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8/224)

괴물 출현

맑은 공기를 자랑하는 강원도의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세찬 바람은 불지 않았다. 몸으로 느껴지는 온도는 어제보다 따듯했고, 상쾌하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아침이었다.

여자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

아침 먹을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밤늦게까지 신나게 놀았기 때문이다.

곳곳에 널려 있는 술병들의 개수가 만만치 않았다. 장시간 여행을 하고 스키까지 탔으니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거기에 알코올의 기운까지 더해졌으니… 이러한 늦잠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부스럭…….

인기척과 함께 작은방 문이 열렸다.

동빈 일행도 이곳에서 잔 모양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사람은 석진이었다.

주섬주섬 거실로 걸어 나온 석진은 벽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이… 도대체 몇 시야…….”

안경을 쓰지 않았기에 정확한 시간을 볼 수 없었다. 최대한 시계에 가까이 가서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우씨… 아침 시간 지났잖아.”

지나도 한참 지났다. 11시가 넘었으니 점심때라고 우길 수도 있었다. 석진은 조용히 부엌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좋아! 무엇을 만들어 먹을까…….”

털컹.

석진은 먹을 것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기대에 부푼 표정으로 서둘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진짜 심하다. 여자들 살림이 왜 이래…….”

냉장고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 흔한 계란 아니, 먹을 것이란 존재 자체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제 마시고 남은 병맥주 몇 병이 고작이었다.

“으윽… 술만 봐도 속이 느글거린다.”

미련을 갖지 말고 도로 닫아야 마땅했다.

쿵!

딸랑딸랑.

석진은 세차게 냉장고 문을 닫았고, 맥주병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할 수 없지… 우리 방에서 공수해 와야겠다.”

석진은 출입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서 재료를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후웅.

“에이… 추워!”

문을 열자마자 찬 기운이 들이닥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총총총총.

석진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내달렸다. 옷을 얇게 입어 훨씬 춥게 느껴졌지만, 아침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잠시 후.

재료를 다듬는 요란한 소리가 끝나고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석진이 간만에 음식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밥은 다 되어 보온 상태로 넘어간 지 오래였고, 먹음직스러운 김치찌개는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어디 맛 좀 볼까…….”

스륵.

석진은 김치찌개를 한술 떴다. 그러고는 후후 불어 대면서 입 안으로 가져갔다.

꿀꺽.

“으음∼. 괜찮아. 괜찮아. 아주 괜찮아!”

몸서리치면서 좋아라 하는 석진!

자기의 음식 솜씨에 대단히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실력이라는 자평이었다.

“얘들아, 일어나라. 아침은 먹어야지!”

“…….”

방문을 향해 소리쳤지만 역시나 반응은 없었다.

“어서 일어나! 벌써 점심때가 다 됐다니까!”

“어머… 석진이 벌써 일어났어……?”

윤가영이 반쯤 눈이 감긴 상태로 걸어 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듯한 모습이었지만 이내 번쩍 눈이 떠졌다.

“뭐, 뭐니… 이 맛있는 냄새는!”

군침이 절로 넘어갈 정도의 매콤한 향기였다. 가스렌지 위에서 끓고 있는 김치찌개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어졌다.

“진짜 맛있겠다! 어디 한번…….”

후룩.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술 떠서 맛을 음미했다. 정상을 회복했던 눈이 더욱 크게 떠지는 순간이었다.

“이거 진짜 네가 한 거야?”

“당연하지. 그럼 누가 했겠냐?”

윤가영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늦게 일어나 아부를 떠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를 닮았는지 석진의 음식 솜씨는 상당했다.

“너무 맛있다. 대체 뭘 넣었기에 이런 맛이 나는 거야?”

“쯧쯧쯧… 그야 당연히 손맛이지. 그건 그렇고 말이야, 뭔 여자들이 이렇게 게으르냐? 아침밥도 안 하고!”

“게으르긴… 밖에 나오면 음식은 남자들이 하는 거야.”

“그, 그런 거야?”

석진은 잠시 주춤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3살이란 나이 차이가 또다시 부담으로 다가왔다.

“너희도 엠티 가면 남자들이 다 하잖아?”

“에… 엠티?”

“미, 미안… 석진이 넌 대학생이 아니었지.”

삼수를 했다고 한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윤가영은 말실수를 했다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석진으로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한데 다른 애들 좀 깨워 줄래?”

“알았어. 여자들은 내가 깨울게.”

윤가영은 재빨리 방 안으로 뛰어갔다. 무안한 상황을 면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이년들아, 빨리 일어나.”

윤가영은 꼭 닫힌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이… 추워!”

의도는 좋았지만 실속은 없었다. 정미라와 오지혜는 이불을 돌돌 말아 추위 공격을 이겨 냈다.

“이년들아, 빨랑 안 일어나!”

“지금이 몇 신데 깨우고 난리야…….”

예상된 실랑이가 벌어졌다. 윤가영이 이불을 걷어 내려 했지만 그녀들은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이불을 붙잡고 늘어졌다.

“해가 중천이야. 빨리 일어나.”

“싫어… 5분만…….”

“야, 동빈이 일어나기 전에 화장해야지. 정말 맨얼굴 보일 거야?”

“……!”

이제야 잠이 확 깨는 모양이다. 그녀들은 고개를 반짝 치켜들고 자기들끼리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맨얼굴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화장한 상태보다는 아니었다.

파다다닥!

정미라와 오지혜는 거의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침내 화장실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부터는 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분주해졌다.

“주철아, 너도 일어나야지.”

“싫어…….”

이러한 난리 통에도 주철은 잠을 계속 청했다. 석진이 깨우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 몇 신지 알아?”

“그런 넌… 내가 어제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지 알아…….”

주철은 더욱 고개를 파묻었다. 과음을 해서 도저히 일어날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고등학생이 술 마신 게 자랑이냐?”

“야… 야… 야… 지금 나는 대학생이거든.”

“너 지금 당장 안 일어나면…….”

“어쩔 건데… 귀찮게시리…….”

석진이 위협을 해도 소용없었다. 아직도 비몽사몽인 주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석진은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진짜 다 불어 버리는 수가 있어.”

“……!”

이제야 주철의 눈도 원상태를 회복했다. 석진이 무엇을 불겠다는 것인지 파악한 것이다.

“빨리 일어나. 진짜 분다?”

“너, 치사하게…….”

부스슥.

주철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야 했다. 석진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로써 아침밥 먹을 분위기는 어느 정도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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