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2/224)

완전한 어둠이 내릴 무렵.

낡은 택시 한 대가 거대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석진이 도착한 것이다. 양 회장 댁이라고 행선지를 말하니, 택시 기사는 두말없이 데려다 주었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양 회장의 집사가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덜컹.

“어서 오십시오. 석진 도련님 맞지요?”

집사는 택시 문을 열어 주는 호의까지 베풀었다. 뜻밖의 환영인지라 석진은 난감한 표정이 앞섰다.

“자, 잠시만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니… 석진은 서둘러 택시비를 내려고 여기저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계산은 저희가 따로 할 것입니다. 그냥 내리시면 됩니다.”

“그, 그래요? 가, 감사합니다.”

석진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괜한 신세를 지는 것은 싫지만, 빨리 내리는 것이 그를 돕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아, 네…….”

석진은 전통 주택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어 멍하니 집사의 뒤를 따랐다. 주철의 할아버지 또한 대단한 갑부인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의 저택을 개인이 소유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멈칫.

집사는 아담한 별채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건물 내부를 향해 기별을 전했다.

“주철 도련님, 친구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

그런데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집사는 석진의 얼굴을 잠시 살펴보고는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

“주철 도련님, 친구 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주철아, 나 왔다니까. 불러 놓고 뭐 하고 있는 거야?”

“미안, 어서 들어와.”

석진이 큰 소리로 말하자 주철이 반응을 보였다. 집사는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고 물러갔다.

드르륵.

반투명 유리로 된 유리문을 열고 석진이 들어섰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거실이 보였고, 주철은 컴퓨터 모니터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영화나 보고 있을 때냐?”

석진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이렇게 중요한 시국에 영화나 보고 있다니? 너무 일찍 포기하지는 말자는 뜻이었지만, 주철의 반응 역시 시큰둥했다.

“넌 저게 영화처럼 보이냐?”

주철은 턱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눈이 있으면 똑바로 보라는 뜻이었다.

“영화가 아니면 대체 뭔데?”

석진은 안경까지 고쳐 쓰며 반문했다. 이제는 한물간 홍콩의 갱 영화인가? 30인치가 넘는 모니터에는 피 튀기는 장면이 연방 이어지고 있었다.

“이야! 엄청 잘 만든 영화구만…….”

그래도 단역배우 출신인 석진 아니던가? 너무나 생생한 격투 장면에 석진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어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석진아… 아직도 저게 영화로 보이니?”

“……!”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액션 영화가 공포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석진은 완전히 얼어붙은 얼굴로 주철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설명 좀 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지금 인터넷, 장난 아니다. 누가 방송용 테이프를 빼돌린 모양인데… 동빈이 혼자 100명 가까이 아작 내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게다가 엄청난 고화질이야.”

“아, 아무리 그래도… 모자이크 처리는 좀 했어야지. 너무 잔인하고 살벌하다.”

“그러게… 내가 봐도 속이 울렁거린다.”

화면 속의 동빈은 미친 듯이 날뛰는 흉기였다. 연출이 아닌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비위까지 상했다. 주먹 한 방에 얼굴이 작살나고, 발차기가 작렬하면 비참하게 고꾸라졌다. 팔꿈치와 무릎 공격의 파괴력은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가끔씩 터지는 박치기와 꺾기 기술 또한 그 위력이 엄청났다.

“주철아, 그래도 공중파 TV에는 안 나왔으니 다행이잖아?”

“국내가 문제가 아니야. CNN엔 벌써 나갔다고 하더라. 해외 토픽으로 중국이나 일본도 난리가 아니래. 동빈이 그놈… 범세계적으로 사고 친 거야.”

방송과 인터넷의 영향으로 사고 후유증이 점점 커졌다. 단순한 방송 사고가 아니라 100 대 1의 신화적인 싸움이라 해외의 반응까지 엄청났다. 기네스북에 올려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주철아,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난 모르겠다. 머리 좋은 네가 어떻게 좀 해 봐라.”

“무슨 소리야? 빽 좋은 네가 어떻게 해 봐야지.”

“이게 빽으로 해결될 문제냐?”

너무 큰 사고인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석진과 주철은 서로만을 의지하는 상황이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부스럭부스럭.

“……!”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주철과 석진은 말싸움을 멈추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지 않았을지 염려스러운 상황이었다.

“험험… 주철이, 안에 있는 게냐?”

“네, 할아버지. 자, 잠시만요…….”

의문의 방문자는 주철의 조부인 양 회장이었다. 주철은 주변을 정리하며 시간을 끌었다.

“석진아, 컴퓨터부터 꺼.”

“아, 알았어.”

주철은 최대한 천천히 출입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동빈이 나온 화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었다.

드르륵.

“할아버지, 이 늦은 시간에 웬일로…….”

“웬일은? 우리 손자 친구들이 왔다며?”

집사가 양 회장에게도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주철의 조부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손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인사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괜찮다, 누가 먼저 오면 어떠냐?”

“우선은 들어오세요, 할아버지.”

“그래, 고맙구나.”

양 회장은 여전히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전형적인 모범생의 모습을 갖춘 학생을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 얘가 제 친구예요.”

“안녕하세요. 박석진입니다.”

꾸벅.

석진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양 회장은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석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왔어, 석진 학생. 그래도 주철이가 왕따는 아닌 모양이군. 자, 너희들도 앉아라.”

“감사합니다.”

양 회장이 앉자 주철과 석진도 따라 앉았다. 고급스러운 평상을 사이에 두고 양 회장과 석진, 주철이 마주 보는 위치였다.

“우리 주철이와 같은 반 친구라고?”

“네, 그렇습니다.”

석진은 편안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주철의 할아버지가 지레짐작했던 것처럼 깐깐하지 않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성격도 좋고 공부도 무척 잘한다고 하던데?”

“조금 하는 편입니다.”

석진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공부 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할아버지, 조금이 아니에요.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고요.”

“허허허, 그래?”

주철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한층 띄워 놓았다. 공부 잘하는 친구와 사귀는 것 또한 나쁠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격 좋고 공부 잘하는 석진을 좋아했고, 학부형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정도였다.

“마음만 먹으면 못 가는 대학이 없다고 보시면 돼요. 상위권 대학에서도 서로 데려가겠다고 난리예요.”

“그래? 손자 놈한테 들으니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다고 하는데, 정말 장하구나. 환경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나도 괜히 흐뭇하단다. 주철이 놈이 친구는 제대로 둔 모양이군.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는 언제 오는 것이냐?”

“…….”

주철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놈 피 터지게 싸우느라 못 온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키가 큰 학생도 온다고 하지 않았더냐?”

“도, 동빈이요… 그, 글쎄요. 왜 연락이 없을까요… 참! 석진이한테 전화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너 통화해 봤냐?”

“……!”

주철은 슬그머니 석진에게 짐을 떠넘겼다. 순간적으로 당황하던 석진은 서둘러 표정 관리에 들어섰다.

“아, 마, 맞다! 좀 전에 통화했는데… 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많이 늦을 것 같다고 하더라. 오늘 못 올 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래.”

“그놈한테 연락이 왔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미, 미안… 내가 깜박했네…….”

다행히 석진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양 회장은 주철과 석진의 어색한 연기를 믿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급한 일이 생겼다니 할 수 없지… 그런데 너희들은 뭐 하고 있었느냐? 강 집사한테 주전부리 좀 내오라고 하지?”

양 회장은 아쉬운 감정을 오래 간직하는 체질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있는 주철과 석진에게 관심을 쏟았다.

“아, 아니에요. 그, 그냥… TV를 보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9시가 넘었구나. 여기서 뉴스 좀 봐도 되겠지?”

“물론이지요. 제가 켤게요.”

띠리릭.

주철은 서둘러 TV 리모컨 스위치를 눌렀다. 할아버지가 9시 뉴스는 반드시 시청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자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아온 할아버지의 정성을 외면할 순 없었다.

디잉.

에코가 섞여 있는 디지털 음향과 함께 TV의 전원이 켜졌다. 화면보다는 음성이 먼저 들려왔다.

-다음은 오늘 벌어졌던 방송 사고 내용입니다.

‘미친다. 하필이면…….’

주철은 슬쩍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이 있다니? 자신조차 신기할 정도였다.

-여러분, 많이 놀라셨을 줄 압니다. 이번 사건은 학원 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보여 주는 극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내용을 유승민 기자가 간추렸습니다.

“쯧쯧쯧…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겁이 없어.”

양 회장은 혀끝까지 차며 TV를 시청했다. 미친 듯이 날뛰는 동빈의 모습과 함께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오후 6시 15분경, 생방송으로 일기예보를 하던 중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의 무력 충돌이 벌어진 것입니다.

주철과 석진도 열심히 TV를 경청하고 있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는지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상태였는데, 갑자기 양 회장이 질문을 던졌다.

“주철아, 너는 싸움 같은 거 하지 않지?”

“싸, 싸움요…….”

깜짝 놀란 주철은 움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손자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주철이 어색한 표정을 보이자 재빨리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어허, 내가 괜한 것을 물어봤구나. 우리 손자는 너무 순해서 탈이었지.”

“그, 그렇지요…….”

주철의 목소리는 더욱더 작아졌다. 할아버지의 인자한 미소를 보고는 도저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남의 양주철!

한때는 학생 연합의 잘나가는 행동대장이었고, 혼자서 서울 연합을 박살 낸 인물이었다. 지금은 학원 폭력과 담쌓고 지내려 노력하지만, 이따금 성질이 폭발하는 게 문제였다. ‘졸라 괴물’인 김동빈과 더불어 ‘열라 또라이’로 불리던 존재가 바로 양 회장의 손자 주철인 것이다.

“그래… 싸움은 좋은 게 아니란다.”

양 회장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빈이 싸움하던 장면은 사라지고 경찰들이 투입되는 화면으로 바뀐 상태였다.

-이번에도 경찰의 늑장 대처가 도마에 오르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출동한 것입니다. 또한 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싸우는데 고작 순찰차 몇 대가 출동한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찰차를 가로막는 술 취한 행인들 때문에 시간이 더욱 지체되었습니다. 그동안 학생들의 피 튀기는 대결은 계속되었고, 결국 경찰 특공대가 투입돼서야 사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카메라가 잡은 모래사장의 풍경은 난리도 아니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학생들이 도처에 즐비했다. 그래도 멀쩡한 학생들은 경찰 특공대를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었다.

-경찰은 폭력에 가담한 80여 명을 검거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M고등학교 2학년 김 모 군과 S고등학교 3학년 강 모 군은 잡지 못했습니다. 학생 조폭으로 알려진 3학년 강 모 군은 경찰이 출동하자 곧바로 도망쳤으며, 2학년 김 모 군은 경찰을 피해서 무모하게 겨울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쯧쯧쯧, 미쳤구먼. 이런 날씨에 바다로 뛰어들다니…….”

양 회장은 비극적인 결말을 예측했다. 겨울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이나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경찰의 발표 또한 양 회장의 예측에 손을 들어 주었다.

-경찰은 잠수부까지 동원했지만 김 모 군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김 모 군이 사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날이 밝는 대로 시신을 찾는 데 주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큰일이야, 큰일… 나라가 어찌 돌아가려고…….”

양 회장은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TV를 보면서 나오는 양 회장만의 특징인 것 같았다. 매우 중요한 이슈였기에 9시 뉴스에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번 폭력 사태의 파장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습니다.

앵커의 멘트는 또 다른 내용이 있다는 뜻이었다. 주철과 석진은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면서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인터넷은 김 모 군의 싸움 이야기로 난리도 아니라고 합니다. 과연 폭력을 폭력으로 상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요? 장철민 기자가 시민들의 반응을 알아보았습니다.

-네, 이곳은 김 모 군이 다니고 있는 M고등학교입니다.

“……!”

“……!”

TV 화면이 바뀌자 주철과 석진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기자가 서 있는 장소가 매우 낯익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든 상태였다.

-학교 선생님과 인터뷰를 하려 했지만 방학 중이라 힘들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대신 몇몇 학생들과 인터뷰를 해 보겠습니다.

이십 대 중반의 남자 기자가 멘트를 마치자 귀여운 여학생이 등장했다. 그녀는 TV 카메라를 보고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방송을 탄다는 것이 좋은지 오히려 싱글벙글한 모습이었는데, 주철과 석진도 안면이 있는 여학생이었다.

-김 모 군과 잘 알고 지냈다고 하던데, 평상시 김 모 군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대빵 멋있는 오빠예요!

선아는 들뜬 목소리로 동빈을 찬양했다. 그러고 보니 철없는 중딩들이 모두 출동해 인터뷰하는 선아의 주변에서 TV에 나오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자는 철없는 중딩들을 만류해 가며 계속 인터뷰를 시도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멋있다는 건가요?

-우리 오빠는 졸라 싸움 잘해요. 조폭도 패고요. 그놈들이 열라 다구리해도 소용없어요. 그리고 착한 애들은 절대 안 건드려요. 그러니까 더 멋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싸움을 잘해서 멋있다는 건가요?

-물론이지요! 기자님도 인터넷에서 보셨을 것 아니에요. 100 대 1로 싸우면서도 절대 밀리지 않았어요. 경찰이 출동 안 했으면 우리 오빠가 이겼을 거예요.

-그렇군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라? 나 아직도 할 말 많은데요?

기자는 인터뷰를 끝내려 했지만, 선아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이크를 끌어당기고는 뭔가를 말하려고 노력했다.

-하, 학생. 그, 그만 수고했어요.

기자는 당황해서 얼른 마이크를 빼앗았다. 방송 사고를 취재하려다가 방송 사고가 난다면? 방송 스텝이 재빨리 뛰어들었고, 선아의 마지막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도, 동빈 오빠, 파이팅!

깜빡.

화면이 급하게 바뀌면서 앵커의 모습이 보였다. 방송 사고를 염려하여 서둘러 스튜디오를 연결한 것이다.

-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는 크나큰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은 다른 학생들이 폭력을 정당한 수단으로 인식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김 모 군의 행동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요? 그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 학생을 저의 방송국이 단독으로 인터뷰했습니다.

‘뭐야? 동빈이가 다른 애들을 괴롭힌 적이 있어?’

주철은 깜짝 놀라서 석진에게 물었다.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만 크게 벌려 뜻을 전한 것이다. 일진들이 아닌 다른 학생을 괴롭혔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말도 안 돼! 동빈이가 그럴 놈이 아니잖아?’

석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순진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구분이 안 가는 동빈이었다. 석진도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지 못했고, TV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모자이크 화면이 등장하면서 변조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 삑삑…이 어찌나 심하게 괴롭히는지… 그… 삑삑…이 자기 여자 친구를 괴롭혔다고 일일찻집에 찾아와서… 아무 사람이나 패고 부수고…….

목소리를 변조하고 모자이크까지 했지만 젊은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주철이 잡아냈다.

‘천박한 파마… 넌 죽었다.’

얼굴을 가리면 뭐 할 것인가?

요상한 파마가 주철의 눈에 확 들어왔다. 서일여고 일진인 방은실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은 주철은 양 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부탁이 있습니다.”

“응? 부탁이라니?”

양 회장은 태도가 확 달라진 손자를 바라보았다. 결연한 눈빛을 보니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가 힘 좀 써 주세요.”

“다 늙은 사람에게 힘을 쓰라니?”

양 회장이 손자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다. 직설적으로 설명하라는 표현이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방송 사고의 주범인 김 모 군이 제 친구입니다.”

“뭐라? 오늘 못 온다고 했던…….”

“맞습니다. 그놈… 저기서 싸우느라 못 온 겁니다.”

“…….”

양 회장은 사태를 파악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손자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사고가 터진 해수욕장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석진의 얼굴 또한 바싹 굳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양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나한테 뭘 원하느냐?”

“폭력을 행사한 동빈이도 문제지만, 저런 야비한 애들한테까지 비난받을 짓은 아니에요. 언론이 폭력이란 것만 강조하여 일진 놈들이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일진들에게 당한 애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할아버지가 나서면 언론도 공평한 보도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철은 할아버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은퇴를 했지만 예전에는 지하 경제계의 거목이었다. 정계나 언론계에 대한 입김도 상당한 편이었다. 아니, 거의 절대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주철아… 친구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괜한 헛수고는 하지 말거라. 같이 뉴스를 보지 않았더냐? 네 친구는 죽었다.”

“아니요! 동빈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할아버지께 부탁하는 겁니다.”

“…….”

침묵이 흐르고 9시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또한 김 모 군의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인 것이 밝혀져 또 다른 파장이 예상됩니다. 비록 아들이 벌인 일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중요한 신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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