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한 총성 뒤에 찾아온 정적.
동빈은 고개를 사선으로 돌린 상태였다. 물론 총에 맞은 것은 아니었다. 산산조각 난 도자기 파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이 울렸어… 1라운드 끝이라는 소리지.”
“…….”
공 소리치고는 너무나 과격했다. 경호원을 완전히 끝장내려는 것을 박천수가 방해한 것이다. 동빈은 다시 박천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권총에서는 하얀 연기가 흐르고 있었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박천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총을 무서워하지 않는 표정이잖아? 일부러 시범까지 보였는데 말이야.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지?”
그는 의외로 담담한 동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총을 뭐로 보고… 장난감 총을 바라보는 모습과 흡사했다.
“베레타 92FS. 미군 제식명 M9… 괜찮은 권총입니다. 초보자들이 쓰기에는 무난한 총이지요.”
“몰라서 용감했던 놈은 아니었군. 그럼 조용히 비켜 주실까?”
박천수는 권총을 살짝살짝 움직였다. 경호원이 일어날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서란 뜻이었다.
“왜 싸움에 끼어드는 겁니까?”
“내 경호원은 야쿠자 세계에서도 유명한 존재야. 매우 비싸게 데려온 놈이라는 뜻이지.”
“별로 제값을 못 하는 것 같은데요?”
“누구나 한 번은 실수를 하는 법이지. 어서 비켜 주시지.”
동빈은 천천히 두세 걸음 물러섰다. 경호원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지만 충격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박천수는 다시 동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직 학생이라고 했지? 이런 소리는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혹시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절대 없습니다.”
동빈의 대답은 너무나 확실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모습은 강한 부정의 뜻이었다. 그러나 동빈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박천수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대우는 최상급으로 해 주지. 몸값으로 얼마를 원하나?”
“전 많이 비싼데요?”
“요즘은 건달 생활도 할 만하지. 나처럼 잘나가는 놈들은 최고급 아파트에 외제 승용차는 기본이야. 실력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보수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지. …도대체 얼마를 원하나?”
박천수는 금액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러자 곧 그의 집요함에 화답하듯 동빈이 입을 열었다.
“연간 천만 달러는 기본입니다. 작전에 성공하면 추가적으로 2천만 달러. 물론 작전의 규모에 따라서 수고비는 달라집니다.”
“천만 달러면 100억인데… 작전에 투입될 때마다 200억 이상이라고? 싫다는 말을 꽤나 돌려서 하는군.”
“날 탐내는 조직은 많았습니다. 내가 아는 것만도 120개 나라와 500여 개의 비밀단체가 넘습니다. 당신이 그 정도의 거물이라면 생각해 보지요.”
“총을 보고도 담담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데… 혹시 마피아와 연관이 있는 놈인가?”
“그런 하급 조직이 저한테 명함이나 내밀 수 있겠습니까?”
“……?”
박천수도 슬슬 헛갈리기 시작했다. 말하는 것이나 실력이나, 보통 학생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피아도 우습게볼 정도라니? 동빈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나한테 총을 겨누고 무사할 수는 없습니다. 칼까지는 웬만큼 봐주지만 총은 매우 위험한 물건이라…….”
“이 바닥에선 배짱이 좋을수록 알아주지만 그것도 어지간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자넨 줄 알겠어?”
박천수는 동빈의 다리 쪽을 겨누고 있던 총을 치켜 올렸다.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아니, 누가 총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려 주려는 행동이었다.
“그까짓 총으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윽.
동빈의 반응은 막무가내에 가까웠다. 정면으로 총을 겨누고 있는 박천수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이다. 한번 붙어 보자는 뜻이었기에 박천수가 당황할 정도였다.
“뭐야? 진짜 미친놈이었어?”
“미친 건 당신이지…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아직도 총을 들고 있잖아?”
“경고하는데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파파팟.
동빈은 항상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박천수가 위협하려 팔을 쭉 뻗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경호원 뒤로 몸을 감춘 것이다.
“……!”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가장 난감한 것은 경호원이었다. 앞에서는 보스가 총을 겨누고 있었고 뒤에서는 동빈이 쳐들어왔다.
후앙.
일단은 동빈의 공격부터 막아야 했다. 경호원은 몸까지 휘청거리면서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상대의 접근을 막겠다는 의도였지만 이에 주춤할 동빈이 아니었다.
빠악.
팔목으로 경호원의 공격을 막아 내며 그대로 밀어붙였다. 엄청난 충격음이 울려 퍼졌지만 동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최대한 경호원과 몸을 붙여서 박천수를 당혹케 했다.
“이런, 젠장……!”
그는 자신의 경호원 때문에 함부로 총을 쏠 수 없었다. 비싸게 데려온 인물 아니던가?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빈과 경호원을 그냥 바라볼 뿐이었다.
우둑.
“크억!”
뼈 부러지는 소리에 박천수가 다시 총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경호원의 얼굴이 보였다. 축 늘어진 팔을 보아 어깨가 탈골된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뒤. 경호원을 완전히 제압한 동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비싸게 데려온 사람을 함부로 죽이진 않겠지요?”
“…….”
동빈은 팔목으로 경호원의 목을 감쌌고, 비싸다고 정평이 나 있는 경호원은 괴로운 듯 인상만 쓰고 있었다. 박천수도 총으로 겨냥한 상태만을 고수했다.
“얼마나 사격 솜씨가 좋은지 볼까요?”
“무, 무슨 짓이냐!”
동빈은 경호원을 앞세우고 박천수를 향해 다가갔다. 쏘려면 재주껏 맞혀 보라는 뜻이었다.
“내 팔목은 겨냥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괜히 경호원의 목까지 관통할 수 있습니다.”
“사람 미치게 하는구만.”
박천수는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경호원의 체구가 만만치 않기에 겨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호원을 희생시킬 수도 없었다. 정확히 따지면 야쿠자에게서 임대를 한 것이다.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부하들을 매우 아끼는… 아주 마음씨 좋은 보스였군요.”
“젠장, 진짜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었잖아……!”
박천수는 이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동빈의 차분한 행동이 문제였다. 유명한 마피아 킬러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주눅이 드는 자기 자신을 느꼈다.
“상당히 미련하시군요. 총은 위협용이 아니라 살상용입니다.”
순간, 동빈은 경호원을 밀치면서 뛰어들었다.
“……!”
박천수는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것조차 까먹은 모양이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타앙!
뒤늦게 총성이 울렸다.
측면으로 뛰쳐나오는 동빈을 노린 것이다. 자세는 괜찮았지만 동빈을 맞히지는 못했다. 애먼 유리 장식장만 박살 나고 말았다.
와장창!
“제기랄!”
박천수의 마음이 급해졌다. 맨손으로 동빈을 상대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총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다. 재차 총을 쏘려고 서둘러 자세를 잡았지만 동빈의 종적을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도대체…….”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총에 집착했다 해도 바로 지척에 있던 상대를 놓치다니? 박천수 자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화앙.
“염병!”
강력한 파공음에 박천수의 욕설이 쏟아졌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살벌한 음향이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생명까지 위태로울 분위기였다.
박천수는 최대한 빨리 몸을 돌리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우르르.
요란한 총성과 함께 뿌연 흙먼지가 쏟아졌다. 동빈에게 손목이 잡힌 박천수는 애꿎은 천장을 향해 총을 쏘고 말았다.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박천수의 얼굴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이, 이봐… 소, 손은 놓고 이야기하지…….”
“…….”
박천수는 애원조로 말했고 동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박천수의 손목을 잡은 손에 점차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야! 이, 이거 놓고 이야기하자니까!”
거북한 비명과 함께 박천수의 몸은 천천히 무너졌다. 손목이 완전히 꺾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릎까지 꿇은 형편이었다.
“제, 젠장! 초, 총 버린다니까!”
툭.
최후의 보루였던 총까지 떨어뜨렸다. 어차피 손목이 잡혀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지만 동빈의 거친 행동은 계속되었다.
우둑.
“크악! 씨발…….”
결국 박천수의 손목은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판사판이라 느꼈는지 그의 독기가 되살아났다. 박천수는 잔뜩 인상을 쓴 상태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후웅.
“……!”
고개를 들자마자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때마침 동빈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푸억!
“커억…….”
가공할 파괴력의 동빈의 무릎 공격!
박천수는 뒤통수 대신 안면이 박살 나고 말았다. 한참이나 날아간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박천수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벽면에 기대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크윽… 그, 그만 하자…….”
“누구 맘대로?”
동빈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피를 흘리는 모습이 불쌍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완전히 끝장을 보려는지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 그만! 도, 돈을 주겠다.”
“…….”
박천수는 더 이상 맞기 싫었다. 방금 맞아 본 경험 때문인지 바싹 겁먹은 표정이었다. 조직 폭력배의 보스라는 신분도 동빈의 무력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진 것이다.
“어, 얼마를 원하나?”
“참… 요즘은 돈으로 보스를 삽니까?”
끄덕끄덕.
박천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주먹으로 보스가 되는 시절은 지났다. 돈이 있어야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다. 어둠의 세계도 이제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말 짜증 나게 하는군요.”
스윽.
동빈은 한 발짝 물러서며 땅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박천수를 향해 정면으로 겨누었다.
“……!”
박천수는 당연히 사색이 되었다.
고등학생인 동빈이 총을 들고 있으니… 위험한 무기를 들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기겁을 하며 황급히 물러나려 했다.
“조, 조심해! 진짜 총알이 들었어!”
“매우 소심한 보스군요?”
“젠장칠! 초, 총 치우란 말이야!”
박천수는 발악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다. 동빈이 멋모르고 방아쇠를 당긴다면? 불안한 마음 때문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요?”
“무, 무슨 소리…….”
약간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박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동빈이 보충 설명을 했다.
“나는 한 번 겨눈 총을 거두지 못합니다. 살고 싶으면 당신이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소리지요.”
“……?”
“정확히 열을 세고 쏘겠습니다.”
“……!”
박천수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장난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살고 싶으면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하나… 둘… 셋…….”
벌떡!
박천수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출입문 쪽으로 급히 달아나려 했지만 동빈이 비켜 주지 않았다.
“젠장! 비, 비키란 말이야!”
“넷… 다섯… 여섯…….”
동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 수를 셌다. 속이 타는 것은 박천수 쪽이었다. 출입문이 막혔으니 다른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일곱… 여덟…….”
“씨발! 대체 어디로 나가란 말이야!”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자꾸 흘렀고 위기의 시간은 점점 더 다가왔다.
“아홉…….”
“에이… 씨발!”
타타타.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박천수는 창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이곳은 3층이지만 실제로는 4층이 넘는 높이였다. 게다가 바닥은 시멘트로 포장된 상태.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눈앞의 총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마지막… 열.”
와장창!
박천수는 창문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박천수의 얼굴은 난감한 빛이 역력했다.
타앙!
“이런 미친! 저놈 진짜 쐈어!”
박천수는 반사적으로 귀를 움켜잡았다.
총알이 귀를 스친 것인가? 고막이 손상되었는지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래도 생명은 구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상당히 추운 것을 빼고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조, 졸라 높다.”
괜한 느낌 때문인가? 한참이나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아무래도 박천수의 예상보다 훨씬 높은 것 같았다.
철퍼덕.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폭들이 몰려들었다.
“보스가 자살하셨다!”
“미친놈! 아직 살아 계시잖아! 어서 구급차 불러!”
왜 갑자기 보스가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일까?
조폭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보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순서였다.
조폭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자 주변은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누가 보스를 민 거 아니야?”
“그, 글쎄? 아무도 없는데?”
3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동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