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3/224)

도망자

어스름한 달빛이 고요한 수면 위를 비추었다. 파도가 거셌던 겨울 바다는 밤이 깊어지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는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잔잔한 모습이었다.

출렁.

해안가 부근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둥그렇고 검은빛의 생물체가 수면을 가르며 올라왔다. 물고기라면 월척 중의 월척이었다. 조금 튀어나온 모습도 상당히 컸다. 적어도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 아니, 진짜 사람의 머리였다.

찰랑찰랑.

그는 눈까지만 내민 상태에서 주변을 살펴본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해안 가까이 다가왔다.

촤르르.

마침내 수면을 박차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이 사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동빈이었다.

동빈은 신속하게 물결을 헤치며 바다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올라서서는 다시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동빈은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험 지역은 충분히 벗어난 것 같은데…….”

싸움을 벌인 해안가는 저 멀리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헤엄쳐 왔다는 것인데, 엄청난 거리를 헤엄친 것보다 저체온증으로 죽지 않은 것이 더 신기했다.

“우선은 젖은 옷부터 처리해야겠다.”

동빈은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옷을 말리거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멀뚱멀뚱.

주철과 석진은 평상 위에 올려진 자신들의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동빈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구의 핸드폰이 울릴지는 알 수 없었다.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었고, 두 개의 핸드폰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거 고장 난 핸드폰 아니야?”

주철은 지극히 멀쩡한 핸드폰을 쓸데없이 만지작거렸다. 액정에 떠 있는 안테나를 보며 수신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재중 전화까지 확인했다. 물론,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놈 진짜 어떻게 됐나?”

주철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직까지 연락조차 없는 게 수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쫓기는 몸이라지만 전화 정도는 충분히 할 시간이 흘렀다.

“말이 씨 된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알아서 오겠지.”

주철보다는 침착한 석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부정 타는 소리를 늘어놓는 친구를 만류했다.

“이상하잖아? 왜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거지?”

“무슨 사정이 있겠지.”

“석진이 넌, 걱정도 안 되냐? 우리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잖아? 치열한 싸움 중에도 핸드폰은 꼬박꼬박 받았던 놈인데 말이야!”

“물속으로 뛰어들었잖아. 핸드폰이 젖었을 게 뻔한데 통화가 되겠냐?”

“그, 그런가…….”

“그놈 별명이 달리 괴물이냐? 동빈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죽지 않아. 이건 네가 할아버지한테 직접 했던 말이거든. 그러니까 우리도 조용히 기다리자, 응?”

열심히 부산을 떨던 주철이 얌전해졌다. 석진이 침착함을 유지했던 것은 친구를 믿는 마음 때문임을 알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딩딩딩딩.

믿음이 통한 것인가! 마침내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혀 기억에 없는 번호였다. 동빈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였다.

딩딩딩…….

딸깍.

“여보세요.”

주철은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제발 동빈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너는 낯선 번호만 뜨면 목소리를 까냐?

“짜식! 살아 있었구나.”

주철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석진의 얼굴도 함께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동빈이 친구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주철이 너, 무서운 소리 한다. 내가 죽긴 왜 죽어?

“TV에서는 죽었다고 나왔거든.”

-그래? 요즘은 TV도 믿을 게 못 되네. 이렇게 멀쩡한 사람을 말이야.

죽은 사람이 전화를 할 리는 없었다. 동빈의 무사함을 확인하자 주철은 안정을 되찾았다.

“참, 아버님께 무사하다고 전화는 드렸겠지? 엄청난 사고 쳤다고 꾸중하지는 않으시던?”

주철은 동빈이 집에 먼저 안부를 전했을 거라 생각하고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아니, 너희들한테 가장 먼저 한 거야.

“야, 야, 야! 당장 전화 끊고 아버님께 빨리 전화해. 네가 죽었다고 방송까지 나왔는데, 얼마나 걱정이 심하시겠냐!”

주철은 격양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전화의 순서가 틀렸다는 지적이었다. 동빈이 죽었다는 소문에 가장 충격을 받을 사람은 아버님일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귀청 떨어지겠다. 걱정 마라. 우리 아버지는 괜찮을 거다.

“이거 완전 불효자일세!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놈아! 아무리 대한민국의 쓰리스타라도 아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데 어떻게 괜찮겠냐?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자식이 조금만 다쳐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바로 아버지야.”

-충고는 고마운데… 네가 그런 말할 자격이 있냐?

당연히 자격 없다. 그렇기에 주철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야! 그건 그렇고… 어쨌든! 아버지께 전화하고 당장 이쪽으로 달려와.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양 회장 댁 간다고 해. 알았어?”

주철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직접 얼굴을 보고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할 생각이었다.

-주철아, 잠깐만…….

“왜, 너 택시비 없어? 괜찮아. 집사님이 밖에서 기다렸다가…….”

-그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곳이 해수욕장과 가장 가까운 시내인데 뭔가 수상하다. 경찰들이 쫙 깔려 있고 검문검색도 심하거든. 혹시 나 때문이냐? 방송에서 난 죽은 걸로 되어 있다며?

동빈의 연락이 늦었던 것도 경찰들의 영향이 컸다. 생방송을 망친 죄가 있기에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것이다.

“지금은 너 때문이 아닐 거야. 도망친 강기준 일당 때문이지. 그놈들은 경찰에서 긴급 수배 중이야. 너도 살아 있는 게 발각되면 당연히 수배 떨어져.”

-그럼 너희 할아버지 댁에 갈 수는 없지… 범인 은닉죄로 괜히 너한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잖아.

“괜찮아, 우리 할아버지 집은 경찰도 함부로 수색 못 해. 지금 너한테 가장 안전한 곳이란 뜻이지. 언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조용히 지내면 될 거야.”

주철은 할아버지의 배경을 신뢰했다. 동빈이 무사히 집 안까지만 들어온다면 절대 들킬 염려는 없었다.

-성의는 고마운데… 그쪽으로 가기는 싫다.

“야! 무슨 소리야?”

주철이 반문하는 것은 당연했다. 동빈이 고집을 피우면 정말 대책 없기 때문이다.

-난 중간에 작전을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자, 작전이라니? 또 싸우겠다는 뜻이냐?”

-당연하지.

“이… 미친놈!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넌 수배자나 다름없단 말이야! 그렇게 사고를 치고도 또 싸우겠다는 소리가 나와?”

주철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으면 왜 목을 잡고 쓰러지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번 시작한 작전은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전국에 있는 일진들을 소탕할 때까지 난 여행을 계속할 거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다오. 네가 이렇게 나오면 우리 할아버지도 감당하기 힘들어. 게다가 수배자의 몸으로 어떻게 일진들을 찾으러 다닐 거야?”

-나야 모르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머리 좋은 석진이가 있잖아. 조만간 다시 전화할 테니까, 좋은 방법 좀 생각해 달라고 전해 다오. 알겠냐?

“야, 너 전화 끊지 마. 잠깐만 기다려.”

-미안, 사람들의 시선이 만만치 않다. 옷을 구하긴 했는데 너무 작아서 말이지. 조금 있다 전화할게.

“도, 동빈아!”

뚜뚜뚜뚜.

동빈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에이… 젠장!”

주철은 짜증이 치솟아 핸드폰까지 번쩍 치켜들었다. 그대로 땅에 내던질 기세라 석진이 놀라서 뛰어들었다.

“주철아~.”

“말리지 마!”

“그거 내 핸드폰이야!”

“우와, 진짜 미치겠다!”

쿵쿵쿵쿵.

석진의 핸드폰이라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주철은 분을 참지 못해 미친 듯이 평상에 자기 머리를 찧으며 자학하기 시작했다. 주철의 속이 얼마나 답답한지 잘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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