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빈 일행은 아담한 펜션으로 들어섰다.
큰 평수는 아니었고 3명이 쓰기에 적당한 규모였다. 깨끗하고 전망도 괜찮았지만 주철이 호언장담한 대로 최고급은 아니었다.
“석진아, 뭐 하냐? 빨리 들어가자.”
“…….”
주철이 말해도 소용없었다. 석진은 펜션 입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짐을 들고 있는 상태였기에 주철의 성화는 더욱 커졌다.
“야, 밥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
“그럼, 왜 이러는 거야?”
“뭐가…….”
석진의 어설픈 반항은 뭔가에 심통 난 것 때문이었다. 황태 전골 때문인가 해서 물어봤지만 아니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석진이 삐친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동물 병원 가서 그런 거야?”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프면 당연히 병원에 가야지.”
“야! 그럼 왜 이러는 거냐고?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예정과 다르잖아. 스키장 안에 있는 최고급 호텔 예약했다고 했잖아. 이런 펜션이 아니고…….”
동빈 일행의 스케줄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겼다. 원래는 스키장 안의 호텔에서 묵기로 했지만 급하게 이곳으로 바꾼 것이다.
“미친다.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냐?”
“난 비싼 호텔에서 한 번도 잔 적이 없단 말이야. 수진이한테 얼마나 자랑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뭐가 어쩔 수 없어? 저 여자 애들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석진은 맞은편에 있는 펜션을 가리켰다. 비슷한 규모의 건물로 3명의 여자가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그중 1명은 부상당한 애완견의 주인이었다.
“석진아, 굴러 들어온 복을 외면할 셈이냐? 삼 대 삼! 이건 하늘이 내려 준 기회란 말이다.”
“난 여자보다 고급 호텔이 좋거든!”
“미친다.”
스케줄이 변경된 이유는 간단했다.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주철의 계략이었다. 예약한 호텔까지 취소하며 애완견 주인이 머물고 있는 펜션에 찾아온 것이다.
“저 애들은 또 뭐가 좋다고 실실 웃고…….”
“야, 야, 야! 인상 좀 펴라.”
마침 여자들도 주철과 석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철은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석진은 계속 못마땅한 표정을 유지했다.
“석진아, 제발 한번만 봐줘라. 여자들이 보고 있잖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는데… 다음부터는 혼자서 마음대로 일정 바꾸지 마라. 뭐든 의논해서 결정하는 거다.”
“그래. 알았으니까, 어서 들어가자.”
석진이 완강했던 것은, 함부로 계획을 바꾸지 말라는 경고의 뜻이었다. 주철이 어느 정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자 곧바로 농성을 풀었다.
찰칵.
끼이익.
석진은 출입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라? 내부는 밖하고 다르네?”
“거봐라. 내가 뭐랬냐?”
소박한 듯한 겉모습과 달리 내부는 매우 잘 꾸며져 있었다.
천장 높은 거실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식탁이나 장식장 같은 가구들은 고풍스러웠고, 벽걸이 TV와 냉장고 같은 전자 제품은 모두 최신형이었다.
“뭐…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군.”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예약한 호텔보다 분위기에서는 훨씬 낫다.”
이리저리 살펴보는 석진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주철은 그 뒤를 쫓아다니며 아부를 떨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와! 침대도 모두 고급이네?”
“당연하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 펜션 주인이 그 여자 중 하나와 친척이래.”
“아주 좋아! 펜션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 것 같은데… 동빈이는 어디 있냐?”
“그러게?”
지금 방 안에는 석진과 주철밖에 없었다.
“주철아, 분명히 짐 들고 따라왔잖아?”
“그, 그러게…….”
김동빈 실종 사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친구가 없어진 것이다.
“아직도 밖에 있는 거 아니야?”
“설마…….”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 동빈이가 안 보였다니까?”
“……!”
파다다닥.
석진과 주철은 부리나케 밖으로 향했다.
문밖에서 말싸움을 할 때도 분명 동빈은 있었다. 하염없이 하품을 하던 모습까지 덩달아 생각난 것이었다.
덜컹.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문을 나서니 동빈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가방을 의자 삼고 벽에 몸을 기댄 채, 아주 편한 자세로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진짜 피곤했던 모양이네…….”
“그러게… 이놈이 어제 잠을 못 잤나?”
너무 잘 자고 있기에 깨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이대로 그냥 두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추운 날이라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
“석진이, 너는 동빈이 좀 깨워라. 난 여자 애들한테 갔다 올게.”
“여자들한테는 또 왜 가는데?”
“대충 정리가 끝나는 대로 함께 식사하기로 했거든. 싫으면 네가 가든가.”
“아니다. 내가 동빈이 깨우는 게 낫겠다.”
업무 분담은 쉽게 이루어졌다. 주철은 여자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로 향했고, 석진은 쿨쿨 자고 있는 동빈에게 다가갔다.
“동빈아, 빨리 일어나. 여기서 자면 얼어 죽어.”
벌떡!
“까, 깜짝이야!”
동빈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너무나 즉각 반응을 보였기에 석진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어디서… 자면 되는데…….”
동빈은 반쯤 눈이 감긴 상태로 물었다. 목소리 또한 잠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넌 피로부터 풀어야겠다. 내가 목욕물 받아 줄 테니… 안에서 누워 있어라.”
“고… 고맙다…….”
비틀비틀.
동빈은 비몽사몽간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신발도 벗지 않고는 거실에 누워 버렸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석진은 동빈을 내려다보았다.
강철 체력을 자랑하던 동빈이 아니었던가? 어젯밤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빨리 물이나 받자.”
석진은 잡념을 떨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동빈의 피로부터 푸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웬만큼 목욕물이 차자 석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매우 말끔한 모습이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샤워까지 끝낸 것이었다.
“동빈아…….”
“응…….”
“희한하네? 이렇게 깊이 잠들었는데, 정말 내 말이 들렸어?”
석진은 신기한 듯 반문했다. 절대 못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부르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드… 들리니까 깨어났지… 무슨 일인데…….”
“뜨거운 물 받았으니까, 씻으라고. 주철이가 오면 밥 먹으러 밖에 나가야 하거든.”
“아, 알았어…….”
동빈은 깔끔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화장실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휘청휘청.
불안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대단한 정신력이라 할 수 있었으나 한 가지가 문제였다.
“저기… 화장실은 반대편이거든.”
“에이… 씨!”
동빈은 재빨리 방향을 바꿨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넘어질 고비를 넘기며 화장실 앞까지 도착했다. 반쯤 문이 열렸기에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그래… 찾았다. 바로 여기구나.”
동빈은 옷을 벗으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세탁할 옷인지 줄줄 흘리며 걸어갔다. 따듯한 물이 담긴 욕조 앞에 섰을 때 동빈은 완전한 나체가 되었다.
“별로 춥지는 않네?”
수증기 덕분에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찰랑.
살짝 손을 담그니 온도도 적당했다. 대략적인 점검을 끝낸 동빈은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첨벙…….
촤르르.
잔잔했던 욕조 물이 일시에 범람했다. 동빈의 체격이 컸기에 흘러내리는 양 또한 상당했다.
“어허∼ 좋다.”
온몸을 파고드는 짜릿함 때문인가? 동빈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이 든 노인들이 대중탕에서나 발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진짜 편하다.”
동빈은 최대한 편하게 자세를 잡았다. 욕조 끝에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그러자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긴 동빈의 다리가 벽면 위로 꽤나 올라갔다.
깜박깜박.
어제 잠을 못 잔 탓인가? 몸은 서서히 나른해지고 눈꺼풀은 스스로 감기기 시작했다. 추운 길바닥에서도 잠이 몰려오더니 따듯한 물속에 들어오자, 지금까지의 피곤함이 단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동빈은 저절로 감기는 눈을 뜨려 애처로운 씨름을 해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몸의 나른함은 극에 치달았다.
사르르.
눈꺼풀이 천 근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도 잠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잠시 눈을 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딱 5분만…….”
동빈은 억지로 눈을 뜨지 않았다. 목욕하면서 잠드는 일은 매우 위험했지만 동빈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각인된 생존 본능을 잠시 제거하자 곧바로 꿈나라로 향할 수 있었다.
꿈틀꿈틀.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동빈의 눈꺼풀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눈꺼풀 뒤에 감춰진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동빈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진짜 꿈인가?
잊혔던 과거의 기억인지도 몰랐다.
‘낯설지 않은 광경…….’
동빈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붉는 핏물이었다.
피범벅이 된 어린아이가 숨을 심하게 헐떡이고 있었다. 누군가와 피 튀기는 격전을 치른 모양이다.
뚝… 뚝… 뚝…….
상처가 매우 심했다. 허벅지와 손목에서는 연신 피가 흘렀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보아 서 있을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버텨 냈다.
“세상에나… 역시 개장수 아들이네?”
“그러게 말이야! 자기 몸보다 큰 도사견을… 그런데 개장수 아들이 몇 살이지?”
주변에서 이상한 웅성거림이 들렸다.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는 죽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아마, 올해 6살이지? 어미젖도 못 먹고 자랐는데 말이여, 힘 하나는 장사네, 장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6살짜리가 저 미친개를 죽였단 말이여?”
“피는 못 속인다고 그랬잖아? 아비를 닮았는지 개 잡는 솜씨가 일품이네그려.”
혀를 내밀고 쓰러져 있는 개의 덩치는 상당했다. 6살 꼬마가 상대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근데, 저 미친개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산에 버려진 놈이었잖아. 가끔 마을로 내려와서 사고를 쳤는데, 오늘은 제대로 임자 만났구만.”
정말 운이 지지리도 없는 개였다. 어린아이라서 만만하게 보여 덤볐는데 하필 개장수의 아들이었다.
“미친개야 멋모르고 덤볐다고 해도 말이여… 꼬마 놈이 정말 겁도 없네? 무섭지도 않았나 봐.”
“혹시… 지 아비를 닮아서 저 꼬마도 미친 거 아니여?”
휘익.
꼬마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칭찬보다는 비아냥거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어린아이에게서 순수한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저 눈 좀 봐… 정말 독하고만, 독해…….”
“그러게. 이제는 마을의 개가 남아나지 않겠구만. 개장수 아들까지 합세했으니 말이여.”
비틀비틀.
꼬마는 조용히 뒤돌아서 걸었다.
계속 피를 흘리고 걸었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일부러 방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꼬마가 도움을 받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 숲길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10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소녀였다. 숨바꼭질이라도 했던 것인가?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꼬마가 지나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구, 구해 줘서… 고, 고마워…….”
“…….”
꼬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녀가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구해 줘서 고맙다고…….”
휘익.
벙어리에 귀까지 먹었는가?
꼬마는 빠른 걸음으로 소녀를 지나쳤다. 힘들게 말을 건넨 소녀가 괜히 무안해져 얼굴을 붉혔다.
“저 여자 애는 누구여? 얼굴이 하얀 게…….”
“서울에서 내려온 아이잖여? 요양인가 뭐가 한다던데?”
“그려? 그런데… 요, 요양이 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