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은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만약 윤가영이 아버님을 통해서 동빈을 조사한다면? 대한민국 장성이 그렇게 한가할 리는 없지만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노는 물이 같지 않던가? 두 분 아버님이 친분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머! 어머!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히다. 투스타의 딸과 쓰리스타의 아들이라… 진짜 로맨틱하다. 이거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니?”
‘쟤는 왜 이리 영화를 좋아해?’
주철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철이 일순위로 생각하는 여자였다. 동빈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는 것이 싫었다.
“얘, 장군의 아들딸 나오는 영화가 어디 있니?”
“없나? 장군의 아들은?”
“그건 김두한 나오는 영화야.”
‘뭐야? 영화도 잘 모르는 애잖아? 하여튼 중대한 위기는 넘겼으니 다행이다.’
주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미라가 화제를 돌리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더 이상 동빈과 윤가영의 아버님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주철은 다 식은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잡으려 했는데, 바로 그때였다.
딩딩딩딩딩.
“어에! 깜짝이야!”
요란한 핸드폰 소리에 주철이 경기를 일으켰다. 남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핸드폰 소리였다.
“여보세요!”
괜히 무안해진 주철은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비다. 전화를 왜 그렇게 받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화들짝 놀란 주철의 얼굴은 더욱 상기되었다.
“아버지, 잠시만요.”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통화하는 것이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주철은 핸드폰을 감싸 쥐고 몸을 일으켰다.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래.”
주철은 미안함을 전하며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신발을 신으면서 다시 통화를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요?”
-스키장에는 잘 도착한 것이냐?
“펜션에 짐 풀고 식사까지 끝냈습니다. 이렇게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충 신발을 신은 주철은 식당 밖으로 나섰다. 점퍼를 입지 않았기에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호텔 관리인에게 전화가 왔다. 예약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도착을 안 했다고 말이다. 다른 곳에 숙소를 잡았으면 연락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뭐가 급한 일이라는 게냐? 기껏해야 여자 문제겠지.
“…….”
주철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이상하게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면서 아버지의 추측이 맞았음을 시인했다.
-듣고는 있는 거냐?
“네, 아버지.”
-언제쯤 집에 도착할 예정이냐?
“글쎄요.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사정이 생기면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주철은 몸을 심하게 꼬면서 대답했다.
빈정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추운 날씨에 점점 움츠러드는 몸을 되돌리려는 노력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비서에게 전화 주거라.
“왜요? 직접 마중 나오시게요?”
-또 말투가 변하기 시작했구나.
“황송해서 그러지요. 이렇게 안부 전화도 주시고, 언제 도착하는지도 물으시니…….”
-네놈이 걱정돼서 전화한 건 아니다. 실력 좋은 과외 선생을 하나 섭외했다. 바쁜 사람이니 네놈이 도착하는 시점에 맞추려는 것이다.
“아버지! 과외는 무슨 또 과외예요!”
주철의 음성이 높아졌다.
신나게 놀려고 스키장까지 왔는데 과외라니?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면서 짜증이 밀려왔다. 이런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네놈도 이제 수험생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누가 뭐래요? 그렇지만 지금도 몇 개를 하고 있는데요?”
-수험생 아버지로서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최고의 과외 선생들을 붙여 줄 것이니, 공부를 하고 말고는 네놈의 몫이다.
“아버지, 제가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니고요… 비싼 과외 선생들 부른다고 성적이 껑충 뛰겠습니까?”
-투자한 만큼 나오는 것이 경제법칙이다. 네놈의 푸념은 대학 시험이 끝난 다음에 듣겠다. 재미있게 놀아라. 이만 끊겠다.
“아버지! 안 돼요. 과, 과외는 정말 싫어요. 아버지. 아버지!”
딸깍.
양 회장은 아들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했다. 이미 통화는 끊겼지만 주철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버지! 과외 싫어요! 아버지!”
주철은 반응 없는 핸드폰에 연신 소리를 질렀다.
추가적인 과외를 받기 싫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는데…….
“주철아,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철은 화들짝 핸드폰을 숨기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왜 핸드폰을 숨긴단 말인가? 이미 통화는 끊긴 상태 아니던가? 그만큼 주철의 심리 상태가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미, 미라구나…….”
주철은 별것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미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통화야? 아버지하고 싸웠어?”
“아, 아니…….”
날씨는 추운데 등에서 땀이 흘렀다. 주철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어, 어디까지 들은 거지?’
심히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와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리니 더욱 긴장이 되었다.
‘결국… 들킨 것인가?’
미라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의심은 가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주철아, 뭘 그리 쳐다봐?”
“그냥 예뻐서…….”
“내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야? 무안하게시리…….”
미라의 얼굴도 약간 상기되었다. 괜히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당연히 그냥 넘어가자는 소리지! 제발 과외만은 묻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제발…….’
주철의 마음은 점점 불안했다.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긴 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미라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 급급했다.
“주철아, 저기 말이야… 방금 과외가 싫다고 소리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야?”
주철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가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었다. 주철의 목소리가 너무 컸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아, 아버지가 과외를 하라고 하시네. 용돈 좀 벌라고…….”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번다고?”
“응!”
일단 급한 위기는 넘겼다. 과외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쪽으로 몰아간 것이다. 대학생이 과외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도 수긍한 듯 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너희 집 무지 부자라며? 과외를 해서 용돈 벌어?”
‘미친다. 이 계집애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주철은 다시 난감해졌다. 자신이 했던 말들이 올가미가 되어 다가온 것이다. 거짓말은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는 진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경제관념이 매우 독특하시거든. 절대 공짜로 용돈을 주지 않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시지.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라나, 뭐라나. 사회사업에는 엄청난 돈을 퍼부으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겐 진짜 돈을 안 쓰지.”
“뭐가 독특해? 정말 멋진 분이시네.”
“하하하. 멋, 멋진가? 우리 아버지가 남들에게 칭찬 듣기는 오랜만이네…….”
주철은 졸지에 효자가 되었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는 어쩔 수 없는 효행이었다. 미라도 완전히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었다.
끼익- 쿵!
때마침 다른 사람들도 식당 문을 열고 나왔다.
“뭔 전화를 그렇게 오래 하냐?”
제일 먼저 나온 석진이 주철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점퍼를 내밀었다.
“이거, 네 옷 맞지?”
“응, 그런데 왜 벌써 나오는 거야?”
주철은 재빨리 옷을 걸치며 반문했다. 여자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여자 애들이 스키장 가기 전에 어디 좀 들러야 한데.”
“어디를 들러?”
“내가 어떻게 아냐? 그런 것까지 물어야 해?”
“아니… 됐다. 그나저나 계산은 누가 한 거야?”
주철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원래는 주철이 계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석진이 낼 리는 절대 만무했다. 동빈은 지갑을 펜션에 두고 왔으니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진짜로 여자들이 낸 거냐?”
“아무나 내면 어때서?”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주철은 찜찜한 반응이지만 석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낸다고 했는데 얻어먹은 꼴이잖아. 스타일 완전히 구겨졌네. 계산하기 전에 날 부르지 그랬어.”
“걱정 마라. 여자들이 아니라 동빈이가 대신 계산했다.”
“엉? 그놈 지갑 놓고 나왔잖아.”
다행이긴 했지만 무슨 돈으로 계산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지갑 가지러 다시 펜션에 간다는 것을 주철과 석진이 분명 만류했었다.
“아줌마. 잘 먹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주철이 고개를 돌리자 동빈이 식당 문을 나서고 있었다. 주철의 뚱한 표정을 본 동빈이 먼저 물었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네가 계산했다며?”
“응. 뭐가 잘못됐어?”
동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오히려 주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돈으로 계산한 거야? 네 지갑은 펜션에 있잖아. 숨겨 둔 비상금 있었던 거냐? 아니면 외상?”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비상금. 그러나 동빈의 비상금이래야 동전 몇 개가 고작이었다. 동전 마술을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외상. 그러나 어느 장사꾼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외상을? 식당 아주머니가 아무리 인상이 좋고, 동빈이 연상에게 인기가 많음이 증명되었지만 외상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주철아, 물어 놓고 딴생각에 빠진 거냐?”
“미, 미안…….”
생각이 너무 과했나 보다. 주철은 동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까, 아버지가 주신 용돈이 있더라고.”
동빈은 하얀 봉투를 꺼내 보였다. 장군이 준 것이 확실했다. 반드시 쓰라는 명령을 착실히 수행한 것이다.
“그럼 됐다. 이제 우리도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지. 곧장 스키장으로 갈까?”
“미안하지만 난 빠져야겠는데.”
“왜? 스키부대 구라 친 거 들통 날까 봐?”
동빈은 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주철은 괜히 심통을 부렸다.
“그런 건 아니고 따로 작업할 게 있거든. 난 스키 타러 온 게 아니잖아.”
“벌써? 여기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동빈이 말하는 작업이 무엇인지 주철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작업과는 전혀 달랐고 그 대상도 남녀를 불문했다.
“오늘 중으로 손볼 놈들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면 할 수 없지. 석진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난 그냥 스키장 가고 싶어. 동빈이 따라가 봤자 괜히 짐만 될 것 같고…….”
“알았어. 우선은 저쪽하고 맞춰 보자. 연의 끈을 계속 유지하는 게 중요하거든!”
동료들의 의견을 모두 수렴한 주철은 여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차량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미라야!”
“응, 무슨 일인데?”
정미라는 차량 뒷문을 연 상태로 대답했다. 운전을 맡은 오지혜와 조수석에 타려는 윤가영도 주철을 바라보았다.
“나하고 석진이는 스키장에 갈 거야. 너희는 어디 들른다며? 오래 걸리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같이 가려고.”
“같이 가면 우리도 좋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펜션에서 기다릴 테니까, 도착하면 전화해라.”
“알았어. 그런데 동빈이는 스키장 같이 안 가?”
정미라는 동빈의 안부를 챙겼다. 주철이 석진만 언급했기 때문이다. 모두 함께 간다면 따로 이름을 부를 리 없었다.
“이놈도 급한 일이 생겼거든. 급하게 어디 가야 해.”
“어디로 가는데?”
“에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당사자 옆에 있는데… 동빈아 어디로 작업하러 가냐?”
“어머나. 작업?”
주철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작업이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하면서 분풀이를 했다. 물론 동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할 뿐이었다.
“저쪽 시내로 갈 거야. 아까 갔던 동물 병원 있는 근처야.”
“마침 잘됐네. 나랑 같이 가면 되겠다. 아롱이가 잘 있는지 보러 가야 하거든.”
“좋아. 너희 차로 스키장, 우리 차로는 시내 가면 되겠네.”
상황 정리는 주철이 담당했다. 시내와 스키장 둘로 나누어 움직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불만은 없어 보였다.
“금방 같다 올게.”
합의가 끝나자 여자들은 곧바로 차에 올랐다.
부릉.
나직한 엔진 음향과 함께 차량이 출발했다.
젊은 여자들이 타기에는 조금 과분한 3,000cc 검정색 승용차였다. 큰 덩치가 매우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동빈 일행을 지나쳤다.
“얘들아, 나중에 보자.”
“그래, 우리는 펜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촤르르.
검은색 승용차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주철은 열심히 손을 흔들었고 석진은 운전석에 올랐다.
“동빈아, 너 뭘 보고 있냐?”
“별거 아니다.”
주철은 손 흔드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동빈이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