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는 것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하얀 설원은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처절한 대결이었다.
푸악!
와지끈.
동빈의 주먹은 무쇠로 만든 것 같았다.
단 한 방으로 사람의 얼굴을 완전히 변화시켜 버렸다.
주르르.
코는 완전히 주저앉았고 진한 핏물이 눈 위로 떨어졌다.
더 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했다. 놈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 보고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 새끼! 죽여 버린다!”
일진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동료들의 처량한 모습에 크게 자극된 것이었다. 고함을 치면서 동빈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지만…….
엉금엉금.
격양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보였다.
눈을 헤치며 느릿느릿 움직이는 장면은 처절한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죽어! 이 개새끼야!”
후웅.
최선을 다해 주먹까진 휘둘렀다.
그러나 전혀 위협적이진 않았다. 동빈이 가만히 있어도 주먹은 형편없이 빗나갔다.
빠각!
“……!”
쓸데없는 반항은 화를 자초한다.
동빈은 강력한 찍어차기로 놈의 정수리를 찍어 버렸다.
풀썩.
눈에 동공이 풀리면서 놈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동빈을 노려보고는 조용히 뒤로 넘어갔다.
“모두 저 꼴 나고 싶어! 당장 뛰어들어!”
“씨발! 김동빈 새끼도 사람이야!”
와르르.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했던 싸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놈들은 죽기 살기로 동빈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놈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한 놈 쓰러지면 두 놈이 몸을 날려 동빈을 압박했다.
“내가 잡았어. 씨발!”
“나도 잡았어!”
모진 고생 끝에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동빈의 한쪽 팔과 허리를 붙잡은 것이다.
퍼억!
“크억…….”
“놓지 마, 씨발!”
놈들도 필사적으로 변했다.
동빈의 팔을 잡고 늘어지는 놈은 이를 악물었다.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내하는 투혼을 불살랐다.
푸억!
“꺼억!”
“씨발! 죽어도 놓지 마!”
동빈의 팔꿈치에 등이 찍힌 놈은 게거품을 물었다.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끝까지 팔을 풀지 않았다. 허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동료의 성원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퍼억! 퍼억!
동빈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묵직한 주먹과 팔꿈치 공격을 연달아 퍼부었다.
“커억… 큭! 크윽…….”
놈은 다른 동료들이 뛰어들기를 바라며 버티고 버텼다. 허리를 붙잡고 있는 놈이 보기에도 눈물겨운 광경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 정도 노력이면 충분히 동빈을 잡을 수 있다고 느꼈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팔을 잡고 늘어지는 놈의 상태가 이상했다.
퍽퍽퍽퍽.
“쿨럭…….”
놈의 입에서 진한 피가 역류했다. 동빈의 엄청난 공격을 고스란히 맞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정신력은 뛰어났으나 몸이 버티질 못한 것이다.
“뭐, 뭐야, 씨발…….”
허리를 붙잡고 있는 놈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다음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스륵.
허리를 잡고 있던 놈의 팔이 먼저 풀렸다.
펄쩍.
행동이 조금 자유로워진 동빈은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주먹을 번쩍 치켜든 것은 파괴력을 높이려는 행동. 목표는 바로 팔을 붙잡고 있는 놈이었다. 곧 죽어도 팔을 놓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쿠웅!
상당히 묵직한 타격음이 울렸다.
동빈의 주먹이 상대의 등판을 강타했다. 놈의 몸 전체가 흔들릴 만큼 엄청난 충격을 동반한 공격이었다.
스르륵…….
동빈을 잡고 늘어지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러고는 거의 몸이 굳은 상태에서 그대로 처박혔다.
“저, 저, 저, 저 새끼 진짜 괴물이야…….”
동빈의 허리를 잡았던 놈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파괴력! 정말 인간이랑 싸우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가장 가까이서 보았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
동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노려보았을 뿐인데 놈이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이다. 진짜로 다가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부슥.
동빈은 지체 없이 한 걸음 다가섰다.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놈이 조용했다. 큰소리치며 도망치지는 않고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담대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하게 떨리는 다리… 주변의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극한의 공포를 참지 못하고 실례를 범한 것이다.
후웅.
부들부들.
동빈이 주먹을 휘둘러도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바라보았다.
푸악.
“…….”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동빈의 주먹이 닿자마자 기절한 것이 확실했다. 동빈과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놈을 안심하게 만든 건가? 쓰러진 놈들 중 그래도 가장 편안한 표정이었다.
“젠장! 조금만 더 버틸 것이지!”
부웅.
아쉬운 목소리. 그리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렸다.
사사삭.
동빈은 재빨리 몸을 틀어 피했다. 간발의 차이로 무언가 동빈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악.
어디선가 무기 될 것을 구해 온 모양이다. 두꺼운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몽둥이가 눈 속을 파고들었다.
“젠장, 졸라 아깝네…….”
문창준은 빗나간 몽둥이를 눈 속에서 꺼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귀마개를 바로잡으며 동빈을 쳐다보았다.
“김동빈… 소문보다 훨씬 굉장한데?”
“과찬의 말씀.”
“아니야,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사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거든.”
문창준은 상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싸움의 총책임자라는 직분은 잠시 잊은 듯했다.
학생 조직의 못 말리는 싸움꾼이란 별명처럼 동빈과 싸운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이거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나도 칭찬 좀 해 주고 싶지만 네놈들이 워낙 잘한 게 없어놔서… 다른 학생들 돈 뺏고 괴롭히는 걸 칭찬할 수는 없잖아?”
“물론 잘한 일은 아니지.”
“잘한 게 없으면 반성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잖아?”
“마음 약한 새끼나 반성 따위를 하는 거지. 어차피 세상은 힘 가진 놈들의 논리로 움직이는 거야. 우리는 좀 일찍 그것을 깨우쳤을 뿐이야. 내 말이 좀 심했나?”
문창준은 잠시 말을 끊고 동빈의 얼굴을 살폈다. 꽉 다문 입술을 보니 매우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강력한 반발을 예상했지만 동빈의 반응은 의외로 침착했다.
“괜찮아. 별로 심하지 않았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인데?”
“너무 좋아서 그러지.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 세상이란 뜻이잖아? 나도 꽤나 힘이 있고… 반성은 더더욱 안 하거든!”
주춤.
문창준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괜히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인가? 동빈의 눈빛이 변하는 순간, 문창준은 숨이 멈추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 어떻게 하면 그런 무시무시한 표정이 나올까? 조, 졸라 살 떨리는데?”
문창준의 태도는 상당히 언밸런스했다.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대책 없이 떨린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룩이는 입가의 근육.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문창준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 주었는데…….
“진짜 살 떨리게 해 줄까?”
“……!”
이젠 태연한 척 연극을 하지도 못했다.
문창준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까닥까닥.
조심스럽게 흔들리는 문창준의 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온몸을 파고드는 두려움 때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았다.
“이야아!”
문창준은 몽둥이를 하늘 높이 쳐들고 돌진했다.
어색한 고함은 두려움을 떨치려는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동빈은 상대가 가까이 올 동안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스륵.
적당한 순간을 보던 동빈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리 크지는 않은 동작이다. 가볍게 상체를 숙이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리를 재는 듯한 행동에 불과했다.
“뭐, 뭐지?”
문창준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다. 하찮은 손짓에 불과하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앞섰지만 이것이 놈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꾸악.
“……!”
어느새 동빈의 손은 문창준의 목에 닿아 있었다.
언제 이렇게 거리를 좁혔단 말인가? 묵직한 느낌과 함께 목이 죄어 오는 고통이 엄습했다.
“커억!”
목이 꺾인 문창준이 괴로운 신음을 발했다.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고통.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드득.
몽둥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뒤따랐다. 그냥 느낌이 아니라 진짜 손목까지 꺾인 것이다. 동빈의 손은 다시 어깨 쪽으로 이어졌다.
와지끈!
“끄아악!”
문창준의 처절한 비명이 야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엄청난 비명이라 다른 일진들까지 멍할 정도였다.
덜렁덜렁.
목이 돌아가고, 손목이 꺾이고, 어깨까지 탈골된 문창준.
비참한 몰골로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고통이 너무 컸기에 몸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철퍼덕.
놈은 차디찬 눈 속으로 파묻혔다. 잔뜩 부릅뜬 눈은 얼마나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는지 잘 보여 주었다.
정적.
터질 듯한 긴장감이 묻어나는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동빈을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 조직의 못 말리는 싸움꾼이 이처럼 쉽게 당하다니. 놈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너무 쉽게 당한 것도 모자라 철저히 농락까지 당한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했던 것인가?
일진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동빈을 잡겠다는 의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르르.
머릿수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깨달았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꼭 수많은 양들이 늑대를 피해서 뭉치는 모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