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7/224)

도피 생활

전라도에 위치한 산골 마을.

이곳은 문명이란 발길이 피해 가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산기슭을 따라 드문드문 자리한 낡은 집들은 70년대를 연상케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용한 시골의 전형적인 풍경이었지만, 고립된 기분도 없지는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때라 그런지 삭막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부르릉…….

노을이 한창 물들기 시작할 무렵.

택시 한 대가 산골 마을 입구에 멈춰 섰다. 차로 들어설 수 있는 막다른 길목이었다. 이다음부터는 길이 큰 폭으로 좁아져 차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부릉.

건장한 청년이 내리자 택시가 출발했다. 먼지를 풍기며 이리저리 방향을 돌려서는 방금 올라왔던 곳으로 다시 내려가는 택시를 보던 청년은 마을 입구를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제대로 찾기는 한 건가?”

청년은 바로 동빈이었다. 동빈의 손에는 장군이 전해 준 메모지가 들려 있었다. 여기까지는 종이에 적힌 주소대로 찾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의 추억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주위를 대충 훑어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을 정하려 하는데…….

“……!”

동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마을과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수호신처럼 버티고 선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누구든 단번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오래된 느티나무였다.

“저 나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동빈은 느티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낯설지 않은 풍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멈칫…….

동빈은 자신도 모르게 느티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나무를 쓰다듬었다.

동빈의 얼굴에 피식 미소가 번졌다. 고향의 느낌 때문인가? 그러나 포근함 같은 마음의 평화는 아니었다. 그냥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 안개 속을 헤매다가 제대로 된 길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동안 동빈은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서서히 떠오르는 예전의 기억들… 지금은 간단한 고갯짓으로 나무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예전에는 완전히 머리를 젖혀도 그 끝을 보기 힘들었다. 지금이야 앙상한 가지 위에 까치집이 있을 뿐이지만, 한창 여름이면 무성한 나뭇가지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오순도순 평상에 앉아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처럼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내 기억 속에는 왜 여름만 있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인데, 겨울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느티나무 주변에 버려진, 반쯤 부서진 평상처럼 불완전한 기억뿐이었다.

“뭐야? 벌써 날이 어두워지잖아…….”

노을의 화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늘과 가까운 마을이라 그런지 어둠도 빨리 내려왔다. 완전한 밤이 찾아오기 전에 잠자리를 구해야 했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르신, 말 좀 묻겠습니다.”

“아따, 못 보던 젊은이고마…….”

반쯤 허리가 굽은 노인은 동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방인이라 경계를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냐는 의문의 눈빛이었다. 노인은 술친구를 찾으러 가는 중이었는지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져서요.”

“겨울이라 해가 짧은 편이당게.”

“그래서 말인데요,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몸도 피곤하고… 다시 아랫마을까지 내려가기도 그렇고…….”

동빈의 음성이 점점 늘어졌다. 필요한 설명은 충분히 했기에 노인의 반응을 기다려야 했다.

“민박이 필요하단 소리고만.”

“아! 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여관이 있을 리 없으니 아무 곳이나 상관없습니다.”

“쪼기 보이는 집으로 가 보그라이.”

동빈은 노인이 손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를 지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이 술병을 든 채 가리키는 것이라 헛갈렸던 것이다.

“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쪼기 말이여, 쪼기… 파란 지붕에…….”

“어두워서 색깔을 알 수가 없어서요. 나무가 두 그루 있고,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 말입니까?”

“맞당께, 바로 거기여.”

동빈은 이제야 어디를 말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 집이었다.

“거긴 노는 방이 있을 거닝께, 싸게 가 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동빈은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기에 따뜻한 곳이 그리워지는 시점이었다.

끼이익.

동빈은 낡은 철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도둑맞을 걱정이 없는 마을인지 대부분의 집들이 문을 잠그지 않고 있었다. 이 집은 개조차 기르지 않았기에 동빈이 들어서도 여전히 조용했다.

“저기… 계십니까?”

목소리가 작기 때문이었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듣고도 그냥 넘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에 계십니까? 민박 좀 하러 왔는데요?”

드르륵.

“뉘, 뉘기여?”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다. 농촌의 현실을 말해 주듯 젊은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만난 노인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날이 저물어서 하룻밤 묵었으면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할아버지?”

“당연히 가능하제. 싸게 들어온나.”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동빈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함이었다.

드르륵. 쿵.

동빈이 들어서자 노인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문을 연 시간은 짧았지만 벌써 냉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만큼 내부의 온도가 낮았다는 뜻이었다.

“엄청 키가 큰 학생이구먼…….”

시골집은 천장이 낮은 편이었다. 동빈이 똑바로 서자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노인은 190에 육박하는 동빈의 키를 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려… 밥은 먹었는가?”

“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체격을 보니 소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디?”

“괜찮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노인은 주전부리라도 내오려 했지만 동빈이 거절했다. 아무리 돈 주고 하는 민박이라도 노인을 부려 먹는 짓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은 내 방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데 낯이 익은 얼굴인디?”

“……!”

동빈이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경찰에 쫓기는 신세임을 들킨 것인가? 그러나 동빈은 TV 등에 공개 수배된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에 큼지막하게 얼굴이 나오긴 했지만, 이런 산골의 노인까지 알아볼 리는 없었다.

“요상타… 얼굴이 낯설지 않은디…….”

동빈의 예감은 정확했다. 갸우뚱하는 노인의 표정은 범죄자를 확인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네, 혹시 나를 아는가?”

“아, 아니요. 저는 여기가 처음인데요.”

“미안허이, 나이 때문인지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노인은 자신이 헛갈린 것을 나이 탓으로 돌렸지만, 그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어렸을 적 동빈의 모습을 기억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제가 흔한 얼굴이라서요…….”

“싸게 들어가게. 난 학생이 묵을 방을 치우고 들어갈 팅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그럼, 저기 있는 걸 쓰면 되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노인이 방을 청소하러 밖으로 나서자, 동빈은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차분하게 전화번호를 눌렀고 곧바로 통화가 이어졌다.

뚜르르. 딸깍.

-나다. 잘 숨어 다니고 있냐?

주철의 경쾌한 음성이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낯선 번호가 떴지만 이번에는 목소리를 깔지 않았다. 전라도의 지역번호가 뜨자 동빈이라 확신한 것이다.

“물론, 잘 숨어 지내고 있다. 넌 어떠냐?”

-나도 괜찮아. 오랜만에 서울 왔더니 아주 기분이 좋아.

“서울이라고 했냐? 거기는 뭐 하러 갔어? 대구에서 만나기로 한 거 벌써 잊었냐?”

동빈의 여행은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주철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음 목적지를 정한 상태였다.

-네가 이해 좀 해라. 급하게 해결할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급한 일이라… 또 여자 문제냐?”

-야, 야, 야!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그럼 아니야?”

-그, 글쎄? 여자 문제일 수도… 있겠네…….

강하게 반발하던 주철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결국은 여자 문제라는 소린가? 주철은 애매하게 말을 끝냈다.

“또 어떤 여자에게 필이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내가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나머지 일진들을 모으기로 했잖아.”

동빈은 주철의 사생활보다는 다른 문제에 신경이 쓰였다. 바로 일진의 소탕이었다.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동빈을 대신해서 주철이 총대를 멘 것이다.

-걱정 붙들어 매라. 내가 대책도 없이 서울에 올라왔겠냐? 그 문제는 석진이가 알아서 처리할 거다.

“뭐라고 석진이? 그렇게 위험한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해? 일이 꼬여서 그놈들한테 맞으면 어쩌려고.”

-이놈이 사람 차별하네… 석진이는 위험하고, 난 안 위험해?

“너랑 걔랑 같냐? 너는 일진들도 더럽다고 피해 가잖아.”

-이 자식이 못 하는 소리가… 오호! 찾았다.

주철의 음성이 갑자기 바뀌었다. 길게 이어지는 고음 처리로 보아, 원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뭘 찾았다는 것이냐? 여자?”

-오케바리! 천박한 파마, 정말 오랜만이다.

“……?”

주철이 설마 천박한 파마와 사귄단 말인가? 절대 아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수화기에서 들리는 그쪽의 반응으로 보아, 어떤 상황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졸라 반갑다. 천박한 파마.

-오마나…….

-표정이 왜 그래? 내 얼굴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

-이이… 씨!

파다닥.

-어딜 도망가. 이년아! 동빈아, 나중에 통화하자.

“그, 그래…….”

딸깍.

긴박한 상황이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천박한 파마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주철이 엄청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서울까지 올라가는 수고조차 마다하지 않았으니… 천박한 파마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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