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8/224)

한적한 겨울 바다.

여름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분주했지만, 겨울만 되면 이처럼 황량하게 변했다.

좀처럼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던 이곳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건장한 청년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다녔다. 모두가 범상치 않은 생김새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성인 조직 폭력배 못지않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특히, 중앙에서 이끄는 놈의 카리스마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짧은 머리에 진한 눈썹. 심하게 각진 턱과 190이 넘는 체구. 학생 조직의 우두머리 강기준이었다.

“피라미 새끼들은 필요 없다니까. 상대는 김동빈이란 말이야. 운동한 놈이나 무술 유단자 중에서 최대한 뽑아. 그래, 모자라는 인원수는 내가 보충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리에 합세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강기준은 핸드폰으로 최대한 인원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기준아, 형님 전화 왔다.”

시간이 촉박한지 핸드폰도 3개를 사용했다. 강기준은 재빨리 다른 핸드폰을 전해 받았다.

“네, 형님.”

강기준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성인 폭력배에게도 싸움 전국구로 통하는 인물이 강기준이었다.

“20명만 보충해 주십시오. 연장질 잘하는 놈은 소용없습니다. 김동빈은 주먹으로 상대해야 합니다.”

동빈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입수한 모양이었다. 성인 폭력배에서 주먹을 잘 쓰는 인원까지 소집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해수욕장으로 보내 주십시오.”

“기준아, 전화.”

강기준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핸드폰을 끊자마자 다른 전화를 받아야 했다.

“뭐라고! 누구든 예외 없다고 했지! 강태, 준수, 창욱이, 당장 5분 내로 튀어 오라고 그래!”

“기, 기준아?”

“뭐야? 이번에는 어디 전화야?”

“전화가 아니라…….”

강기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중요한 전화도 아닌데 왜 불렀단 말인가? 자신의 더러운 성격을 시험하는 것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약속 장소를 누군가 먼저 차지한 것 같은데?”

“뭐라고?”

강기준은 전방에서 벌어진 상황을 주시했다.

넓은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학생 조직은 아니었다. 영화라도 찍는 것인가? 촬영 장비 비슷한 것도 볼 수 있

었다.

“야, 저거 뭐야?”

“내가 알아봤는데 방송국에서 온 것 같아.”

“방송국?”

강기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새해를 맞아서. 6시 뉴스의 일기예보를 여기서 한대.”

“진짜 지랄을 해라.”

강기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분을 삭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하필 오늘 같은 날 방송국 차가 올 것이 뭐란 말인가? 이곳을 선택한 것은 대규모의 인원이 모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준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그냥 조용히 기다려. 방송국 차 떠나면 그때 붙는다. 늦게 오는 놈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알았어.”

학생 조직은 방송국 차 주변으로 흩어졌다. 험상궂은 남자들이 계속 얼쩡거렸지만 방송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했다.

“정혜선 씨는 나날이 인기가 높아지네. 여기까지 따라오는 남성 팬들 좀 봐? 기상 캐스터가 아니고 스타 연기자 같아.”

“어머… 죄송합니다. 팬클럽에도 비밀로 했는데…….”

기상 캐스터는 얼짱으로 소문난 여자였다. 남자 팬들의 극성이 싫지는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자, 리허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정혜선 씨, 생방송이니까 신경 써서 준비합시다.”

스텝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생방송이기 때문에 자그만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싸움을 위해 이곳을 찾은 학생 조직들은 진짜 구경꾼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정혜선이다.”

“기준이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랬지.”

학생 조직의 1명이 얼짱 기상 캐스터를 보기 위해 괜히 기웃거렸다. 그녀는 일기예보뿐만이 아니라 각종 쇼 프로에 출연했기에 인기가 높았다.

“저기… 김동빈이 온 거 같은데?”

“저놈인가? 기준이 못지않은 체격인데?”

정혜선에게 쏠려 있던 놈들의 시선은 일제히 동빈에게 쏟아졌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기상 캐스터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 보였다.

“강기준. 오랜만이다.”

“크리스마스 때 봤으니, 별로 오랜만은 아니잖아?”

동빈과 강기준은 치열한 눈싸움을 벌였다. 체격 면에서도 서로 비슷했고,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또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인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언제 덤빌 거야?”

“일기예보 끝나고… 지금 시작하는 걸 보니, 곧 끝날 거야.”

“여러분 조용히 해 주세요. 생방송 들어갑니다.”

일기예보는 시작하기 직전이었고, 동빈과 학생 조직의 싸움은 잠시 뒤로 미루어졌다.

“오늘은 꽤나 많이 왔는데? 정확히 100명인가?”

“상대가 상대이니 신경 좀 썼지.”

“스텝들 위치!”

동빈과 강기준의 대화나, 생방송 모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미안하지만 강기준, 네가 100명이 덤벼도 날 이길 수 없어.”

“이런 씨발! 형님에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만, 아직 싸울 때가 아니야.”

강기준의 수하들이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학생이 아니라 조직 폭력배. 형님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었다.

“저런 놈들은 왜 데려왔어? 괜히 짐만 될 것 같은데?”

“이런 미친 새끼!”

“스탠바이∼. 큐!”

매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상 캐스터는 활기찬 음성으로 일기예보를 시작했다.

“시청자 여러분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해수욕장에서 일기예보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일출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하셨을 텐데요…….”

“형님! 이 새끼 조져 버립시다!”

“참으라고 했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춥겠습니다. 이번 추위는 주말까지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생방송은 점점 불안해졌다. 학생 조직들의 과격한 목소리가 도를 넘었다. 방송사 스텝들이 눈치를 주었지만 그들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날 무시하는 건 참겠지만 형님을 무시하는 건 도저히 못 참습

니다.”

“누가 깡패 아니라고… 깡패다운 소리만 늘어놓네?”

“뭐라고 이 씨발새끼야!”

“울릉도와 독도는 10∼20mm 적설량을 보이겠고, 내일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7도까지 떨어지겠습니다.”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충청 이남의 기온은 내일도… 어머나!”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지만…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김동빈, 이 개새끼… 조져 버려!”

엄청난 방송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기상 캐스터 주변에서 피 튀기는 대결이 들어선 것이다.

100 대 1의 어처구니없는 대결의 시작. 생방송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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