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도 해안가에 위치한 낡은 창고.
어둠이 점점 깊어지더니 마침내 새벽이 찾아왔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희미하게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어기적어기적.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20여 명의 사람들이 창고 쪽으로 몰려왔다. 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아니었다. 나이를 보니 고등학생 정도였고, 비참한 몰골이 꼭 패잔병들의 모습이었다. 어디서 대판 싸웠는지 멀쩡한 놈이 거의 없었다.
“힘내자. 저기 있는 창고까지만 가면 된다.”
“…….”
패잔병의 정체는 학생 조직의 잔당들이었다. 동빈하고 싸우고 경찰들을 피해 도망치느라 엉망진창이었다. 강기준이 기운 내자 했지만 반응을 보이는 놈은 거의 없었다. 해안가의 모래밭을 걷기도 벅차 하는 모습이었다.
“다 왔다. 모두 안으로 들어가.”
창고 문은 열려 있었다. 학생 조직의 잔당들은 곧바로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았는지 여러모로 신경 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우와… 따뜻하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졸라 목말랐는데 마침 잘됐다.”
군데군데 장작불을 지펴 놓아 추위를 막을 수 있었고, 담요와 음료수도 비치되어 있어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잔뜩 굳었던 기준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고생했다. 여긴 괜찮으니까 편히 쉬어라.”
“기준이 너도 좀 쉬어.”
“큰형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지.”
기준은 다른 학생들처럼 휴식부터 취하지 못하고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 또한 어부는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생도 아니었다. 거친 외모를 보니, 성인 조직 폭력배가 분명했다. 보스인 듯한 인물과 그를 보호하는 경호원들이었다.
불쑥.
기준이 다가서자 보스가 몸을 일으켰다. 크지 않은 체격이었지만 매우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였다. 얼굴에 드러나는 크고 작은 상처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변해 주었다.
“전국구 주먹이란 놈이 말이야…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죄송합니다, 큰형님.”
꾸벅.
기준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무작정 고개를 숙이면서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는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너 많이 출세했더라. 전국 방송까지 탔으니 말이다.”
보스의 말은 당연히 칭찬이 아니었다. 기준은 면목이 없는지 계속 고개를 들지 못했다. 조그만 음성으로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조직에 피해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방송 탄 것은 뭐라 하지 않겠는데… 그 결과가 무척 마음에 안 들어. 나한테 인원까지 빌려 가더니 이 꼴을 하고 돌아와?”
“…….”
기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나 비참한 결과라서 변명을 할수록 자기 자신만 초라해지기 때문이었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놈을 제압하지 못해? 그놈이 총을 들었던, 칼을 들었던? 너 사실대로 말해 봐. 영화 찍고 온 거냐?”
“…….”
보스는 기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칭찬의 의미는 아니었고 자기를 이해시켜 보라는 반문이었다.
“아니, 거꾸로 물어보자. 어떻게 해야 100명이 넘는 인원이 한 명한테 당할 수 있냐?”
“…….”
“너 벙어리야? 무슨 말이든 해 보란 말이다… 이 새끼야!”
짜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준의 고개가 돌아갔다. 분을 참지 못한 보스가 손찌검을 한 것이다. 왁자지껄했던 창고 안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면, 면목 없습니다. 큰형님.”
“잡소리 집어치우고 어떻게 된 일이지 자세히 설명을 해. 도대체 김동빈이란 새끼가 뭐기에 이리도 형편없이 당한 거냐?”
“큰형님이 황당해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직접 싸웠던 저도 아직 멍한 기분입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그런 괴물하고는 다시 싸우지 않겠습니다.”
“이놈 완전히 겁먹었군. 한 번 당하면 몇 배로 되돌려줘야 하는 게 이쪽의 생리다.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주먹이 그런 소리나 하고… 내가 명령해도 그놈하고 싸우지 않을 것이냐?”
“죄송합니다, 큰형님.”
기준의 선택은 무척이나 빨랐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동빈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놈 봐라…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해!”
움찔.
기준은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스의 주먹이 날아올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이 새끼… 김동빈이란 놈한테 완전히 기죽은 모양이군. 걱정 마라. 이제 그놈하고 싸울 일은 없을 게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큰형님?”
기준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동빈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그로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러나 왜 싸우지 않아도 되는지가 문제였다. 조직에서 나가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놀라는 걸 보니 아직 소식을 못 들은 모양이군. 그놈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 경찰이 내린 결론이니 믿어도 좋다.”
“우와~!”
침묵만이 감돌았던 창고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학생 조직의 잔당들은 일제히 고함치며 난리도 아니었다.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은 듯한 축제 분위기였지만, 기준은 예외였다.
“…….”
그 혼자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으면서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보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냐?”
“저는 형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습니다. 그, 그런데 말입니다. 김동빈이 죽었다는 말은 죽어도 못 믿겠습니다.”
“기준아, 진짜 너답지 않구나.”
보스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동빈한테 얼마나 당했단 말인가? 기준의 반응은 거의 병적인 수준에 가까웠다.
“큰형님, 그놈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래… 네 마음은 잘 알고 있다. 지금은 피곤한 것 같으니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
보스는 기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판단한 후, 충분한 휴식을 갖고 대화를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기서 지내라. 필요한 것은 다른 애들 통해서 전달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큰형님.”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보스는 기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출입문으로 다가섰다. 그의 경호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을 경계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큰형님.”
꾸벅.
기준은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보스는 가볍게 손을 들어 주고는 창고를 벗어났다. 이제는 학생 조직의 잔당들만 창고에 남게 되었다.
“기, 기준아, 이제 고개 들어도 되겠는데…….”
보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도 기준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다 못한 동료가 말을 걸자 그제야 허리를 폈다.
스윽.
“진짜 피곤한 하루였네…….”
기준은 담요를 한 장 들고는 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긴장감이 풀리자 온몸에 노근함이 몰려온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여기서 지내야 하냐?”
“나도 몰라. 상황을 지켜봐야지.”
기준은 드럼통에 불을 붙인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담요를 대충 깔고는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웠다.
“이번에도 별일 없겠지? 그렇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놈이 기준을 귀찮게 했다. 불안한 마음을 참을 수 없는지 계속 따라다니며 질문을 던졌다.
“나도 잘 모르겠다.”
“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싸움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번에는 졸라 맞기만 했잖아?”
“뭐라고!”
찔끔.
기준이 몸을 일으키자 노랑머리가 흠칫하며 잔뜩 겁먹은 눈으로 기준의 눈치를 살피기 분주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잠이나 자.”
“아, 알았어.”
“다시 한 번 까불면… 진짜 가만히 안 둔다.”
부스럭.
경고를 마친 기준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제는 귀찮게 말을 거는 놈도 없다. 충분히 쉬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앙!
와장창창.
“……!”
창고 문이 박살 나면서 주변이 발칵 뒤집혔다. 놀란 학생들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매캐한 먼지가 출입문 근처에 가득 찼다. 학생들은 문을 부수고 날아온 물건(?)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크, 큰형님!”
기준의 눈은 커질 대로 커졌다. 방금 창고를 나섰던 보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한 게 분명했다. 창고 안의 누구도 밖에서 싸우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 정도 실력이면… 서, 설마!”
기준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에 경호원 4명을 해치우고 보스까지 처리한 것이다. 기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부들부들.
기준은 보스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뿌연 먼지가 걷히면서 출입문 앞의 정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너희들, 여기 숨어 있었어?”
“……!”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기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준뿐만 아니라 창고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관두면 섭섭하지. 마무리는 확실히 지어야 하잖아.”
뚜벅뚜벅.
동빈은 큰 걸음으로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큰 대 자로 널브러져 있는 경호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너희들, 말도 못 하게 반가운 거야?”
“정말 김동빈 맞아……?”
“씨발… 그럼 저놈이 물귀신으로 보이냐?”
학생들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줄 알았던 김동빈이 등장했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김동빈…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역시 너밖에 없구나.”
기준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자신마저 흔들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구심점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 너희보다 빨리 도착해서 놀라게 해 주려 했는데… 경찰을 피해 다니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
동빈은 기준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멈춰 섰다. 놈들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싸울 수 있는 적당한 위치였다.
“김동빈,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100명과 싸울 수 있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이해를 못 하겠어.”
“싸움이야 강한 쪽이 이기는 것이고… 나는 네놈들의 행동이 더 이해가 안 되거든. 다른 학생들 괴롭히지 말라면 괴롭히지 않으면 될 것 아니야. 나쁜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괴롭히잖아? 남들 괴롭히는 것을 재미로 삼고 있는 놈들도 있더라고.”
“어차피 한순간의 추억일 뿐이야. 네놈이 설치지 않아도 어른이 되면 다 정신을 차린다고.”
“네놈들은 한순간의 추억이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지. 그 상처는 엄청 심해서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까지 번져…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나. 결코 한순간의 추억이 아니야.”
동빈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동안의 느낀 점을 말하는 것이라 막힘이 없었다.
“김동빈, 네가 폭력을 쓰면 우리와 똑같은 놈이 되는 거야. 폭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명언도 있잖아.”
“그건 네놈들 마음대로 생각해.”
“우린 모두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야. 싸워 봤자 서로 손해니까, 적당한 타협점을 찾자고.”
“미안하지만 난 타협을 한 적이 없거든.”
스윽.
“……!”
동빈은 반걸음 정도 앞으로 나아갔다. 대화를 끝내고 실력 행사로 돌입하겠다는 신호였다. 주춤해서 말을 끊었던 기준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바싹 얼어 있는 학생 조직의 잔당들… 기준이 뭔가 보여 주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질 운명이었다.
“김동빈,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끝장을 봐야겠냐?”
“당연하지.”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꼬치꼬치 묻는 것은 원래 기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기준이 괜히 시간을 끈다고 볼 수 있었다.
“난 후회를 몰라. 그리고 너무 말이 많은 거 아니야?”
“들켰나… 내가 따로 준비한 게 있어서 말이지!”
슉슉슉.
목소리는 쩌렁쩌렁했지만 별로 준비한 것은 없었다. 주먹으로 답이 안 나오자 잭나이프를 꺼낸 든 것에 불과했다. 나름대로 날카롭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동빈에게는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동빈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사삭.
거리를 좁히며 팔을 뻗어 절묘하게 기준의 잭나이프를 비껴가는 묘기를 연출하는 동빈.
“……!”
기준이 주춤하는 사이 동빈은 그대로 놈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손목을 꺾어 버렸다.
으드득.
“크억!”
비명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동빈이 몸을 회전시켰다. 기준의 팔을 끌어당기면서 팔꿈치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푸악!
기준의 얼굴은 한 방으로 거의 초토화되었다. 코는 완전히 주저앉았고 검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대로 충격을 받았는지 기준은 거품까지 물었다.
꼬르르.
전국구 주먹이라는 기준도 동빈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동빈과 접전을 벌인 일진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빠각.
마무리로는 공포의 찍어차기가 작렬했다. 정수리를 정통으로 맞은 기준의 몸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철퍼덕.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인지라 땅에 떨어지는 충격이 컸다. 맨바닥에 뒤통수부터 떨어진 것이다. 붉은 피가 창고 바닥을 따라서 줄기줄기 퍼져 나갔다.
“우, 우린 죽었다.”
“씨발… 그냥 경찰서로 가는 건데…….”
구심점을 잃은 학생 조직의 잔당들은 싸울 의욕을 상실했다.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동빈의 모습을 보며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싸움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다음 날.
창고에서 벌어진 사건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동빈의 부활과 학생 조직의 처절한 붕괴를 언론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학교 폭력에 관한 문제와 동빈의 이름이 연일 매스컴을 장식한 것이다. 방송 사고의 수배자는 동빈 한 명으로 압축되었고, 이는 경찰의 검문검색이 더욱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