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5/224)

오후 1시가 갓 지날 무렵.

동빈 일행의 승용차가 대전 인터체인지로 들어섰다. 석진은 대전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지도도 찾지 않고 시내 중심가 쪽으로 차를 몰았다.

“석진아, 잠깐!”

내내 삐쳐 있던 주철이 간만에 입을 열었다. 여자들과 제대로 말도 못 하고 헤어진 것이 계속 불만이었다. 그나마 아침 일찍 떠난 덕분에 이 시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왜? 화장실 가고 싶어?”

석진은 급한 일이라 예상하고는 속도를 늦췄다. 마지막으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도 주철은 계속 차 안에 머물렀다.

“화장실이 아니고… 저쪽으로 방향을 바꿔라.”

“어디 가게? 시내로 가야 묵을 곳을 잡기 쉽지.”

주철은 시내와는 동떨어진 방향을 가리켰다. 예정에 없는 일이었기에 석진이 반문하는 것이었다.

“내가 잠시 들를 때가 있으니까, 좀 가자.”

“뭐… 차 주인이 원하니까.”

끼이익.

석진은 주철이 원하는 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계속 직진을 해야 했다.

“500m쯤 가면 사거리가 나오거든? 거기서 좌회전해라. 전방에 다리 하나가 보일 거다.”

주철은 이곳 지리에 상당히 능통했다. 거의 내비게이션 수준으로 설명을 했고, 그 정확성 또한 확실했다.

“여기서 좌회전이란 말이지…….”

끼이익.

좌회전하여 접어들자 낡은 다리가 나타났다. 이 길을 자주 지나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완벽한 설명이 가능할 리 없었다.

“다리 건너서 오른쪽 잘 살피고 가라.”

“오른쪽에 뭐가 있는데?”

“괜찮은 미용실 있거든. 머리 좀 손질할 거니까, 잠시 멈춰라.”

“그, 그래…….”

석진은 복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설마, 미용실을 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괜찮은 미용실이라면 시내 쪽이 훨씬 많지 않은가?

하지만 석진은 많은 의문점을 뒤로한 채 우선은 주철의 기분을 맞춰 주기로 결정했다.

한가해 보이는 미용실.

석진과 동빈은 주철의 머리 손질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준 음료수를 마시면서 잡지책을 뒤적였다.

“동빈아…….”

“응?”

무료함을 참지 못한 석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동빈 또한 심심했던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아까 미라하고 무슨 얘기 했어?”

이별의 순간을 언급하는 것이다. 동빈과 미라는 남들의 눈을 피해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거 아니야. 언제 제대하냐고…….”

“제대? 너한테 관심이 많은가 보네…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데?”

“뭐라 하긴… 아직 왕창 남았다고 했지.”

어차피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동빈은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도록 머리를 굴린 것이다.

“그랬더니 뭐래? 꽤나 길게 이야기했잖아.”

“휴가는 또 언제냐, 부대는 어디에 있느냐, 면회 가도 되느냐, 계속 꼬치꼬치 묻더라고.”

“골치 아팠겠다. 그런데 어떻게 위기를 넘겼냐?”

“특수작전 때문에 이라크로 간다고 했어. 이번 휴가도 이라크 때문에 받은 거라고 했지.”

“쯧쯧쯧… 그래서 미라의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던 거구나.”

거짓말은 이게 바로 문제였다.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해야 했다.

“석진이, 너도 가영이랑 대화했잖아.”

“응, 별거 아니야.”

작별할 무렵엔 어느 정도 짝이 맞춰진 상태였다. 동빈과 미라, 그리고 석진과 윤가영, 마지막이 주철과 오지혜였다.

“별거 아니라니? 너도 꽤나 오래 이야기했잖아?”

“내가 부탁한 거지. 조만간 군대 가는데 아버지께 말 좀 잘 해 달라고…….”

“그랬더니?”

어느새 그런 부탁까지 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석진처럼 실속을 잘 챙기는 사람도 드물었다.

“취사병 쪽으로 부탁해 본대. 그런데 동빈아, 취사병도 빽으로 들어가는 거야?”

“…….”

배경보다는 요리 경력과 실력에 달려 있었다.

윤가영은 교묘하게 석진의 부탁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주철과 오지혜 커플은 과외 어떻게 된 거냐며 주철이 추궁만 당하다 끝나 버렸다.

“오래 기다렸지? 너희들도 머리 좀 하지 그랬냐?”

머리 손질을 끝낸 주철이 등장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동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주철이 맞냐?”

“스타일 좀 바꿨다고 놀리는 거냐?”

“왜 이리 깔끔해? 정말 폼생폼사 주철이 맞아?”

“누구 좀 만나려면 어쩔 수 없다.”

주철은 전혀 딴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방학을 맞아 갈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를 본래의 색으로 바꾸었고, 화려했던 머리 스타일 또한 단정한 모범생 스타일로 변화를 주었다.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라 동빈이 적응을 못 한 것이다.

“만날 사람이 누구냐?”

“할아버지. 이 근처에 사시거든.”

“어쩐지…….”

이제야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주철이 이곳 지리에 능통했던 이유를 알 만했고, 모범생 스타일로 탈바꿈한 사연도 짐작할 수 있

었다.

“너희들도 같이 가자. 오늘은 우리 할아버지 집에서 자는 거야. 어때?”

“조금 부담스러운데?”

“그러게…….”

석진과 동빈은 흔쾌히 대답하지 못했다.

주철의 할아버지라… 인자함보다는 딱딱한 느낌부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치사하게… 너희들 정말 안 갈 거야?”

“미안한데 난 급한 볼일이 있거든.”

“갑자기 무슨 볼일인데?”

동빈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 급한 일이 있는 것인지, 주철의 할아버지 댁에 가기 싫어 꾸며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 만날 사람이 있어서…….”

“누, 누구? 너도 이곳에 친척 있냐?”

“아니… 손볼 놈들이 있어서.”

“내일 손보면 되잖아? 아니면, 우리 할아버지께 인사만 하고 가도 되고 말이야.”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다. 나 먼저 갈게.”

“도, 동빈아!”

동빈은 서둘러 미용실을 벗어나려 했다. 주철의 간절한 부름을 외면하고는 재빨리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석진아, 넌 만날 사람 없지?”

“…….”

주철은 석진의 어깨부터 제압하고 말했다. 도망치는 것을 미리 봉쇄하겠다는 뜻이었다. 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리는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주철의 할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

“석진이, 너만은 나를 따라가야 해. 알았어?”

딩딩딩딩딩.

절묘한 타이밍에 석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석진은 주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냈다.

딸깍.

“여, 여보세요.”

-석진아, 나다.

석진과 동빈에게 단역배우 자리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급한 일이 생겼는지 매우 불안정한 음성이었다.

“네, 형님. 무슨 일이에요?”

석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철이 바로 앞에서 도청을 하고 있기에 꼼수를 부릴 수도 없었다.

-너 방학했지.

“네.”

-혹시 시간 좀 낼 수 있겠니?

“시간요? 그, 글쎄요.”

지금이라면 당연히 내고 싶다. 그러나 주철의 눈치 때문에 어정쩡한 대답만 해야 했다.

-이제 고3인지 알고 있지만… 내가 믿고 맡길 사람이 있어야지. 이번 한 번만 도와주라.

“죄, 죄송하지만 도울 수가 없겠어요. 제가 멀리 좀 나왔어요.

주철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빈은 실패했으니 석진만큼은 꼭 데려가고 싶었다.

-진짜 잘됐네! 우리도 서울에서 하는 일 아니거든.

“그, 그래요? 저는 지금 대전에 있는데요?”

-나이스! 바로 대전에서 진행하는 일이야!

주철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이렇게 일이 꼬일 수도 있다니? 이번에도 혼자 할아버지 댁에 가야 하는가? 친구 좀 데려오라는 할아버지의 당부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어떤 촬영인데요?”

-이번에는 영화가 아니라 이벤트 행사야. 차비는 내가 줄 테니까, 택시 타고 빨리 와라.

“그럼요, 당연히 빨리 가야지요.”

-고맙다. 석진이, 네가 내 목숨을 구한 거다.

“네. 최대한 빨리 갈게요.”

딸깍.

석진은 전화를 끊고 주철을 바라보았다. 너도 들었으니 빨리 비키라는 뜻이었다.

“정말 가야겠니?”

“사람 목숨이 달렸잖아?”

“…….”

주철도 급박했던 전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석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가라.”

“고맙다. 내가 전화할게.”

석진도 동빈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미용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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