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 근처의 아담한 식당.
동빈 일행과 여자들이 마주 앉았다. 흡사 삼 대 삼 미팅 같은 분위기였다.
“뭐가 괜찮을까…….”
석진은 여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계속 메뉴 판만 쳐다보고 있었다. 석진이 배가 고픈 건 당연하다. 지금은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석진이 네가 아무거나 시키고… 각자 소개부터 하자.”
“그래.”
주철이 나서서 서먹한 분위기를 수습했고 여자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레이디 퍼스트! 너희부터 소개해 봐.”
썰렁.
초반부터 좋지 않다. 주철의 농담이 먹혀들지 않은 것이다. 역시 나이 차이가 있는가? 주철은 어설픈 웃음으로 위기를 무마하려 했다.
“에이… 웃자고 한 소리지… 하하하…….”
“괜찮아. 남자든 여자든, 아무나 먼저 소개하면 어때? 우리는 한양여대 2학년이야. 내 이름은 정미라. 꽃미남보다는 터프한 남자를 좋아하지.”
애완견 주인이 적극적으로 주철을 도왔다. 도도한 듯한 외모를 가졌지만 소탈한 성격임이 분명했다.
“내 친구 오지혜.”
“안녕.”
“아, 안녕…….”
“그리고 이쪽은 윤가영.”
“안녕.”
“아, 안녕…….”
역시 사람을 속이는 짓은 쉽지 않았다. 동빈은 쑥스러운 표정을 최대한 감추며 인사를 했다. 주철과 석진은 대체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린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어. 거의 매년 이 스키장을 찾는 편이지. 너희들은?”
“우리도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지… 나부터 소개할게. 연희대 2학년 양주철이야. 내년이면 3학년 올라가지…….”
“어머? 우리랑 나이가 같구나?”
“왜, 왜? 너희보다 어린 줄 알았어?”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인가?
애완견 주인인 정미라의 반응에 주철이 흠칫했다. 그러나 큰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고 상대를 떠볼 요량으로 반문했다.
“아니… 주철이 너나 저 덩치 좋은 애를 봐서는 우리보다 더 많은지 알았지. 혹시 재수한 거야?”
“재, 재수는 무슨…….”
다행이다. 상대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인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박석진. 귀여워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 보시다시피, 요즘 유행하는 동안이야. 고등학생은 기본이고… 중학생으로까지 보는 사람들도 있어.”
“아, 안녕…….”
“어머∼. 남자 피부가 어쩌면 저렇게 곱니? 둘이 친구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 학교 다녀?”
오지혜가 석진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글래머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운동을 했는지 여자치고는 어깨가 넓었다. 피부도 약간은 검다고 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건강 미인이었다.
“난 대학 못 갔는데…….”
“미안해. 그럼 뭐 하는데?”
오지혜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모두 대학생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는 표정이다.
“난 아직도 공부해. 대학은 꼭 가려고…….”
“그래… 남자가 목표를 정했으면 반드시 달성해야지. 그런데 이번에도 떨어지면 몇 수야? 삼수? 사수?”
공부 잘하는 석진이가… 재수도 아니고 삼수도 아닌 사수생!
안전한 작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주철처럼 대학 생활에 훤하지 못한 결과였다. 주철은 여대생을 사귄 경험이 있기에 대학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석진이가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는데, 운이 진짜 없었지. 그렇게 많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목표는 서울대야. 짜식!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할 것이지.”
“고, 고맙다. 주철아.”
주철이 허락도 없이 끼어들었다. 도와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놀리자는 것인지. 헛갈리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갑자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동빈을 소개할 때가 되자 여자들의 관심이 달라졌다. 정미라뿐만 아니라 다른 두 여자도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이렇게 안 좋은 현상이…….’
주철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믿기 어렵지만 여자에게 외면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질투일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기분이 나쁘고 동빈이가 미워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3살은 무린가? 연상녀의 정신세계가 상당히 독특한걸…….’
주철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흔한 일이 아니라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물론 죽어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여자들의 취향이 문제라고 위안 삼았다.
“빨리 말해 봐. 이름이 뭐야?”
주철이 주춤하자 여자들의 독촉이 쏟아졌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위해서는 웃으면서 말을 해야 했다.
“이놈은 김동빈… 미라는 알고 있지? 사나운 투견을 깨갱하게 만들었던 그 친구야.”
“안녕. 아롱이를 구해 줘서 고마워.”
“뭘… 그런 거 가지고…….”
동빈은 칭찬에 익숙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받는 것은 더욱더 그랬다.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나? 사나운 개를 물리칠 때는 상당히 터프했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딴판이네?”
“내 성격이 좀…….”
그녀가 헛갈리는 것도 당연했다. 동빈의 평상시 모습과 싸울 때의 모습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지금은 뭐 하고 있어? 학생이야, 아니면…….”
정미라는 질문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주철과 석진도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동빈이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행동이 분명했다.
“나는…….”
마침내 동빈이 입을 열었다.
과연 여자들을 무사히 속일 수 있을까? 주철과 석진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졌는데…….
“오랜만에 휴가 나와서 친구들과 놀러 왔어. 나는 특수부대 군인이야. 작전의 특성에 따라서 이렇게 머리를 기르기도 하지.”
역시나 석진의 선택은 탁월했다.
군인처럼 동빈과 딱 어울리는 직업도 없었다. 절대로 들통 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었고 여자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그래! 어쩐지 군인 같더라.”
“난 군인 진짜 싫은데… 동빈이는 좀 다른 것 같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더 멋있다.”
누가 군인이 여자들에게 찬밥 신세라고 했던가!
주철의 작업을 위하여 다시 군인이 되어야 했지만 절대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우와! 신난다.”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등장하자 석진이 제일 기뻐했다. 여자들도 점심을 걸렀는지 시장기를 느끼는 표정이었다.
푸짐한 음식과 함께 미팅(?)의 분위기도 한껏 무르익었다.
때늦은 점심이 꽤나 길어졌다.
동빈 일행이나 여자들 모두 장거리 여행의 여독이 남아 있었다. 오늘은 최대한 편안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철이 너는 스키 잘 타니?”
“거의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지.”
미라의 질문에 주철은 호기롭게 대답했다. 사람들의 화제가 자연스럽게 스키로 이어진 것이다. 스키장에서 만났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정말이야?”
“물론이지. 직접 보고 확인하라고.”
그들은 스키까지 같이 타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조만간 서로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주철이 할 리 없었다.
“근데, 미라의 실력은 어느 정도야? 여기에 매년 온다고 했으니 상당하겠는데?”
“난 운동신경이 꽝이라 별로야. 스키는 지혜가 가장 잘 타지. 가영이는 중급 정도?”
“아직 좋은 선생을 만나지 못했구나. 내가 친절히 가르쳐 주지. 상당한 실력자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거든.”
“나야 고맙지.”
맥을 못 추던 주철의 작업이 점점 통하고 있었다. 역시 시간이 약인가 보다. 3살의 나이 차이를 점차 극복하고 있었다.
“주철이 너는 전공이 뭐야?”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아야 하니… 경영 쪽을 선택해야겠지. 물론 내 결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지.”
“어머나? 너 상당한 부잔가 보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주철은 자신의 모든 배경을 활용했다. 그동안은 외모로 90% 이상을 먹고 들어갔지만, 지금은 동빈이 때문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잘생기고 돈까지 많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넘어온다.
주철은 자신의 입지를 높였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주철만의 착각이었다.
“참, 동빈이는 어때? 스키 잘 타니?”
‘뭐, 뭐야? 왜 다시 동빈에게 관심을…….’
정미라는 동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이 점찍은 여자를 친구에게 빼앗길 판이었다.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크게 염려할 문제는 아니었다.
‘동빈이가 말주변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주철은 동빈의 어수룩함을 믿었다. 침착하게 표정 관리를 하면서 동빈의 행동을 주시했다.
“나도 스키 잘 타지. 명색이 스키부대 출신인데.”
“스, 스키부대?”
‘좋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동빈은 주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갑자기 스키부대가 나오다니? 주철이 알기로 우리나라에 정식 스키부대는 없었다. 가끔 TV에 나오는 사람들은 특수부대의 동계 훈련 장면이었다.
“동빈아, 그럼 스키 타고 총도 쏴 봤어?”
“그건 기본이지.”
“어머∼. 진짜 멋있겠다.”
‘뭐, 뭐야? 여, 여자들이 믿는다!’
동빈의 믿음직한 외모 때문인가? 여자들은 의심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빈이가 말하면 뭐든지 믿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시점이었다.
“킬킬킬… 동빈이, 너 지금 월남 스키부대 말한 거냐? 그게 언제 적 조크인데 말이야. 유머 감각 너무 떨어진다. 우리나라에 영화에서나 나오는 그런 스키부대는 없어. 너희들 진짜 믿었던 거야?”
“……?”
주철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동빈의 입지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꼼수였다. 정말 몰랐는지 여자들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동빈아, 진짜 농담이었어? 우리나라에는 스키부대가 없는 거야?”
“주철이 말대로 그런 스키부대는 없지. 그렇지만 내 말은 농담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외국에는 있거든. 예전에 그쪽에서 교관까지 지낸 적이 있었어.”
“…….”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외국 스키부대 출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순간적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주철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을 못 했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서, 설마… 여자들이 진짜 믿는 건 아니겠지?’
주철은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여자들의 얼굴이 매우 수상했기 때문이다. 매우 멋진 남자를 보는 듯한 표정에 가까웠다. 자신이 아니라 동빈이를 보면서…….
“동빈이, 너… 진짜 대단하다! 진짜 멋있어.”
“어머! 나도 스키부대는 처음 봐. 어느 나라 스키부대 출신이야?”
여자들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동빈이 스키부대 출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반응이었다.
“국가 기밀이라 말하기가 좀…….”
“국가 기밀? 정말 영화 같다. 너무 흥분되고 멋있어.”
‘마, 말도 안 돼! 진짜 믿어… 스키부대도 믿고… 국가 기밀도 믿고… 3살 위부터는 정신세계가 다른가?’
주철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빈이란 장벽은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했다. 이제는 주철을 빼놓고 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동빈이, 너는 우리 가영이에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다.”
“왜?”
“사실 우리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미라야, 하지 마.”
윤가영은 정미라의 입을 막으려 난리를 쳤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이러는 것일까? 동빈처럼 국가 기밀은 아닌 모양이었다.
“괜찮아. 뭐가 어때서?”
“그래도…….”
윤가영은 여전히 껄끄러운 표정이었다. 동빈이 알면 곤란한 내용인지 괜히 눈치를 살폈다.
“나는 괜찮은데…….”
“거봐. 동빈이도 괜찮다고 하잖아.”
동빈이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보이자 윤가영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정미라는 잠시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얘네 아버지는 사단장이야.”
“그래…….”
“사단장? 그러면 투스타 급이잖아?”
동빈은 별 반응이 없건만 주철이 깜짝 놀랐다.
작업에 큰 지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군인이라고 속인 거짓말이 들통 날 수도 있었다. 뜻밖의 복병이 나타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왜? 주철이 너도 잘 보이려고? 하긴… 이제 3학년 올라가면 군대 갈 때가 머지않았지.”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군대가 편한 곳은 아니잖아? 남자라는 자존심에 큰소리치지만 입대 가까워지면 난리도 아니더라. 솔직히 우리 오빠도 가영이 아버님 통해서 좋은 곳으로 빼 달라며 얼마나 매달렸는지…….”
‘이것이 날 뭐로 보고?’
주철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
솔직히 군대는 예전에 면제를 받았다. 여자들에게 나약하게 인식될 자신의 이미지가 싫었다.
“무슨 소리야?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를 가야지! 어디가 편하니 빼 달라는 청탁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에이… 아니 것 같은데?”
‘이것들이 내 말은 왜 이리 안 믿어? 스키부대는 믿으면서?’
변명을 해도 소용없었다. 군대 면제라는 사실까지 속였지만 여자들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야, 야, 야! 빽을 쓰려면 내가 투스타 정도한테 하겠냐? 우리 아버지에게 말하면… 아니, 그냥 동빈이 아버님께 부탁하겠다. 얘네 아버지가 쓰리스타거든!”
“어머나! 동빈이 아버님도 장성이야? 게다가 쓰리스타!”
‘젠장… 내가 뭔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