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5/224)

하얀 설원이 붉게 물들면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새해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시간.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올해는 동빈에게 매우 뜻 깊은 해였다. 얼마나 사회에 적응했는지는 모르지만,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민간인으로서 거듭난 것이다.

쾅쾅쾅쾅.

“문 열어∼. 딸꾹!”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주철이 출입문을 두드리며 목청을 높였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보아, 거나하게 취한 것이 분명했다. 어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쾅쾅쾅쾅.

“우이… 씨! 빨리 문 열어!”

“지금 나가니까, 그만 좀 두드려!”

석진의 목소리에 주철이 잠잠해졌다. 석진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출입문이 열렸다.

털컹.

“어우∼. 술 냄새.”

문을 열자마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석진은 손까지 내저으며 난리를 쳤다.

“누, 누구니… 동빈이냐… 석진이냐…….”

이 정도면 거의 혼수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동빈과 석진을 구별 못 한단 말인가! 펜션을 찾아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주철아, 춥다. 빨리 들어가자.”

“우와와와. 천장이… 빙빙 돈다.”

석진은 주철을 부축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술 취한 사람을 옮기는 것은 무척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석진은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원체 성격이 좋은 탓도 있지만 주철이 왜 술을 마셨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빈아, 이불 깔았어?”

“응, 이쪽으로 데려와.”

석진은 온돌방 있는 곳으로 주철을 데려갔다. 동빈은 이불을 깔아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함 때문인지 빈 깡통까지 준비했다. 구토를 대비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딸꾹! 우와… 피곤하다.”

풀썩…….

주철은 이불을 보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부축하고 있던 석진이 만류할 시간도 없었다.

쿠웅!

“아이고… 머리야…….”

주철은 이내 머리를 부여잡았다. 방이 바뀐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침대라고 생각하고 쓰러졌으니…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술기운 때문에 큰 고통은 못 느끼는 것이었다.

“주철아, 머리 괜찮냐?”

“치… 치… 침대가 없어졌어…….”

술기운에 머리까지 부딪친 주철. 아직도 방이 바뀐 것을 깨닫지 못하고, 침대가 없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빈은 다시 한 번 주철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주, 주철아, 머리 괜찮냐고.”

“침대… 침대… 누가 내 침대… 가져갔어…….”

사실대로 말해도 소용없었다. 주철은 쏟아지는 잠을 쫓아가며 침대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걱정 말고 자라. 침대는 옆방에 있어.”

“도, 동빈아…….”

주철은 차분한 목소리로 동빈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야 말이 통한 것인가? 아니다. 도저히 잠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꿈나라로 향할 운명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

동빈은 주철의 입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주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기 때문이다. 꿈나라로 가기 전에 남길 말이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도, 동빈아…….”

“어서 말하고 푹 자라. 응?”

“침대… 내 침대 찾아와…….”

풀썩.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주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깊고 깊은 잠에 빠져 든 것이다. 주량을 한참이나 초과했기에 하루 종일 뻗을 것이 분명했다.

“석진아, 이놈 괜찮을까? 엄청 마신 것 같은데?”

“괜찮을 거야. 자기 몸 관리 하나는 확실한 놈이니까.”

“그러면 다행이고… 이놈 푹 자게 우리도 일어나자.”

“알았다.”

동빈과 석진은 조용조용 방에서 나왔다. 주철이 완전히 곯아떨어져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동빈아, 그놈들하고 붙는 게 몇 시지?”

“오후 1시.”

그놈들이란 스키장으로 쳐들어온 일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이었다.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 테니까, 든든하게 먹고 가라.”

석진은 주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체력 보충을 위해 뭔가를 해 주겠다는 뜻이었지만 동빈은 그리 반색하지 않았다.

“저기… 아침 먹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먹어?”

동빈이 많이 먹긴 했지만 하루 세 끼에 국한된 일이었다. 석진의 성의가 고맙기는 했지만 동빈의 위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무슨 소리야? 많이 먹어야 힘을 쓰지!”

먹는 것과 관련되면 석진의 생각도 단순해졌다. 잘 먹어야 잘 싸운다는 이상한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렇기에 장까지 봐 가며 특별 음식을 준비했던 것이다.

“작전… 아니, 싸움을 하기 전에 과식은 금물이지. 몸이 무거우면 움직이기 불편하거든.”

“그러냐? 음식이 많이 남겠는데…….”

“오늘 밤 파티를 할 때 쓰면 되잖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여기서 한다며?”

“그러지 뭐…….”

오늘은 12월 31일. 일진과의 싸움뿐 아니라 미라 일행들과의 송년 파티도 예정되어 있었다.

“동빈아, 그럼 따듯한 차나 마실까?”

“좋지. 난 녹차.”

석진은 물 끓일 준비를 했고 동빈은 식탁에 앉았다. 차나 마시면서 일진과의 대결을 기다리려 했는데…….

딩동딩동.

물이 다 끓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석진은 녹차를 타야 했기에 식탁에 있던 동빈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누구?”

“나야, 동빈아.”

미라의 음성이었다. 동빈은 지체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덜컹.

끼이익…….

“오랜만이다, 미라야.”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스키장에 놀러 온 애가 뭐 이리 바

쁘니?”

“일이 좀 그렇게 됐다.”

동빈은 여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일진 잡으러 다니기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보게 된 것도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저기 말이야, 나 좀 들어가도 돼? 추워 죽겠다.”

“아! 미안…….”

동빈은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손님을 너무 오래 밖에다 세워 놓은 것이다. 미라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석진아, 안녕.”

“안녕. 너도 녹차 마실래?”

“아니야, 난 방금 마시고 왔어.”

미라는 석진과 인사를 나누며 식탁에 앉았다. 동빈도 그녀와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참, 주철이는 들어왔니?”

“응, 저 방에서 자고 있어.”

“어제 과음할 거라고 했는데, 정말 술을 많이 마셨나 보네? 여기서도 술 냄새가 난다.”

“그렇게 됐다.”

동빈과 미라는 오붓한 대화를 나눴다. 석진은 동빈의 녹차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동빈아, 오늘 밤은 같이 지낼 수 있는 거야?”

“……!”

어째 어감이 이상했다. 동빈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순진하긴… 송년 파티 말이야. 너한테는 농담도 함부로 못 하겠다. 이번에도 바쁘다며 혼자 사라지는 건 아니지?”

“다, 당연하지.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날이잖아.”

동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자와의 대화는 아직도 어려웠다. 예전처럼 주눅이 들진 않았지만 주도권을 가지고 이끌지는 못했다.

“오늘 정말 기대된다. 정말 재미있겠다. 그지?”

“그, 글쎄… 차라리 스키장에서 하는 이벤트에 참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유명 가수도 나오고 횃불 스키에 불꽃놀이도 한대.”

“작년에 다 본 거야. 우리끼리 조촐히 파티를 하는 게 훨씬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동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자가 좋다고 하는데 반발할 이유가 없었다. 일진들과 싸움을 끝내고 곧바로 달려와야 했다.

이번에는 머릿수가 많아서 문제였다.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었고, 부상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빈아, 뭘 그리 생각해?”

“아, 아니야…….”

대화를 하다가 딴생각에 빠지는 일도 여전했다. 동빈이 정신을 차리자 미라가 바짝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너… 여자 생각 했지? 오후에 누구 만난다고 했잖아? 도대체 어떤 여자가 동빈의 마음을 뺏어 간 것일까?”

미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거든. 그것도 떼거지로 말이야…….”

“……?”

동빈은 함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이와 직업을 빼고는 대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했다. 미라가 이해를 못 하는 게 흠이었다.

“미라야 신경 쓰지 마. 오늘은 늦지 않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참! 동빈아, 지금 시간 되니?”

“지금?”

“응.”

미라가 분위기를 바꾸며 물었다. 그녀가 찾아온 진짜 이유를 꺼내려는 모양이었다.

“2시간 정도는 될 것도 같은데?”

“잘됐다. 그러면 나와 시내 좀 같이 가자. 아롱이 데려와야 하는데 혼자 가기 심심해.”

“뭐 어려운 일도 아니네. 그래 같이 가자.”

동빈은 흔쾌히 승낙했다. 오후 1시까지 약속된 장소로 가는 게 중요했다. 숙소에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밖에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좋아,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나와.”

승낙을 받은 미라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동빈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일을 빨리 진행하려는 의도였다.

“그래. 먼저 나가 있어. 5분쯤 시간이 걸릴 거야.”

동빈은 그녀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그냥 외투만 걸치면 외출 준비가 끝나지만 오늘은 따로 준비할 것이 있었다.

부석부석.

동빈은 미라를 보내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열심히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다.

“곧장 그쪽으로 갈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으니까…….”

동빈은 짐을 챙기며 대답했다. 석진이 말한 그곳이 어디인지는 뻔했다.

“제발 조심해라.”

“무슨 소리! 내가 그런 놈들한테 당할 것 같아?”

동빈은 초조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싸움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응이었다.

“파티 있으니까 늦지 말고…….”

“당연하지. 석진이가 만든 음식 먹으려면 최대한 빨리 와야지.”

짐을 꾸린 동빈은 가방을 메고 일어섰다. 단순한 외출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 표정이었다.

“무사히 갔다 와라.”

“그래, 주철이 깨어나면 전화해라.”

“싸움 중에 전화 받게?”

“내가 그런 거 가리는 거 봤어?”

피식.

불안감이 가득했던 석진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괴물 김동빈.

바로 눈앞에 있는 친구는 머릿수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음식 만드는 거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

동빈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섰다.

자신의 싸움보다는 많은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석진이 더 걱정이라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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