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4/224)

딸깍.

“잘 썼습니다, 아저씨.”

전화를 끊은 동빈은 세탁소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인상 좋은 아저씨는 분주하게 다리미질하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면서 씨익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스윽.

동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세탁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주인아저씨는 문제없는데 방금 들어온 손님들이 문제였다. 고등학생 정도의 여학생 둘이 계속 동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 쟤 뭐니? 옷차림 진짜 깬다.”

“옷걸이는 진짜 좋은데, 정말 약 먹은 거 아니야?”

동빈은 귀가 엄청 밝았다. 귀를 살짝 기울이자 여학생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다행스러운 내용도 있었다. 아직은 어색한 옷차림에만 신경을 쓴다는 것이었다. 동빈은 얼굴을 숙인 상태에서 세탁소 주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저씨, 빨리 좀 할 수 없을까요? 제가 매우 급해서…….”

세탁소 주인이 열심히 다리미질하는 것은 동빈의 옷이었다. 주름을 펴거나 잡는 것은 아니었다. 바다에 빠져 완전히 젖은 옷을 깨끗이 빨아서 말리는 중이었다.

“학생이 급하다고 해서 다리미로 말리고 있잖아. 이보다 빠를 수는 없지.”

“그, 그렇군요.”

세탁소 주인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마의 맺힌 땀방울로 보아 요령을 피우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동빈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옷이 조금만 괜찮았어도…….’

급하게 구한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봐도 너무나 형편없는 옷차림이었다. 아줌마들이나 입는 새빨간 스웨터에 거의 무릎이 보일 정도로 짧은 청바지. 무엇보다 신발이 압권이었다. 하얀색 양말에 여름용 샌들, 그것도 매우 작아서 뒤꿈치의 절반이나 튀어나온 모양새… 한마디로 언밸런스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쟤 고개 숙이는 것 좀 봐. 쪽팔린 건 아나 봐.”

“모르면 사람이니?”

여학생들은 수군거림은 더욱 커져 이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정도였다. 동빈의 고개가 더욱더 숙여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우리 얘기 엿들은 거 아니야? 얼굴 빨개졌다.”

“뭐야? 얼굴도 엄청 괜찮은 편인데… 어머, 상당히 낯이 익네?”

“이런 계집애, 너 아는 애였어?”

“그게 아니고, 자세히 보란 말이야. 진짜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동빈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여학생들은 아예 대놓고 동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빈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도 소용없었다. 점점 용감해진 여학생들도 이리저리 동빈을 따라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저기요? 얼굴 좀 자세히 보여 주세요. 네?”

“왜, 왜, 남의 얼굴은…….”

동빈은 점점 궁지로 몰렸다.

100 대 1의 싸움도 너끈하게 해냈던 괴물이 여자 둘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십자막기를 포함한 얼굴 방어(?)에 치중하면서 뒷걸음치기에 분주했는데…….

“학생, 다 됐어.”

세탁소 주인이 동빈을 살렸다. 연신 수세에 몰렸던 동빈은 여자들 사이를 뚫고 돌진했다.

파다닥. 화악.

먼저 세탁소 주인이 내밀고 있는 종이 상자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지갑을 열면서 계산할 준비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어, 얼마예요?”

“그냥 만 원만 줘.”

“여, 여기요. 감사합니다!”

동빈은 만 원짜리 지폐를 올려놓고는 냅다 내달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여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체를 들킨 것인가? 정확히 판단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한편, 주철은 할아버지를 설득하느라 모진 고생을 하고 있었다.

마치 완고한 부모님을 설득하거나 장인어른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것 같았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은 채, 양 회장의 승낙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문 좀 열어 주세요. 무릎 아파 죽겠어요.”

“쯧쯧쯧… 이제 5분도 안 됐거늘…….”

“저 무릎 다친 거 할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이제 그만 열어 주세요.”

쾅쾅쾅쾅.

고작 5분도 채우지 못하고 주철은 문까지 두드리며 엄살을 부렸다. 누가 보면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5분은 너무하지 않더냐?”

“이런 말씀 드리면 죄송하지만… 저 무릎 때문에 병신 될 수도 있어요. 빨리 문 좀 열어 주세요.”

“허허… 무릎부터 꿇은 건 네가 선택한 것 아니더냐?”

“이렇게 아플 줄 몰랐죠.”

주철은 기선을 제압할 요량으로 다짜고짜 무릎부터 꿇었다. 물론 동빈을 구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 또한 빼놓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5분 전의 일이었다.

“쯧쯧쯧… 언제나 철이 들 것인지.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얼른 들어오너라.”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주철은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쪼르르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양 회장도 덩달아 웃고 있으니… 그의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 제 부탁 들어주시는 거죠?”

주철은 본론부터 꺼냈고,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양 회장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아비에게 먼저 부탁하지 않는 것이냐? 할아비는 예전에 정계를 은퇴한 몸이라 대놓고 나설 수가 없단다.”

양 회장은 아들과 손자의 관계가 걱정이었다. 괜찮은 사이였다면 할아버지보다는 아버지에게 먼저 부탁을 하는 것이 순서였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돕지 않아요. 그건 제 친구라도 예외일 순 없어요. 아주 냉정한 분이지요.”

“주철아, 그런 아비를 가르친 게 바로 이 할아비란다.”

양 회장의 음성이 변했다. 갑자기 굳어진 얼굴 또한 인자하게만 보였던 모습은 아니었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할아버지는 저까지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으셨어요. 언제나 사람들과 어울려 살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 친구들이 누군지도 궁금해하셨잖아요.”

“내가 일부러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네 교육은 아비가 담당하는 것이고… 나는 주철이 너에게는 이상적인 말만 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죽고도 훌륭한 할아버지라고 기억할 것 아니더냐?”

“이번 부탁만 들어주시면 대대손손 훌륭한 할아버지가 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할아버지. 제가 자식 낳으면 철저히 세뇌시키겠어요. 약속드려요.”

“대책이 없는 것인지… 귀여운 것인지…….”

양 회장의 음성이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변화였다. 주름진 얼굴의 미소가 그렇게 인자해 보일 수 없었다.

“할아버지!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거죠?”

주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확실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였지만, 양 회장의 반응은 매우 의외였다.

도리도리.

“……!”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어 주철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든 것이다. 분위기를 봐서는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주철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주철아, 이번 일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알아봤는데… 이 할아비가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을 것 같구나.”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요!”

주철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도울 수가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능력이 부족해서? 주철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학생들의 싸움이 아니란다. 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뜻이다. 주철이 너는 관여치 않는 게 좋겠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여전히 모르겠어요.”

“네 친구의 아버지가 대한민국 장성이지?”

“맞아요. 쓰리스타예요.”

“이번 일은 엄청난 알력 싸움의 전초전이란다. 네 친구의 아버지인 김 장군은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사리분별이 확실하고 군인 중의 군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지.”

“저도 한 번 뵀는데 굉장히 멋진 분이었어요. 그런데 엄청난 알력 싸움이라는 게 무언인지…….”

“자세한 것은 가르쳐 줄 수 없지만… 네 친구의 아버지가 고지식해 너무 큰 사람과 맞서려는 것 같다.”

“설명을 들을수록 더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자세히 알아서 좋을 것 없다. 내가 나서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 두어라. 쯧쯧쯧… 참으로 미련한 사람 같으니… 하필이면 원 회장의 눈에서 벗어나다니…….”

“…….”

주철의 머리는 혼란 그 자체였다. 동빈의 아버지가 왜 튀어나오고, 원 회장은 또 누구란 말인가? 자세히 물어보고 싶지만,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도 막막한 처지였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물어도 대답을 해 주실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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