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7/224)

시간이 지날수록 눈발이 거세졌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고 치열한 대결이 펼쳐질 장소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키장 인근의 조용한 야산은 하얀 설원으로 변해 버렸다.

“씨발… 눈도 졸라 많이 오네.”

“그러게, 하필 오늘 같은 날 말이야.”

야산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불만을 터트렸다. 긴장된 마음을 욕으로 해소하려는 모습이었다.

“지금 몇 시야?”

장신의 일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약속 시간이 점점 가까이 왔다는 뜻이었다.

“12시 39분… 이제 막 40분 됐다.”

털모자에 귀마개까지 한 학생이 손목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보통의 체구였지만 강원도 부근에선 알아주는 일진이었다.

학생 조직의 못 말리는 싸움꾼 문창준. 이번 싸움의 총책임자나 다름없었다.

“시간 거의 다 됐는데… 이게 전부야?”

장신의 일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예상했던 인원과 많은 차이가 난다는 발언이었다. 척 보기에도 100명이 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이 잡아도 70명 정도였다.

“글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어련히 알아서 나타나겠지.”

“문창준, 글쎄라니? 너 제정신이냐? 이게 얼마나 중요한 싸움인지 알고 있어?”

“짜식. 덩치에 안 맞게 소심한 건 여전하네.”

“소심한 게 아니라 치밀한 거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괴물 김동빈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단 말이지.”

장신의 일진은 전국 연합 경기 북부의 최강자 나한열이었다. 커피숍에서 김동빈을 막아섰던 바로 그놈이었다.

“한열아, 김동빈 새끼가 그렇게 무섭냐? 1명을 상대하면서 이 정도 숫자면 대단한 거야.”

눈앞에 있는 인원은 적은 게 아니었다. 괴물로 소문난 동빈을 상대하기에 부족하다 느끼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일이 틀어지면 곤란하지. 지금이 몇 신데 말이야… 혹시 겁먹고 도망친 거 아니야?”

“걱정 마라. 술 먹고 정신 못 차리는 놈들이 많은 것뿐이다.”

“술? 누가 술 먹으라고 했어? 너 제정신이야!”

나한열의 얼굴은 단번에 일그러졌다.

술 먹고 싸울 상대는 따로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이렇게 심한 줄은 몰랐다는 질책이었다.

“네가 좀 이해해라. 친구들끼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말리냐? 게다가 연말이잖아.”

“누가 술 마신 것 가지고 지랄했어? 먹어도 적당히 처먹어야지.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한 줄 알았던… 저놈의 새끼 봐라!”

나한열의 음성이 점점 높아졌다. 가장 눈에 띄게 피곤해 보이는 놈을 찾아 손짓까지 했는데…….

“우엑!”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나한열에게 지목을 당한 놈의 입에서 뭔가가 용솟음쳤다. 안 보는 것이 나았을 텐데, 괜히 기분만 찜찜해진 것 같았다.

“에이… 더러워서…….”

“저런 몸으로 싸우겠어? 약부터 사 먹여야겠다.”

싸움은 불가능했다. 자기 몸 간수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술기운 때문에 고생하는 놈들이 꽤나 보였다.

“미안하다. 관리가 좀 허술했다.”

“미안하면 다야? 쪽수만 채우는 새끼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유명한 쌈짱들이 안 보이잖아! 태수, 경환이, 진수 다 어디 갔어?”

“그게 좀… 핸드폰 했는데 안 받네. 이놈들도 어젯밤에 엄청 마신 모양이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다 어쨌다나.”

“이게 뭐 하자는 플레이냐? 핵심 멤버까지 빠지면 어떻게 하자고? 넌 김동빈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던?”

나한열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문창준을 바라보았다. 전국 연합과 학생 조직이 힘을 합치기는 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나한열은 덩치에 맞지 않는 꼼꼼한 스타일이었고 문창준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엄청난 쪽수로 이기면 뭐가 남냐? 이기고도 괜히 욕만 먹어. 그냥 적당한 쪽수로 밟아 줘야 의미가 있지.”

“그럼 이 정도 인원이 적은 거냐? 이기려고 작정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이러다 김동빈한테 깨지면 어쩔 거야?”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솔직히 이 정도 인원이면…….”

“저기 누가 온다. 김동빈 아니야!”

“……!”

나한열과 문창준은 말싸움을 중단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래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놈이 김동빈 맞아?”

나한열의 시선은 눈을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한 번도 동빈을 본 적이 없기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가장 최근에 본 적은 있었지만 동빈임을 몰랐던 것이다.

“덩치를 보니 맞는 것 같은데…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 때 본 적이 있거든.”

문창준은 동빈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했다.

상당히 큰 키와 균형 잡힌 체격.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김동빈… 꽤나 낯이 익은데…….”

“뭐야? 한열이, 너도 김동빈을 본 적이 있었냐?”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나한열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얼마 전 커피숍에서 있었던 사건. 조금 있다가 보자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뽀드득뽀드득.

주위에 흩어졌던 일진들이 나한열과 문창준 곁으로 모여들었다. 동빈도 걸음을 재촉하여 일진들과 거리를 좁혀 나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은 동빈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멈추었다.

“실망이야, 생각보다 인원수가 적은데?”

동빈은 대충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엄청난 숫자와 혼자 맞서는 상태였지만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에 못 미친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구라 치기는… 졸라 무섭지, 이 새끼야!”

문창준이 일진 대표로 나섰다. 주먹이 아니라 말싸움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안해서 어쩌지? 난 무섭다는 느낌을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는데? 물론 육체적인 싸움에서 말이지… 시험은 아직도 무서워. 성적표는 완전 공포지.”

“여유 부리시네? 여기 모인 애들이 모두 몇인지 알아?”

“너까지 67명. 저기 뒤에 오는 놈들까지 합치면 71명.”

“…….”

문창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모른다는 대답을 원했는데… 사실은 질문한 당사자도 정확한 숫자를 모르고 있었다. 그랬기에 함부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씨발… 네놈 말처럼 71명이 맞다 치자. 이 정도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지.”

“무서울 것 없으면 덤벼.”

“……!”

오히려 동빈이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문창준의 얼굴엔 경련까지 일어났다.

“귀먹었어? 어서 덤비라니까?”

“씨발… 완전 뭉개 버려!”

우르르.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문창준의 외침과 함께 일진들이 동빈을 향해 뛰어든 것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가운데 본격적인 설원의 대결이 펼쳐졌다.

퍽퍽.

동빈은 천천히 뒷걸음치면서 놈들을 상대했다. 가벼운 주먹을 사용하며 가까운 놈들부터 처리했다. 수북이 쌓인 눈 때문인지 발보다는 주먹 공격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제약은 일진이나 동빈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작용했다. 분명 어느 한편이 이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전혀 달랐다.

“뭐 해, 씨발! 빨리 동빈이 새끼 잡으란 말이야!”

“누가 잡기 싫대! 졸라 발이 무겁잖아!”

놈들의 행동은 안쓰러울 정도로 둔했다.

뛰는 것인지 기는 것인지…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하고 멈춰 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헉헉… 저 새끼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 그러게… 우리는 졸라 힘들어 죽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은 숨까지 헐떡거렸다. 그러나 동빈의 움직임은 처음과 다를 바 없었다. 눈 위를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며 일진들을 공격했다.

푸악!

“크엑…….”

동빈이 물러설 때마다 한 놈씩 차례대로 쓰러졌다. 안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피를 뿌리며 엎어졌다. 하얀 설원이 군데군데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뭐 해, 씨발! 그냥 잡고 늘어져!”

“잡을 수 있어야 늘어질 거 아니야!”

발이 푹푹 빠지는 설원은 머릿수의 이점을 뺏어 갔다. 동빈은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놈들의 기선을 제압했다.

빠각.

엄청난 올려치기가 작렬했다. 턱을 강타당한 놈은 몸이 붕 뜬 상태에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푹신한 눈 덕분에 땅에 떨어질 때의 부상은 없었지만 턱은 완전히 부서졌다.

“씨발, 내가 잡았다!”

“좋아! 계속 잡고 있어!”

한 놈이 동빈의 등 뒤에서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른 놈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풀썩…….

동빈의 중심이 무너졌다.

깊숙이 빠지는 발 때문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몸으로 눌러 버려! 질식시키는 거야!”

부웅.

눈을 헤집고 달리는 것도 힘들었다. 웬만큼 접근하자 놈들은 무작정 몸을 날렸다. 동빈의 빠른 움직임을 봉쇄하겠다는 의도였지만 호락호락 당할 동빈이 아니었다.

푸악!

“켁!”

제일 먼저 뛰어드는 놈을 앞차기로 날려 버렸다. 달려오던 속력이 있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남자의 가장 중요한 급소를 쥐고는 게거품까지 물었다.

빠각.

“커억… 내 얼굴…….”

동빈은 뒤통수로 허리를 잡은 놈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제대로 맞았는지 놈은 얼굴을 감싸 쥐며 쓰러졌다. 동빈의 움직임을 방해했던 팔도 저절로 풀리는 순간이었다.

후앙.

푸악.

동빈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몸이 자유롭게 되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손과 발 그리고 박치기까지 닥치는 대로 퍼부었다. 하얀 눈을 적시는 붉은 핏물을 보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귀여운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러한 시국에 전화라니? 대부분은 그냥 무시하겠지만 동빈의 행동은 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을 받은 것이다.

“여보세요?”

-나다.

“주철이? 일찍 일어났네?”

퍽퍽퍽퍽.

동빈은 싸움을 하면서 통화를 계속했다. 왼손은 핸드폰을 쥐고 있기에 오른손만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석진이 음식 만드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더라. 그런데 벌써 시작한 거냐?

“당연하지. 송년 파티에 늦을 수는 없잖아.”

-절대 늦으면 안 되지. 대충 몇 명이나 나왔는데?

“네 덕분에 많이 수월해졌다. 생각보다 놈들이 적게 나왔어. 정확히 71명 나왔다.”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돼. 그놈들하고 술 먹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당연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주철의 음주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게 아니었다. 머릿수를 줄이고자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주철이 혼자 30명을 감당한 셈이었다. 무력이 아니라 술로써 이루어 낸 엄청난 성공이

었다.

-많이 힘들면 말해라. 이왕 일어났으니 도와줄 의향은 있다.

“난 됐다. 그냥 석진이 음식 만드는 거나 도와줘라.”

-그래, 열심히 싸우고… 조금 있다 보자.

“알았다.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푸악!

동빈의 뒤돌려차기가 작렬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공격의 강도가 달라진 것이다. 하얀 설원은 더욱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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