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빈과 미라는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를 지났다.
그런데 오늘따라 거리의 분위기가 수상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들뜬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더욱더 아니고… 상당히 불량하다는 것이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
이다.
“동빈아, 오늘 무슨 일 있나 보다?”
“그러게…….”
미라는 동빈의 곁에 바싹 붙었다. 동물 병원에서 찾은 아롱이를 품에 안고는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왜 이렇게 무섭니.”
“무, 무섭긴 무섭지…….”
터미널 근처만이 아니었다. 그들만의 특별한 모임이 있는 것인가? 시내 전체에 불량 학생들이 꽉 깔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동빈이가 있으니 안심이다. 듬직하고 믿음직한 모습이 너무나 좋은…….”
미라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의식적으로 얼굴을 감추려 하는 동빈의 행동을 눈치 챈 것이다. 그녀의 눈치가 빠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동빈은 주위의 시선을 한눈에 끌 만큼 어색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저기… 빚쟁이라도 만났어?”
“아, 아니…….”
동빈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대답했다. 불량 학생들의 이목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 어디 아파?”
“조, 조금… 갑자기 두통이…….”
몸이 아프다는 핑계가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동빈은 관자놀이 근처를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안 되겠다. 우리 잠시 쉬었다 가자.”
“아니, 괜찮은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안 괜찮아.”
미라는 동빈의 팔을 끌었다. 그러고는 가장 가까운 커피숍으로 향했다.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쉬었다 가자는 의도였다. 일진들의 눈을 피할 수 있기에 동빈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마지못한 척 미라를 따랐다.
딸랑딸랑.
동빈과 미라가 들어서자 방울 소리가 울렸다.
손님이 왔다는 뜻이지만 반색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따가운 시선들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도, 동빈아, 우리… 어떻게 할까?”
“…….”
커피숍 내부의 분위기는 더욱 심각했다. 불량 학생들의 아지트를 방문한 것인가? 거의 모든 테이블을 일진들이 점거한 상태였다. 몇 개의 자리가 있지만 이런 분위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도, 동빈아, 우리 그냥 나가는 게 좋겠다. 그지?”
그녀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특수부대원이 있어도 소용없었다. 동빈은 이미 뒤돌아선 상태였다. 아래로 내린 손을 심하게 흔들면서 빨리 나가자는 동작을 반복했다.
“잘 생각했다. 미라야, 빨리 나가자. 빨리.”
“그, 그래…….”
미라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무기력한 동빈의 모습 때문이었다. 특수부대 군인이 고등학생들에게 겁먹은 행동을 보이다니…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아무런 시비가 없는 것에 감사하려 했는데, 바로 그 순간이다.
“저 새끼 완전히 쫀 거 같은데?”
“저런 남자와 같이 다니는 여자가 더 불쌍하다.”
멈칫.
놈들은 험한 말을 마구 쏟아 냈다. 자기들 세상이라고 판단했는지 주위의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동빈의 발길이 주춤하는 순간이었다.
“씨발… 귀는 밝은가 보네? 꼴에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지?”
“자존심은 무슨…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야. 여자가 참으라고 하면 못 이기는 척하고 나가려는 수작이지. 속으로는 졸라 떨고 있을걸?”
꿈틀.
동빈도 남자인 이상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절로 주먹이 쥐이고 눈가 주름이 솟았다. 대충 보니 20명 정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숫자였다.
“도, 동빈아. 그냥 가자.”
“거봐. 여자가 끌면 못 이기는 척 나간다니까?”
‘진짜 미치겠네…….’
진퇴양난에 빠진 동빈은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라는 밖으로 나가자며 성화였고 불량 학생들은 계속 시비를 걸어왔다. 놈들을 해치우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만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미라야, 미안하지만 먼저 밖에 나가 있을래?”
“…….”
동빈은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며 말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보아 뭔가를 결심한 것 같았다.
“괜찮아. 먼저 나가 있어. 곧 뒤따라갈게.”
“저, 정말 괜찮겠어? 혹시 싸우려는 거 아니야?”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자 미라는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동빈이 다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싸우긴…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
“화장실은 밖에 있는데?”
“난 안에 있는 화장실 쓰고 싶어. 부탁이니까 먼저 나가 있어.
“아, 알았어. 빠, 빨리 나와야 돼.”
미라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섰다. 불량 학생들의 예상이 정확히 빗나간 것이다.
푸욱.
동빈은 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모자를 눌러썼다. 그러고는 커피숍 중앙을 향해 걸었다. 화장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놈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했는지 커피숍 내부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뚜벅뚜벅.
동빈의 발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불량 학생들은 동빈의 대담한 행동에 주춤한 모습이었다.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았다.
끼끼긱…….
한 놈이 의자를 뒤로 빼며 몸을 일으켰다.
농구나 배구 선수인가? 동빈보다 신장이 컸다. 거뜬히 190은 넘어 보였고 체구 또한 상당했다.
“화장실은 저쪽인데?”
장신의 일진은 동빈의 길을 막으며 거들먹거렸다. 까불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동빈에게 통할 리 없었다.
“나도 알고 있어. 화장실이 아니라 네놈들한테 볼일 있거든.”
“……!”
놈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너무나 당당한 동빈의 태도에 압도된 느낌이었다.
“나한테 불만 있는 놈들은 빨리 덤벼. 밖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거든.”
“이 개새끼가 미쳤구나!”
“졸라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동빈의 도발에 몇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싸움이 대판 벌어질 위기였지만 장신의 일진이 끼어들었다.
“그만들 해!”
“…….”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놈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당당한 체격만큼이나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오늘 중요한 일이 뭔지 까먹었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운 뺄 필요 없잖아.”
“하지만 저 새끼를 가만 놔두면…….”
“아가리 닥쳐.”
“…….”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커피숍에 정적이 감돌았다. 일진들 세계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놈이 분명했다.
“너, 운 좋은지 알고 꺼져.”
놈은 동빈과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괜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희들이 운이 좋은 거야.”
“오래 살고 싶으면 그만 나불거려. 급한 일이 끝나면 네놈 찾으러 다닐지 모르니까.”
원만하게 흐르던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동빈과 장신의 일진이 치열한 눈싸움을 벌였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난무할 기색이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딸랑딸랑.
“동빈아, 왜 이렇게 안 나와?”
먼저 밖으로 나갔던 미라가 들어왔다. 동빈이 걱정되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 됐어. 지금 나간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무력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동빈은 눈싸움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장신의 일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금 있다 보자고.”
“……?”
놈은 동빈의 말뜻을 이해 못 했다. 게다가 장난도 아닌 것 같았다. 놈이 무슨 뜻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동빈은 추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라를 향해 다가갔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들어왔어?”
“그게… 눈이 오더라고…….”
“눈?”
“엄청 많이 와. 그거 알려 주려고 올라왔어.”
때마침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렸다. 그녀는 갑자기 쏟아지는 눈을 변명거리로 삼은 것이다.
“정말이네? 안에서는 안 보였는데 정말 엄청 온다.”
밖으로 나오자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좀 전의 불량스럽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 눈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꽤나 많은 양이 내리고 있었다. 동빈은 일진들과의 대결을 이 하얀 눈을 맞으며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자 왠지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