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서울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전국이 하얗게 변했고 강원도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니 동빈 일행의 스키 여행이 더뎌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한적한 길로 들어서면서 차량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우와! 이제야 길이 좀 뚫리네.”
석진이 한숨 섞인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론 가속페달을 마음껏 밟을 정도는 아니었다. 30km 내외의 속도였지만 좀 전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왜 이리 먼 데까지 왔냐?”
석진이 혼자 운전한 지도 벌써 6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눈이 많이 내리면서 교통이 통제되는 위기를 넘기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단다. 우선 눈 상태가 좋고, 스키장 길이도 알맞은 편이다. 교통이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은 여자들이 많이 온다고 하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안 그래?”
“역시 여자 때문이었구나.”
“석진이 너도 이럴 때 한번 자유를 만끽해야지. 수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한 여자만 사귀면 너도 지루하지 않냐?”
“아니, 전혀 지루하지 않은데?”
석진과 주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뒷자리에 있던 동빈은 조금 전부터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만약 깨어 있었다면 ‘무슨 소리!’ 하면서 주철의 말에 반박부터 했을 것이다.
“막상 따라오기는 했지만 내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떠나기 전에 인터넷에 들어갔더니 난리도 아니던데?”
“주철이 너도 봤냐? 전국에 있는 일진들에게 선전포고까지 했으니… 진짜 동빈이다운 발상이다.”
지금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일진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놈들에게는 충격에 가까웠다. 괴물로 통하는 동빈의 선전포고!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된다던 불문율이 깨졌기 때문이다.
“동빈이 놈이 멍청하니까 그런 짓을 벌인 거지, 나 같으면 선전포고 없이 그냥 쳐들어간다.”
“내 생각은 다른데? 우선 광고 효과부터 엄청나잖아. 일진이라고 개폼 잡던 놈들은 불안해서 잠도 안 올걸?”
“바로 그게 문제야. 어떤 상대와 싸우든 도망칠 곳은 열어 줘야 하는데, 동빈이 놈은 그게 없어.”
“경찰서에 자수하면 되잖아? 그럼 동빈이도 건들지 않는다고 공지를 했으니…….”
“야! 그놈들이 순순히 자수하겠냐? 내 생각엔 말이다, 괜히 일만 복잡하게 만든 것 같아. 그놈들이 뭉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지.”
“……!”
머리 좋은 석진은 금방 주철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겁먹고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뭉쳐서 덤빌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석진의 표정이 약간 변했지만 동빈의 안전 때문은 아니었다.
“놈들이 뭉친다고 동빈이를 이기겠냐?”
“일진이라고 설치고 다니는 놈들은 대부분 머리가 나쁘거든? 대충 쪽수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아마도 엄청난 피바람이 불 거다.”
석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빈에게는 머릿수가 그저 숫자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얼마나 많은 일진들이 희생될지… 이제부터는 일진들의 안전부터 챙겨야 했다.
“석진아, 차 좀 세워라.”
“왜? 화장실 가고 싶어?”
황량했던 주변 풍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스키장에 거의 도착한 모양인지 현대식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고파 죽겠다. 어디 가서 밥 좀 먹자.”
“그게 좋겠다. 사실 나도 배가 고팠거든.”
끼이익.
석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향을 틀었다.
거의 드리프트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급격하게 꺾인 코너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이놈은 먹는 이야기만 나오면 과격해진단 말이야?”
일순간에 몸이 쏠리자 주철은 황급히 손잡이를 잡았다. 평소에는 얌전한 석진이었지만 밥 앞에서는 성격이 변했다.
꽝!
“뭐야? 이 소리는…….”
사고가 난 것은 아니다. 바로 뒤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주철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는데…….
쾅쾅.
동빈의 머리가 차량 유리창과 연신 충돌하고 있었다. 차가 심하게 흔들렸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자다니…….”
주철은 석진보다 더한 인간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프지도 않은지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끼이익.
쿵!
석진의 운전은 더욱 난폭해졌다. 물론 동빈이 머리 찧는 소리도 더욱 커져만 갔다.
얼마 후.
석진의 광폭한 운전이 끝을 맺었다. 식당이 몰려 있는 골목을 발견한 것이다. 비좁은 골목이라 차량 이동이 힘들어 보였다.
석진은 간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주철은 세상모르고 잠든 동빈을 깨우려 했다.
“일어나라, 동빈아. 우리도 밥 좀 먹어야지.”
“벌써 밥 먹을 시간인가?”
“뭐야? 금방 일어나네?”
주철은 뚱한 표정이 되었다.
그토록 머리를 찧고도 세상모르고 잠든 놈이 아니었던가? 주철이 그냥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인데 깨어난 것이다.
“뭘 그렇게 봐? 자고 일어난 사람 처음 봐?”
“아, 아니다. 근데 머리는 괜찮냐?”
“머리? 아무렇지도 않은데?”
동빈은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너무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라 주철이 황당할 정도였다.
“됐다. 네가 공부 못할 때부터 알아봤다.”
“야! 여기서 공부 얘기가 왜 나와?”
“그런 게 있거든!”
또다시 차량 내부가 시끄러워졌다. 티격태격하는 주철과 동빈이 때문에 머리가 지끈할 정도였다. 이럴 때 꼭 필요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석진이었다.
“그만 좀 해라. 주차 끝났으니까 어서 내려.”
“운전하느라 수고했다.”
“우와! 온몸이 다 뻐근하다.”
주철과 동빈은 말싸움을 멈추고 차에서 내렸다.
눈은 많이 왔지만 별로 춥지 않은 날씨였다. 그들은 가볍게 몸을 풀면서 잔뜩 굳어 있던 근육을 움직였다.
“주차하는 것도 주철이보다 훨씬 낫다.”
“에이 씨!”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동빈이 먼저 시비였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바닥에 있는 하얀 선에 정확한 비율로 주차를 한 것이다.
“또 시작이다. 뭐 먹을지나 결정하자.”
석진은 말싸움이 커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모두가 허기진 상태였기에 화제는 금방 바뀌었다.
“난 아무거나 양 많은 걸로.”
동빈의 선택 기준은 단순했다. 맛보다는 양에 큰 비중을 두었다.
“여긴 뭐가 맛있냐?”
반면 주철은 양보다 질인 스타일이었다. 결국 강원도에 살았다고 했던 석진에게 자문을 구했다.
“황태가 괜찮을 거다. 전골로 먹으면 되겠네.”
“좋다. 황태 전골로 통일. 오케이?”
석진의 추천을 주철이 곧바로 받아들였다. 음식점 간판에도 황태를 기본으로 하는 요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오케이. 대신 많이 달라고 그래.”
동빈까지 합세했으니 만장일치였다. 그들은 의견이 모이자 곧바로 식당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빨리 가자. 따듯한 식당에서 몸 좀 녹여야겠다. 6시간 동안 운전만 했더니 몸이 완전히 굳었다.”
“석진이 너는 먹을 것만 보면 힘이 솟아나냐?”
“흐흐흐. 빨리 안 뛰면 내가 다 먹어 버린다.”
“이런 비겁한 놈들!”
먹을 생각을 하니 괜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신나게 달려가는 동빈 일행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석진과 동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접전을 벌였고, 주철이 힘겹게 뒤를 따랐다.
식당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깨갱!
“웬 개 소리?”
동빈이 갑자기 멈춰 섰다. 욕이 아니다. 진짜 강아지의 비명이 들렸다.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짐작게 했다.
“헉헉… 힘들어 죽겠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자.”
“그럴까?”
주철은 귀찮다는 반응부터 보였다. 동빈도 개를 구하기 위해 나서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잠시 지체했던 발걸음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깨갱깨갱!
“끄악! 누가 좀 도와주세요!”
이번에는 여자의 비명도 함께 들렸다. 개 소리(?)에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던 주철의 태도가 달라졌다.
“시파! 어떤 새끼가 여자를 괴롭히고 난리야!”
“야, 밥부터 먹어야지!”
주철은 여자만 관련되면 힘이 솟는 모양이다. 비명이 들려온 쪽으로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다.”
동빈은 어찌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주철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할 것인가?
결정이 쉽지 않았다. 우선은 석진의 반응을 살피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석진의 반응에 따라 동빈의 행동이 결정될 것이 분명했다. 때마침 석진도 동빈을 향해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동빈아, 나 먼저 가서 황태 전골 시켜 놓을게.”
파다닥.
“…….”
석진은 뒤도 안 보고 뛰어갔고 동빈은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친구들이 양편으로 갈린 것이다. 주철은 여자를 향해… 석진은 밥을 향해… 어떻게 해야 할지 더욱 복잡해졌다.
“에이 씨!”
동빈은 주철을 향해 뛰어갔다.
밥이야 조금 있다 먹어도 상관없었다. 대책 없는 주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번 여행에 큰 지장이 생길 수 있었다.
“이놈의 새끼는, 여자 목소리만 들어도 환장을 하고 말이야!”
동빈은 최선을 다해 내달렸다.
빙판 길이 많았지만 동빈은 뛰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더욱더 속력을 높여서 주철이 사라진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촤르르.
“주철아, 괜찮냐?”
거의 미끄러지듯 들어선 동빈은 친구의 안전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멀리 있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뒷모습이 바로 주철의 것이 분명했다.
“뭐 하냐? 여자 구한다며?”
“그, 그게 말이다…….”
호기롭게 설치던 주철이 머뭇거렸다.
이럴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 구해야 할 여자가 매우 못생겼거나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그리고 두 번째는 싸워야 할 상대가 매우 껄끄러운 경우였지만 이런 일은 흔치 않았다. 대책 없는 주철이 상대에게 주눅 드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뭔데……!”
동빈은 주철을 밀치며 전방의 상황을 주시했다.
“제발 우리 아롱이 좀 살려 주세요!”
도움을 청하는 여자는 꽤나 괜찮았다. 주철이 뛰어들 정도는 충분했다. 그러나 싸워야 할 상대가 문제였다.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아저씨, 뭐 하는 거예요. 빨리 개 치워요!”
“이놈은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아!”
“그럼 우리 아롱이가 죽잖아요!”
“나도 미치겠다니까! 아무리 겁 없는 애완견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투견한테 덤비는 거야?”
근육으로 똘똘 뭉친 개는 예쁜 여자의 애완견을 물어뜯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물고 늘어지는지 개 주인도 포기한 상태였다. 심하게 깨갱거렸던 애완견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주철아, 정말 안 구해 줄 거야?”
“내가 총 맞았냐? 저 개는 투견의 제왕이라는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란 말이야.”
“아메리칸 핏불? 미 해병대의 마스코트?”
동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어 보긴 했지만 실물은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어디 마스코트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 저놈이 얼마나 무서운데… 한 번 물리면 끝장이야, 끝장!”
“그런가?”
동빈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검은색 털을 가지고 있었다. 코 주변부터 이마까지만 하얀색이었다. 온몸이 근육으로 똘똘 뭉친 것이 특징이었다.
“사납게 보이긴 하지만 덩치는 별론데?”
“동빈아, 덩치가 작다고 얕보면 큰코다친다. 저놈은 자신보다 훨씬 큰 도사견들도 가뿐히 이긴다니까!”
동빈이 나서려 하자 주철이 급하게 만류했다.
사람 대 사람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투견의 대명사인 아메리칸 핏불테리어였다.
“왜 그래? 난 괜찮다니까?”
“이건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핏불은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아. 입에 지렛대를 넣어도 떼어 내기 힘들어. 괜한 고생 하지 말자. 응?”
주철은 아메리칸 핏불테리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동빈을 보내 줄 수 없었다. 개 주인이 만류해도 소용없다면 포기해야 마땅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저 여자가 너무 안됐잖아? 우리가 뭐라도 해야지.”
“내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거든. 저번에 TV 보니까… 이럴 때는 레몬을 뿌리면 된다고 나왔어. 그러니까… 우선은 레몬부터 구해서 말이야…….”
“지금 레몬을 어떻게 구할 건데?”
“그러게?”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주철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레몬… 여기서 레몬을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차 타고 시내까지 나갈 것인가? 헐떡이는 애완견을 보니 조만간 숨이 끊어질 모양새였다.
“비켜 봐. 내가 알아서 할게.”
“개한테 물려도 난 모른다. 난 분명히 말렸어.”
동빈은 주철을 밀치며 나섰다. 이왕 구해 주기로 마음먹었기에 서둘러 끝낼 작정이었다. 아메리칸 핏불을 만류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주인을 향해 다가갔다.
“제가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
“성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이놈이 사람을 함부로 물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중년 남자는 동빈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했다.
애완견이야 개 값(?) 물어 주면 되지만 사람의 경우는 달랐다. 혹시라도 사고가 난다면 이만저만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좀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라니까! 낯선 사람이 달려들면 위험하다고!”
동빈이 대책 없이 다가서자 투견 주인은 기겁을 했다. 용감하다기보다는 무모함에 가까운 행동이란 표정이었다. 물론 도움을 청했던 애완견 주인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꽈악!
“……!”
동빈의 행동은 매우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