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는 10명은 너끈하게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이 있었다.
석진은 인원수대로 밥과 국을 준비했다. 여자들은 이미 일렬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이야∼. 진짜 맛있겠다!”
주철이 주방으로 들어서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생각보다 푸짐한 음식이 차려졌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씻고 준비하는 시간 동안 석진이 추가적인 요리를 만든 것이다.
“주철아, 어제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몸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주철은 자리에 앉으면서 호기롭게 대답했다. 여유 있는 웃음을 보이고 있지만 속이 쓰려 미칠 것 같았다. 얼큰한 찌개로 절로 손이 움직였다.
“우와! 진짜 맛이다!”
정말 맛있긴 맛있는 모양이다. 염세주의자나 다름없는 주철이 칭찬을 다 하니 말이다.
“우리도 석진이 음식 솜씨에 깜짝 놀랐다니까? 대학보다는 요리사로 나가는 게 훨씬 낫겠더라.”
“아니야, 이놈은 음식보다는 공부에 더 소질이 있지. 그런데 맛있긴 진짜 맛있다.”
우여곡절 끝에 풍요로운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배가 고팠는지 대부분 대화보다는 먹는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주철아, 무슨 일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많이 마시긴…….”
“무슨 소리야? 거의 혼자서 마셨잖아.”
무료함을 느꼈는지 미라가 질문을 던졌다. 여자들이 보기에도 주철이 꽤나 마셨던 모양이다.
“그냥… 몸은 피곤한데 잠이 좀 안 오잖아. 깊게 자고 싶어서 술을 좀 한 거야.”
주철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럴듯한 내용이었지만 주철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무리하게 술을 마신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동빈이 놈… 어제 아주 신났지…….’
솔직히 어젯밤 주철은 찬밥 신세나 다름없었다. 모든 여자들이 동빈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인 것이다. 따돌림당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주철에게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술로 위로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몇 시까지 논 거냐?”
홧김에 술을 너무 마신 주철은 중간에 뻗고 말았다. 동빈과 여자들이 즐겁게 웃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글쎄… 3시는 넘은 것 같은데?”
“뭐라고? 그때까지 동빈이랑 이야기한 거야?”
“응.”
“정말 대단하다. 동빈이 군대 얘기 지겹지도 않던?”
“아니, 우린 재미만 있던데?”
“…….”
재미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주철은 조용히 숟갈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소화불량인가? 배가 더부룩하고 답답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였다.
“참, 동빈이는 어디 있어?”
“……!”
미라의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가 식사를 중지했다.
뭔가 허전하다 싶었더니… 동빈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어라? 이놈 진짜 어디로 간 거야?”
주철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밥 먹을 때 보이지 않다니? 이런 경우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석진아,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일어났을 때도 없었는데?”
제일 먼저 일어났던 석진도 동빈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가출(?)이라도 한 것인가? 여자들은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철아, 어디 갔는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뭐 하러?”
주철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다. 기르던 개가 사라졌어도 이렇게 무심하진 않을 것이다.
“동빈이 빼고 우리끼리 밥 먹는 것도 그렇고…….”
“걱정 마. 그놈은 절대 양반이 못 되니까. 그리고 석진이 못지않게 먹는 것에 상당히 집착하거든.”
“……?”
여자들은 주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철이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까지 했는데…….
덜컹.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동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이렇게 맛있는 냄새의 정체는!”
주방에서 일부러 부를 필요가 없었다. 매콤한 향기에 이끌린 동빈이 자기 발로 찾아온 것이다.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몸이 뻐근해서 운동 좀 했지. 여기 시원한 약수도 떠 왔다.”
동빈의 양손에는 커다란 물통이 각각 들려 있었다. 석유를 담을 때 쓰는 통처럼 꽤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가는 통이었다.
“이 근처에는 약수터가 없는데?”
윤가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그녀였기에 반박을 하는 것이었다.
“관리인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좋은 곳을 가르쳐 주더라고. 상당히 유명한 곳이라고 하시던데?”
“혹시, 군사 보호 지역 근처를 말하는 거야? 굉장히 험한 산을 넘어야 나오는 약수터 말이야?”
“그럴걸? 험하긴 조금 험하더라고.”
“말도 안 돼… 거기는 산을 잘 타는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는 곳이란 말이야. 아마 왕복 3시간도 넘게 걸릴걸? 너무 힘들어서 완전히 녹초가 되는 곳인데…….”
“그런가? 어쨌거나 잘 마셔라. 몸에 좋다고 하더라.”
쿵, 쿵.
동빈은 냉장고 옆에 물통을 내려놓았다.
묵직한 소리가 말해 주듯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게다가 하나도 아닌 두 통이었다.
“도, 동빈아… 고마워…….”
“뭘… 이까짓 거 가지고…….”
여자들은 매우 반색했다. 아니, 감동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서 그 험한 곳까지 직접 갔다 왔으니… 동빈의 정성에 매우 감복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를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철이었다.
“야, 야, 야, 이거 너무하잖아!”
“뭐, 뭐가?”
주철은 못마땅하게 동빈을 쏘아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동빈은 당혹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배신자… 우정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냐?”
“무슨 소리? 내가 왜 배신자야?”
“네놈이 철저한 왕따일 때 도와준 게 누구더냐? 바로 나하고 석진이 아니었냐? 여자한테 인기 좀 있다고 괄시하다니…….”
“무슨 소리냐고. 내가 언제 너희들을 괄시했다고 그래?”
동빈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배신자도 모자라 괄시라니? 동빈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친구를 무시했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야, 야, 야! 지금 여자들의 건강만 챙겨 주고 있잖아. 그렇게 좋은 약수면 우리도 한번 먹어 보자고!”
“난 또…….”
동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까짓 약수 때문에 사랑과 우정, 심지어 배신자와 괄시까지 운운한 것인가? 너무나 하찮은 이유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웃지 마. 이건 매우 심각한 사항. 두 통을 떠 왔으면 한 통씩 나누면 되잖아? 몽땅 여기로 가져오다니 말이야. 나하고 석진이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소리 아니야?”
“주철아, 아니거든.”
“뭐가 아니야? 두 통 다 여자들 줬잖아?”
“내가 좀 많이 떠 왔거든? 우리 숙소에도 두 통 갖다 놨으니까, 실컷 마셔라.”
“뭐, 뭐라고?”
주철은 중요한 내용을 잊고 있었다.
동빈을 일반 사람하고 똑같이 취급했다니… 괴물 중의 괴물이 바로 동빈이었다.
“너 몇 통이나 떠 온 거냐?”
이제야 제대로 된 질문이 나왔다. 주철은 총 네 통이라고 한정 짓지 않았다.
“여섯 통. 관리인 아저씨도 두 통 드렸지. 약수터도 가르쳐 주시고 물통하고 지게도 빌려 주셨거든. 엄청 기뻐하시더라고.”
주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엄청난 무게의 물통을 한꺼번에 여섯 개나 운반한다? 그것도 엄청 험한 산을 넘어서? 주철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히려 이상한 분위기가 되었다. 여자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짐작을 못 하는 표정이었다.
“동빈아, 밥 안 먹어?”
“맞다. 내가 무척 배가 고팠지!”
매우 어색한 분위기에서 석진이 나섰다. 밥 먹는 것조차 까먹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동빈아, 이쪽으로 앉아.”
“땡큐.”
미라는 자신의 옆 자리를 권했다. 흔쾌히 자리에 앉은 동빈은 열심히 음식을 탐했다.
“우와, 진짜 맛있다.”
밥이 없었으면 어땠을지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동빈의 먹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약간은 추한 장면이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느낌이 다른 모양이었다.
“어쩜, 이렇게 먹는 모습도 믿음직할까?”
“맞아, 남자라면 동빈이처럼 터프한 면이 있어야지.”
‘터, 터프! 저게 터프야?’
또 주철의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밥만 먹으려 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어제 동빈이 보니까, 보드도 엄청 잘 타더라. 요즘 스키부대는 보드도 배우나 봐?”
“나도 봤는데, 너무 멋있더라. 나 좀 가르쳐 줄래?”
동빈이 스키가 아닌 보드를 탔다? 물론 아무도 모르는 주철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이놈이 언제 보드를 배웠지? 진짜 천재인가?’
주철은 동빈의 스키 실력이 두려워 보드를 강요했었다. 그러나 엄청난 동빈의 보드 실력 때문에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뭐를 해도 자세가 나오는 동빈이라 스키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주철의 괜한 심술은 시도 때도 없이 본색을 드러냈다.
“야, 야, 야, 조용히 밥 먹자!”
“어머, 깜짝이야. 갑자기 왜 이래? 밥풀까지 튀고…….”
오지혜는 뚱한 표정으로 주철을 바라보았다. 심통 난 행동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철은 오히려 적반하장의 행동을 보였다.
“좀 건설적인 대화를 하란 말이야. 아무리 놀러 왔어도 말이지… 미래에 대한 설계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건설적인 대화! 얼마나 좋아, 응?”
“건설? 나 언제 과외 소개해 줄 거야? 남자는 한 입 가지고 두말하지 않는다며?”
“에이…….”
주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어디서 과외 할 학생을 찾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딩동딩동.
오호! 하늘은 주철을 버리지 않았다.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출입문으로 쏠렸다.
“누굴까?”
오지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히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나갈게.”
동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잡스러운 심부름을 꽤나 잘하는 편이었다. 어찌 보면 즐긴다고도 할 수 있었다.
“누구십니까?”
“…….”
불러도 대답이 없다. 상대가 못 들을 수도 있기에 동빈은 더욱더 목청을 높였다.
“누구세요!”
“…….”
상당히 큰 소리였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출입문에 도착한 동빈은 무작정 손잡이를 잡았다. 직접 열고 확인해 볼 셈이었다. 떼강도가 들어도 전혀 두렵지 않은 동빈이기에 아무 스스럼없이 문을 열었다.
덜컹.
끼이익.
“누구신데…….”
동빈은 반쯤 문을 열고서 고개를 내밀었다. 중년의 신사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자네는 누구지?”
중연 신사도 동빈의 모습이 뜻밖인 모습이다. 이마에 주름이 간 상태에서 신분을 물어 왔다.
“저는 김동빈인데요. 아저씨는 누구신지…….”
“혹시 가영이 친군가?”
“네… 그런데요. 누, 누구신지 말씀을 하셔야…….”
“난 가영이 아비 되는 사람이다.”
“……!”
어째 일이 꼬인 것 같다.
윤가영의 아버지라면 사단장 아니던가! 동빈은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사단장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가영이는 안에 있나?”
“네, 지금 밥 먹고 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데… 좀 들어가도 되겠나?”
“죄,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동빈은 서둘러 출입문을 활짝 열었고 사단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디가 주방이지?”
“저, 저쪽입니다.”
동빈은 사단장을 주방으로 안내했다. 갑작스러운 사단장의 등장에 식탁에 모여 있던 나머지 일행들은 넋이 나간 듯 멀뚱히 눈만 끔뻑거렸다. 물론 화기애애했던 식사 시간도 그대로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