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80/224)

장시간의 음식 준비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정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한 음식.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절로 흐뭇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머나! 이 음식을 우리가 다 만들었단 말이야?”

“계집애도 참… 우리는 잡일만 거들었을 뿐이잖아. 석진이 혼자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맞아, 석진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요리사가 체질이야. 음식 만들 때 봤어? 한 번도 쉬지 않고 요리에만 몰두하잖아. 정말 대단한 집념이더라.”

여자들은 돌아가면서 석진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참고로 그녀들은 내기가 걸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너희들 저녁은 어떻게 할 거야?”

차가운 냉수를 마시고 한숨 돌린 석진이 물었다. 승리를 거두고 나자 온몸의 맥이 탁 풀렸다. 그리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난 별로…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계집애, 일하면서 그렇게 집어 먹었으니 배가 고프겠냐?”

“얘는? 나만 먹었니? 솔직히 네가 더 먹었잖아.”

저녁은 그냥 건너뛰어도 문제없을 것 같다.

석진은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8시 뉴스에 시선을 집중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새해가 4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기에 시청자 여러분도 아쉬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해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큰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종로에 방송국 중계차가 나가 있습니다. 유영인 기자, 나와 주십시오.

거실에선 주철이 혼자서 TV를 보고 있었다. 주방 쪽을 등지고 누워 있는 자세는 상당히 삐쳤다는 증거였다.

“주철아, 음식은 다 만들었다.”

“알고 있다.”

주철은 계속 TV를 보면서 대답했다. 내기에서 졌음을 시인하는 모양새였다.

“저기… 호텔 뷔페권은?”

“에이… 씨! 내가 떼먹냐? 어련히 알아서 준다니까!”

주철은 몸을 확 일으키며 대답했다.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혼자 왕따를 당했다는 기분 때문에 폭발한 것이다.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냥 물어본 건데?”

“날 의심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친구를 못 믿으면 안 되지. 내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것 봤어?”

“어머나, 난 봤는데?”

“…….”

오지혜의 목소리에 주철이 꼬리를 내렸다. 그녀는 고개 숙인 주철을 향해 다가오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과외는 어떻게 된 거야? 오늘은 꼭 알려 준다고 했잖아?”

“그, 그게 말이지…….”

주철은 정말 할 말이 없게 돼 버렸다.

이젠 변명거리도 다 떨어졌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주철은 땀만 삐질삐질 흘리는 상황이었는데, 뜻밖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주철아, 동빈이는 언제 온데?”

“응! 그놈 말이야…….”

미라의 등장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주철은 괜히 몸까지 일으키며 말을 길게 끌었다. 오지혜의 관심을 돌릴 만한 뭔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좀 전에 전화 왔는데… 못 올 수도 있다네?”

“정, 정말이야?”

주철의 꼼수가 빛을 발했다. 동빈이 못 올 수도 있다는 말에 여자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단은 위기를 넘겼지만 곧이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고 말았다.

“뭐야! 설마 동빈이가 그놈들 때문에 다친 거야?”

“다, 다치다니? 동빈이가 왜 다쳐?”

‘이런… 석진이 이놈은 눈치도 없나?’

석진도 깜짝 놀라서 반문하니 문제였다. 동빈이 일진들과 싸우다가 다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주철의 실감 난 연기가 동료까지 속이고 말았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봉합해야 했다.

“아, 아니… 너무 걱정하진 마. 정말 별거 아니거든. 갑자기 부대 고참을 만났대. 이야기가 길어져서 좀 늦을 수도 있다고 한 거야.”

“그러면 다행이고…….”

여자들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석진도 이제야 주철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군인도 아니면서 부대 선임병을 만날 수는 없었다.

“참, 너희들 새해 소망은 뭐야?”

주철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뜬금없는 질문은 아니었다.

방송국 기자가 시민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금 지나갔다. 중년 아저씨는 경제가 나아지는 것을 소망했고, 20대 청년은 취업을 하고 싶다는 자그만 희망 사항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주 멋진 남자 친구 사귀는 거.”

미라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매우 순수한 답변일지 모르지만 수상한 기색이 없지는 않다. 동빈을 찜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선포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별거 없는데? 그냥 부모님 건강하시고… 개인적으로는 장학금 한번 탔으면 좋겠다.”

윤가영의 새해 희망도 소박한 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지혜에게 집중되었는데…….

“난 과외 좀 했으면 좋겠다.”

“에이 씨!”

주철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오지혜가 생각보다 집요한 면이 있었다. 과외 자리를 소개해 주지 않으면 평생 따라다닐지도 몰랐다.

“그런데 석진이 소망은 뭐야?”

대화의 주도권은 여자들한테 넘어왔다. 미라가 질문을 던지자 석진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당연히 대학에 들어가야지.”

거짓이 없는 답변이었다. 사수생의 거짓 신분이나 고3이라는 실제 신분에 모두 해당되는 탁월한 소망이었다.

“주철이 넌?”

“글쎄…….”

고독한 분위기를 잡으려는 의도인가? 주철은 한발 빼는 반응을 보였다.

“모두 소망을 말했잖아. 너도 말해야지.”

“그런 거 함부로 말하면 부정 타는 거야. 난 새해 일출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빌 거다.”

주철이 배신을 했다. 자신이 먼저 바람 잡고 혼자만 부정(?)을 타지 않겠다고 쏙 빠진 것이다.

“치사하게. 새해 소망 말하면 부정 탄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난 징크스가 있거든. 새해 일출을 보면서 소망을 말하면 이루어지는데, 그 전에 말하면 완전 꽝이더라구.”

개인적인 경험이 징크스로 굳어 버린 것인가? 주철은 반드시 새해의 일출을 보면서 기원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주철아, 그럼 내일 해돋이 보러 갈 거야?”

“물론이지. 여기서 동해가 가깝잖아. 미라 너도 같이 갈래?”

“아니, 난 별로…….”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해돋이를 봐야지. 난 사실은 스키 타는 것보다 일출이 주된 목적이었어. 새해 첫날 보는 해돋이가 효험이 가장 크거든!”

주철은 해돋이의 효험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미라의 반응은 매우 차갑다고 할 수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철아, 미안한데… 지금 눈이 계속 내리잖아?”

“……!”

“이런 날씨면 일출은 다 봤다고 해야지.”

“안 돼∼. 난 일출을 꼭 봐야 한단 말이야! 제발 눈 좀 그만 오라고 그래!”

주철은 거실 창문을 보면서 절규를 토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은 이제 폭설에 가까웠다. 그칠 기미는 당최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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