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지. 하여튼, 서울에서는 하기 힘든 거 아닌가? 그러니까 여기까지 내려온 게 아니여?”
“그렇겠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소녀에게 집중되었다. 시골 중의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 애가 개장수 아들을 어떻게 알지?”
“나도 모르지… 그런데 저 애도 어디 다친 거 같은데?”
가만히 살펴보니, 소녀의 가녀린 종아리에 긁힌 상처가 보였다. 비싸 보이는 옷도 곳곳에 흙이 묻어 있었다.
“아야, 괜찮은 거냐?”
“괜, 괜찮아요.”
마을 사람들이 달려가 소녀를 살폈다. 소녀는 멀어지는 꼬마를 보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다친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엄청 사나운 개가 덤벼들었는데… 저 애가 구해 줬어요.”
“그래?”
꼬마가 왜 미친개와 사투를 벌였는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안한 표정으로 점점 멀어지는 꼬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틀비틀.
꼬마는 제대로 몸을 가눌 힘조차 없어 보였다.
쓰러지지 않고 걷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싫은지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는 모습이었다.
스르륵.
동빈이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시골 풍경은 사라지고 화장실 천장이 보였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 확실했지만 웅성거림만은 여전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럽지?”
동빈은 꿈에서 본 장면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진이 너 치사하게 나올래?”
“뭐가 치사해?”
“그러니까! 대세에 따르란 말이다.”
“도대체 뭐가 대센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석진과 주철의 말다툼이 한창이었다.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는지 큰 목소리가 오고 갔다. 더 이상의 편안함은 포기해야 마땅했다.
촤르르.
동빈은 지체 없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피곤이 많이 가신 느낌이었다. 거울로 다가가서 얼굴 상태를 보고는 수건을 집었다.
“진짜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구나.”
대충 머리와 몸을 닦고는 목욕 가운을 걸쳤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군대 동료들과 작전을 뛸 때는 모두가 조용했는데… 뭐, 언제 죽을지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덜컹.
“야! 여기까지 잘 와서 왜 싸우는 거야!”
동빈은 짜증 난 듯한 어투로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여 친구들의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이에 기죽을 주철이 아니었다.
“목욕은 잘 끝냈냐?”
“지금 목욕이 문제냐? 왜 석진이의 멱살을 잡고 난리야?”
“이놈이 말을 안 듣잖아!”
예상보다 의견 차이가 큰 모양이다. 주철은 석진을 구석으로 몬 것도 모자라 멱살까지 쥐고 있었다.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친구들끼리의 장난이지만, 체력이 약한 석진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동빈아, 제발 주철이 좀 말려 주라.”
“주철이 너 미쳤냐?”
“그래… 나 미쳤다. 완전히 돌아 버렸다.”
동빈이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주철은 손목의 힘을 풀지 않았다. 계속 석진을 노려보며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을 태세였다.
“석진아,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우선은 전후 사정부터 파악해야 마땅했다. 아무리 대책 없는 주철이라도 함부로 친구를 괴롭히진 않는다. 동빈의 질문에 석진이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뻔하잖아. 여자 때문이지…….”
“여, 여자?”
동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생뚱맞게 여자라니? 이곳은 지금 남자밖에 없었다. 여자 때문에 분란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네가 구해 준 여자… 아니, 개 주인 있잖아…….”
“있지?”
당연히 있다. 그래서 여기 펜션으로 숙소를 옮긴 것이다.
석진은 처음부터 그게 불만이었지만 이 문제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쪽도 3명 우리도 3명이잖아.”
“그, 그랬지…….”
동빈은 점점 낮아지는 음성으로 반문했다. 석진이 너무나 당연한 소리만 했기 때문이다.
“주철이가 작업 실력 발휘하려고 했잖아. 여자들도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고…….”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어.”
“무슨 문제?”
“그 여자들… 대학교 2학년이래. 조금 있으면 3학년으로 올라가는 거지.”
“뭐야? 우리보다 3살이나 많잖아!”
생각보다 여자들의 나이가 많았다.
작업의 고수인 주철이라도 벅찬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석진을 괴롭히는 것인가?
여자들의 나이가 많은 것은 결코 석진의 탓이 아니었다.
“주철이… 너,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거냐?”
“무슨 소리냐?”
오히려 주철이 반문했다.
여자 때문에 진짜로 돌아 버린 것인가? 동빈은 차근차근 일을 풀어 가려 했다.
“상황이 그렇잖아. 이번에는 작업 포기해라. 우리보다 3살이나 많은 누나들이다. 응?”
“무슨 소리야? 그래서 우리도… 3살 많기로 했거든!”
“……?”
동빈의 표정은 가관이 아니게 변했다.
사람의 나이가 고무줄이란 말인가? 3살 많기로 했다니? 주철의 말뜻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빈의 멍한 표정이 오래가자, 주철이 다시 석진을 공략했다.
“빨리 결정해. 외모상 말이야… 동빈이와 나는 3살 위까지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 그런데 넌 어쩔 거야? 지금부터 3살 올릴 거야 말 거야!”
“그, 그냥 동생 하면 안 될까? 거짓말을 싫은데…….”
“야, 야, 야! 여자들이 우리가 친구인 거 다 알고 있어. 1명이라도 실수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지는 거란 말이지.”
말다툼의 이유가 여자 때문임이 확실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에게 작업을 하기 위해서 나이를 속여야 한다는 것이다. 석진은 여전히 빼는 태도를 보였고 주철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미안하지만 석진이 너는 너무 동안이야. 그 좋은 머리로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 보란 말이다.”
“주철아, 잘 생각해 봐라. 이번 계획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나와 동빈이는 대학생이라고 말하면 대부분 그러려니 하지. 석진이 너만 잘하면 된단 말이다. 괜히 우리까지 들통 날 수는 없잖아.”
“야… 나만 문제 있는 거 아니잖아. 외모야 꾸미면 되잖아? 게다가 요즘은 동안이 유행이고… 그, 그러나 동빈이는 어쩔 거냐? 몇 마디만 나누면 금방 고딩이라고 탄로 날걸!”
“……!”
주철의 눈이 몰라보게 커졌다.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냐?”
갑자기 주철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졌다.
동빈은 슬금슬금 물러나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오늘따라 주철이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나이를 3살 늘리자고 하질 않나…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동빈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쯧쯧쯧… 바로 이게 문제란 말이지…….”
석진의 외모가 문제가 아님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번 작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동빈이었다. 외모는 충분히 되지만 어수룩한 행동이 문제였다.
“주철아, 그냥 포기해라.”
“…….”
석진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고를 했다. 주철은 고민에 빠진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망신당하지 말자. 너의 작업 경력에 크나큰 오점을 남길 수 있어? 쿨하게 포기하자.”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하늘이 내려 준 기회거늘…….”
주철은 풀리지 않는 고민에 빠져 들었다.
그냥 동빈이를 뺄까? 아니다. 여자들이 호감을 가졌던 것은 동빈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놔둘 수도 없으니…….
“주철아, 내가 뭐가 문젠데?”
여전히 상황 파악 못 한 동빈이 끼어들었다. 당연히 좋은 반응이 있을 리 없었다.
“미안한데 동빈이 넌 가만히 좀 있어 줄래? 난 지금 석진이와 심각한 대화를 하려고 하거든?”
“…….”
동빈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주철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석진아, 그 좋은 머리로 한번만 도와주라.”
“뭘?”
주철은 결국 석진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늘이 내려 주신 기회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 알면서 왜 이러냐? 이번 일만 해결해 주면…….”
“해결해 주면?”
석진은 기대에 찬 얼굴로 주철의 뒷말을 따라 했다. 매우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뒤따르는 보상에 따라서 도와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의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 호텔 뷔페를 먹을 수 있는… 무료 쿠폰!”
“저, 정말!”
“당연하지! 너희 식구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게 3장! 엄마랑 여동생이랑 다정하게 식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 어때, 효도 한번 할 테야?”
“나도 당연하지! 정말 고맙다, 친구야.”
석진은 주철의 손까지 덥석 잡았다. 예상보다 훨씬 큰 보상이라 감동한 것이 분명했다.
“석진아, 정말 괜찮은 방법이 있을까?”
“나만 믿어라. 다 방법이 있단다.”
석진은 함부로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이러한 석진이 장담을 할 정도라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리였다. 심란했던 주철의 표정도 눈 녹듯이 녹아 버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