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70/224)

사단장의 등장으로 식사는 대충 끝나 버렸다.

식탁 위의 음식은 모두 치워지고 대신 커피와 과일이 등장했다. 동빈 일행과 미라 일행이 마주 보고 자리했고 상석에는 사단장이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커피 맛이 괜찮군.”

“…….”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장군의 첫마디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바늘방석에 앉은 느낌이 이러할까? 동빈 일행이나 미라 일행 모두 불안한 얼굴이었다.

“가영아.”

“네, 아빠.”

사단장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어제 또 다른 친구가 있다고 했었는데… 저 친구들을 말한 것이냐?”

“네…….”

어제 점심을 먹고 그녀들이 찾은 곳이 바로 윤가영의 집이었다. 사단장은 잠시 딸의 얼굴을 보러 왔다가 동빈 일행과 마주친 것이다. 남자라고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가영이하고 어떤 사인가?”

사단장은 동빈을 향해 직접 질문을 던졌다.

“별다른 사이 아닙니다. 제가 윤가영의 친구인 정미라의 개를 구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함께 스키 타고 식사 정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 이름은 뭔가?”

“네, 김동빈입니다.”

“김동빈?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데?”

사단장은 동빈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이미 처음부터 3명의 남자 중에 유독 동빈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단장이었다.

“저도 낯이 익습니다.”

“그래? 우리가 어디서 봤을까?”

“저희 아버지와 함께 뵌 적이 있을 겁니다.”

“자네 아버님 존함이 어떻게 되나?”

“잠시…….”

동빈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사단장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귓속말을 하겠다는 뜻을 보이자 사단장도 흔쾌히 귀를 빌려 주었다.

“……!”

동빈의 몇 마디에 사단장의 눈이 금방 커졌다. 처음에는 놀라움 그리고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이어졌다.

“그렇군. 자네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나중에 아버님을 뵙거든 내 안부 좀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빈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조금 나아진 모습이라 모두가 안도하는 상황이었다.

“듬직한 사람이 옆에 있으니… 이만 떠나도 되겠군.”

벌떡.

사단장은 동빈이 앉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아빠. 벌써 가시게요?”

“괜찮다. 기분이 상해서 가려는 게 아니다.”

“…….”

사단장은 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안심시켰다. 빈말은 아닌지 노여움보다는 인자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나오지 않아도 된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들러라.”

“네, 아빠.”

“참, 동빈 군이 나 좀 배웅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사단장님.”

동빈은 사단장의 요청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따로 할 말이 있다는 뜻이 분명했기에 사단장을 따라 출입문을 나섰다.

쿵.

출입문이 닫히자 방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게 웬일이니?”

“그러게? 엄청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너희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도 있고…….”

“나, 나도 좀 뜻밖이야.”

오지혜, 정미라, 윤가영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별일도 아니건만 십년감수했다는 말투였다.

“뭐야? 사단장이라 해서 괜히 쫄았잖아! 너희 아버지 원래 관대한 분 아니셨어?”

“무슨 소리야? 주철이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얘네 아버지가 얼마나 엄격하신 분인지 알아? 특히 남자들에게는 더해. 저번에는 그냥 식당에서 밥 먹는 게 걸렸는데, 그 남자들은 진짜 반쯤 죽었어. 솔직히 여기에 오면 가영이 아버님 때문에 남자들 사귀기 힘들거든.”

“그럼 우리는 뭐냐?”

“……!”

“…실험용이었냐?”

“…….”

정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계속 말해 봤자 의심만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간.

사단장과 동빈은 나란히 걸었다.

펜션 입구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까지 함께했지만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어때, 사회생활은 할 만한가?”

사단장이 걷는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동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신분임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습니다.”

“자네는 잘 해낼 거야. 명색이 국가에서 키운 비밀 코드 아닌가?”

“군대에서 배운 것하고 사회는 많이 다릅니다.”

“벌써 그걸 느꼈다면 성공한 셈 아닌가?”

“그런가요?”

선문답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경사진 도로를 중간쯤 내려가자 사단장이 타고 왔던 차량이 보였다.

사단장은 걸음을 멈추고 동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입을 열었다.

“자네와 함께 있으니 딸의 안전은 걱정 없겠지. 아무쪼록 재미있게 놀다 가게나.”

“감사합니다.”

동빈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사단장은 동빈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없겠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기태 놈 말이야. 내가 근무하는 지역으로 놀러 온다고 하더니, 여태껏 한 번도 오지 않더라고. 이번에 왔으면 참 잘해 줬을 텐데…….”

사단장은 장군의 친아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듯했다. 아쉬워하는 표정에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불편한 사항이 있는데… 사단장님이 해결해 주시겠습니까?”

“아무렴, 무엇이든 말해 보게.”

사단장은 흔쾌하게 승낙했다. 장군의 친아들에게 하지 못했던 것을 동빈에게 베풀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강원도 일대를 휩쓸고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사단장님께서 좋은 방법 좀 알려 주십시오.”

“아주 손쉬운 방법이 있지. 내 차를 쓰게나. 군용이 아닌 개인 차량과 운전기사를 붙여 줄 테니 부담은 갖지 말게나.”

“감사합니다, 사단장님. 그런데… 강원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는 이유를 왜 묻지 않으십니까?”

“남의 작전에 함부로 끼어드는 군인 봤나?”

사단장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동빈도 알지 못했다. 그냥 고마울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어서 들어가게나. 난 서둘러 가야겠네.”

사단장은 지체 없이 군용차량에 올랐다. 그러고는 운전기사에게 가벼운 고갯짓을 보냈다.

부르릉.

군용차량이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 급한 일이 있는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동빈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약속대로 사단장의 승용차가 도착했다.

동빈의 기동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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