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 가는 길
지금은 새벽 5시가 갓 지난 시간.
장군의 차량이 명성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들어섰다. 밤부터 내린 눈 때문에 도로 곳곳은 빙판 길로 변해 있었다.
6시인 약속 시간은 충분히 지킬 수 있지만 예정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부르릉.
장군의 차량은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
그나마 스노타이어로 교체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끔 헛바퀴가 돌기도 했지만 뒤로 밀리지는 않았다. 밤새 내린 눈이 꽁꽁 얼어 버리면서 언덕길이 난리도 아니게 변한 것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걷는 사람들과 조심조심 거북이 운행을 하는 차량들… 새벽이라 다행이지만 출근 시간이 되면 더욱 복잡하게 변할 것이 분명했다.
“장군님. 뉴스 좀 듣겠습니다.”
운전기사는 학교 앞에 차를 멈춰 세우고 물었다. 장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장군의 허락이 떨어지자 운전기사는 라디오를 켰다. 그러고는 자신이 원하는 채널을 선택했다.
-네, 새벽길 교통 정보입니다.
운전기사가 선택한 채널은 교통 방송이었다. 동빈을 보내고 나서 곧바로 장군을 태우고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라디오 소리에 바싹 귀를 기울였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 내린 눈으로, 서울 북악산과 인왕산 길 일부 구간의 통행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 경기와 그밖의 지역에 2∼10cm의 눈이 더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항공편의 경우 국내선과 국제선 모두 정상 운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량들의 접촉 사고가 잇따르고 있으니 운전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새벽 4시 20분쯤 서울 동작대교 상행선에서 승합차가 빙판 길에 미끄러지면서 앞서 가던 1.5톤 트럭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조용한 차내에는 여성 아나운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빙판 길이라 접촉 사고가 잇따랐다. 동빈과 장군은 사고 소식을 자장가 삼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저 차인가?”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몸을 앞쪽으로 숙였다.
하얀색 승용차가 조심스럽게 반대편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살짝 시계를 살펴보니 5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운전기사는 승용차가 명성고등학교 정문에 멈춰 서자 동빈을 깨웠다.
“동빈 학생. 혹시 저기 있는 하얀색 차량 아닌가?”
운전기사의 나직한 목소리에 동빈이 눈을 떴다.
동빈은 원체 살기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민감하게 작용했다.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이었다. 직업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 친구들이 맞습니다.”
동빈은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장군님 깨어나시면…….”
“아니다. 나도 일어났다.”
장군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 역시 피곤함에 찌든 음성이었지만 끝까지 배웅을 하려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장군님.”
“그래… 재미있게 놀다 오너라.”
“교관님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알았다. 그리고 이거 말이다.”
“……?”
장군이 봉투를 꺼내자 동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 지령이라도 전달하는 것인가? 동빈은 뭐가 담겼는지 짐작조차 못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주는 용돈이다. 이번 여행에 보태 써라.”
“가, 감사합니다…….”
동빈은 우물쭈물하며 봉투를 받았다. 이런 곳에서 용돈을 받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빈이라, 봉투를 받는 품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리고 말이다…….”
장군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말씀하십시오, 장군님.”
“그게 말이다…….”
동빈의 독촉에 장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기에 장군이 이처럼 고심하는 것인가? 동빈의 호기심은 점점 증가했는데…….
“별건 아니다. 내가 준 용돈은 반드시 써야 한다. 물론 그동안 모은 돈이 상당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 돈은 꼭 남기지 말고 쓰거라. 알겠느냐?”
“아…알겠습니다.”
진짜 별것 아니었다. 이런 말 때문에 장군님이 망설였단 말인가? 동빈은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가 곧바로 표정을 수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딸깍.
가방을 멘 동빈이 차 문을 열고 나섰다. 장군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며 동빈을 배웅했다.
뽀드득뽀드득.
동빈은 큰 걸음으로 친구들을 향해 걸었다.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길이 많았다.
동빈은 눈 밟는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장군은 그런 동빈을 차 안에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장군님. 출발할까요?”
“오늘도 일정이 빡빡한 편이지?”
“그렇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내려서…….”
“어서 출발하게.”
부릉부릉.
장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게 회전을 하면서 방향을 틀었다. 운전 실력이 좋은지 눈길에도 차량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동빈은 잠시 멈춰 서 장군의 차를 바라보았다.
재빨리 방향을 바꾼 차는 서둘러 언덕길을 내려갔다. 차량이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동빈이 움직였다.
딸깍.
동빈은 차량 뒷문을 열었다.
이미 앞자리는 만원이었다. 운전석은 석진의 몫이었고 조수석은 주철이 점거한 상태였다.
“너희들 생각보다 빨리 왔다?”
동빈은 가방부터 집어넣으며 말했다.
약속한 시간은 6시. 석진과 주철은 30분이나 일찍 온 것이다.
“새벽에 눈이 와서 일찍 출발했다. 눈길이라 석진이에게 운전 맡기는 게 불안해서…….”
“그럼, 주철이 네가 운전할 거냐?”
꽝.
동빈은 뒷문을 닫으며 물었다.
베테랑 운전자도 눈길 운전은 쉽지 않았다. 석진이가 불안하면 다른 사람이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럴 필요는 없겠어. 석진이 놈이 제법 하더라고…….”
“주철아,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너보다 훨씬 낫거든.”
“누, 누가 뭐래… 동빈아, 석진이 운전깨나 하더라고…….”
주철은 조용히 꼬랑지를 내렸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아니던가? 동빈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고속도로 막히기 전에 출발한다.”
석진은 말싸움의 종지부를 찍고는 운전대를 잡았다.
빙판 길에서 운전하는 모습이 제법이었다.
엔진브레이크를 써서 조심스럽게 언덕길을 내려갔다. 당황해서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핸들을 심하게 꺾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지만 일정한 속도로 언덕길을 주행하는 게 확실히 안정감 있었다.
“주철아, 진짜 너보다 잘하는 것 같은데?”
“…….”
이 정도 솜씨라면 진짜 주철이보다 낫다고 해도 무방했다. 외국에서 레이싱을 했다는 주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평소 석진을 흠모(?)했던 동빈의 칭찬 공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석진이, 넌 정말 내 우상이다. 공부 잘하지, 성격 좋지, 여자 친구도 있지. 엄청난 효자에다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이제는 운전까지 기가 막히게 하는구나.”
“운전 좀 하는 걸 가지고 뭘…….”
석진은 동빈의 칭찬이 매우 부담스럽다는 반응이었다.
“무슨 소리! 당연히 칭찬을 받아야지. 그런데 운전은 언제 배웠냐? 빙판 길 운전을 상당히 잘하네?”
“아버지가 카센터를 운영하셨거든. 강원도 쪽에서 했었는데… 시골이 그렇지 않냐? 아버지에게서 운전을 좀 배웠지.”
“그, 그렇구나…….”
조금은 뜻밖이다. 호기심 많은 동빈이 웬일인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석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꽉 잡아라.”
부르릉!
언덕을 내려오자 차량의 속도가 빨라졌다. 거친 엔진 음향과 함께 큰 도로로 접어든 것이다.
차량이 많이 다니는 도로는 어느 정도 제설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상당히 빠른 속력으로 학교 주변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