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필요해
스윽스윽.
전신 거울 앞에 선 동빈은 요리조리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진짜 작업이라도 나서려는 것인가? 머리 정리는 물론이고 옷매무새까지 정성스럽게 손질했다.
“이 정도면 단정하게 보이겠지?”
동빈은 검정색 웃옷에 두꺼운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단정한 것은 기본이고 모델 부럽지 않은 자세가 나왔다. 하늘이 내려 준 체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 야, 야! 아직도 멀었냐?”
문밖에서는 주철의 짜증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빨리 나오지 않는다는 독촉이었다.
“조금만… 거의 다 됐거든.”
동빈은 계속 거울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정도면 친절한… 아니, 멍청해 보이나?”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동빈은 서둘러 표정을 바꿨지만 좀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야! 정말 안 나올래? 아까도 다 됐다고 말했잖아?”
“알았다. 지금 나간다, 나가.”
동빈은 어쩔 수 없이 거울에서 시선을 거뒀다. 중간 크기의 손가방을 집어 들고는 출입문으로 다가섰다.
쿵!
동빈은 지체 없이 출입문을 박차고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잔뜩 인상 구기고 있는 주철과 마주쳤다.
“화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별로 꾸민 것도 없는데 뭐 이리 오래 걸려?”
주철은 불만부터 터트렸다. 꽤나 신경 쓴 동빈의 차림새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어떠냐? 깔끔해 보이냐?”
“너 진짜 바람났냐? 갑자기 외모에 신경을 다 쓰고…….”
주철이 뚱한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동빈은 지금 싸우러 가는 길이었다. 상대에게 잘 보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생각을 조금 바꿨다. 무작정 패지 않고 처음에는 좋게 말로 타일러 보려고.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면 용서해 줘야지.”
“놈들에게 첫인상 좋으라고 꾸민 거냐?”
“당연하지. 괜히 적대적인 느낌부터 심어 줄 필요가 없잖아?”
동빈은 주먹이 앞서는 성격을 고치려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인생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말을 해도 안 되면 어쩔 거야?”
주철의 반문은 매우 당연했다. 말로 해결되면 서로가 좋겠지만, 일진들에게 말귀가 통할 리 만무했다.
“말로 안 되면… 진짜 끝장을 봐야겠지. 여기 갈아입을 옷도 미리 준비했거든.”
동빈은 손가방을 번쩍 치켜들었다. 조만간 피바다가 될 것이라 암시하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그 가방을 열지 않기를 바란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석진이는 어디 갔냐?”
동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철과 함께 먼저 나갔던 석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얼레? 이놈은 또 어디 간 거야? 한 놈 나타나면 한 놈 사라지고… 너희 둘이 짰냐?”
주철도 석진의 행방을 모르는 모양이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주철아, 그만 찾아라. 저기 오는 거 같다.”
“저놈이 왜 저기서 나오는 거야?”
석진은 건너편 펜션 사무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철과 동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 석진은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미안, 많이 기다렸냐?”
“많이는 아니고… 사무실은 뭐 하러 들른 거냐?”
주철은 석진의 행동에 의문을 갖었다. 심심해서 사무실까지 방문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인쇄 좀 하려고 그랬다. 우리 방에는 프린트가 없잖아.”
“스키장 가는데 뭔 인쇄?”
“스키장에 관한 게 아니라 동빈이 줄 거야.”
“동빈이?”
주철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진들에게 바르게 살라는 인쇄물이라도 배포할 셈인가?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동빈이가 오늘 상대할 놈들의 신상명세서를 뽑아 왔어. 어떤 놈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어디 좀 보자.”
주철은 석진의 손에 든 파일을 뺏다시피 했다. 그러고는 차근차근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준비 철저히 했다. 핸드폰 같은 신상 정보는 기본이고… 놈들이 사고 친 것도 날짜별로 정리했잖아? 오늘 확실히 나올 명단도 있고… 이거 정말이야?”
“물론이지. 이놈들도 게시판을 이용하는데, 한번 만나자는 글을 올렸지. 동빈이가 왔다고 하니까 난리 났더라. 악질이라고 판단되는 놈들은 특별히 문자까지 보냈지. 답장도 여러 통 받았다.”
석진의 일 처리는 무척 꼼꼼하고 정확했다.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동빈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맙다.”
“괜찮아. 나는 주먹보다 머리 쓰는 게 쉽거든.”
동빈은 석진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석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동무를 했다. 키 차이는 많이 났지만 그리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은 변하지 않았지?”
“응, 4시까지 가면 될 거야.”
동빈과 석진은 어깨동무를 하고 차를 향해 걸었다. 아직 여자들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참, 정확한 장소가 어디라고 그랬지?”
“너 보기 쉽게 인쇄물로 뽑아 왔어.”
“인쇄물. 어이, 이제 좀 넘기지?”
동빈은 어깨동무를 풀고는 뒤따라오는 주철을 바라보았다. 주철은 중요한 서류라도 되는 양, 심각하게 읽고 있었다.
“치사하게… 구경도 못 하냐?”
“나 지금 가야 하거든.”
“옜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땡큐.”
동빈은 주철이 건넨 파일을 품속에 꼭 갈무리했다. 석진이 정성스럽게 만들어 준 것이니 소중하게 보관해야 했다.
“근데, 미라는 아직 안 나온 거야?”
주철의 불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동빈, 석진 그리고 이번에는 미라가 보이지 않았다. 차례대로 늦어 버리니 주철이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했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털컹.
“미안!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여자 숙소의 문이 열리면서 정미라가 급하게 뛰어나왔다.
낮잠을 자다가 늦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는 모자로 커버했고 겨울용 코트도 뛰어오면서 걸치고 있었다.
“미라야, 목도리 떨어졌다.”
“고, 고마워.”
미라는 재빨리 뒤돌아 땅에 떨어진 목도리를 집었다. 그러고는 다시 눈썹이 휘날려라 내달렸다.
“헉헉… 잠시 눈만 붙인다는 게… 가영이 고년이 깨워 준다고 했는데… 헉헉…….”
차에 도착한 미라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숨을 심하게 헐떡거려 무슨 소린지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괜찮아?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괘, 괘, 괘, 괜찮아… 후아, 힘들다.”
“서둘러야 되거든. 미라야, 어서 타.”
“그, 그래…….”
동빈은 문까지 열어 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차에 오른 미라는 가쁜 숨을 고르기 여념 없었다.
“진짜 운전 괜찮겠냐?”
석진은 자동차 키를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자신이 대신 운전해 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도 운전면허증 있다니까?”
“그래, 동빈이 네가 거짓말할 리 없겠지. 잘 다녀와라.”
“고맙다. 작업 끝내고 전화할게.”
자동차 키를 받은 동빈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차를 몰고 사라졌다.
부르릉.
석진보다 훨씬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상당 기간 운전 실력을 쌓은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