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동빈은 눈을 떴다. 소녀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문지로 대충 도배한 천장만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눈만 감았는데…….”
라디오를 켜고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어두웠던 방이 환하게 밝아 있었고, 밥 짓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학생, 일어났는가? 아침밥 먹어야제?”
“네, 곧 나갑니다.”
동빈은 주저 없이 이불을 걷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떠오른 추억을 되새기는 행동은 없었다. 눈을 뜨면 기억에서 사라지는 꿈처럼…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