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6/224)

털컹.

동빈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딸깍.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자 방의 전경이 드러났다. 조금 넓은 것을 빼면 보통 학생들의 방과 다를 바 없었다.

기역 자로 꺾인 대형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모니터가 있었고, 책장에는 각종 참고서와 음악 관련 서적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차라리 빨간 옷만 입을까…….”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세탁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버린 옷만 해도 몇 벌인지… 동빈은 조용히 한숨지으며 웃옷을 벗었다.

“핸드폰부터 충전을 하고…….”

여행의 필수품 아니던가.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고는 나머지 옷도 모두 벗어 던졌다. 모두 쓰레기통으로 향할 운명이었다.

끼익.

알몸이 된 동빈은 욕실로 향했다.

“심하다…….”

욕실에 달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예상대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이게 사람이야…….”

얼굴 전체가 피로 물들었고 머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피로 염색을 한 것 같았다. 덕지덕지 뭉텅이졌기에 어찌 보면 노숙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전쟁이 시작되었지…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끼익.

마음을 가다듬고 샤워기를 틀었다.

쏴르르.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피 얼룩을 씻어 냈다. 김이 오르면서 점점 따듯해지는 느낌도 좋았다.

동빈의 몸을 타고 내린 핏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하얀 타일을 따라 하수구 속으로 사라졌다.

샤워를 끝낸 동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박박박박.

물에 젖은 머리를 말리며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8시가 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스륵.

급히 통화할 곳이 있는 것인가?

동빈은 핸드폰 충전기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도 빨간 불. 계속 충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집 전화 쓰는 것도 오랜만이네.”

대충 속옷을 입고는 무선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띠띠띠띠띠.

번호를 누르고는 통화가 되기를 기다렸다. 지루하진 않다. 머리를 말리는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남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말리던 동빈의 손길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주철아, 목소리 깔지 마라. 나 동빈이다.”

-에이… 씨! 이게 집 전화였냐?

주철의 본래 목소리가 나왔다. 낯선 번호라서 헛갈린 모양이다.

“이놈이 친구 번호도 모르고 말이야. 또 여잔지 알았지?”

-시끄럽고! 무슨 일인데 전화야, 내일 만날 놈이? 6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얼마 남지도 않았네. 설마 또…….

주철의 음성이 잔잔히 떨려 왔다. 사고 치고 뒷수습을 부탁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안심해라. 그런 거 부탁하는 거 아니다.”

-그럼 무슨 일이야? 오늘 푹 쉬어야 내일 일찍 일어날 거 아니야? 애들처럼 들떠서 잠이 안 와?

“나도 말 좀 하자.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조금 늦을 것 같아.”

-얼마나 늦을 것 같은데?

“나도 잘 모르겠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냐?

“…….”

동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위험한 일이라 친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너도 사정이 있겠지.

“미안하다. 내일 만나서 말해 줄게.”

주철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동빈이 말을 아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너무 많이 늦지는 마라.

“고맙다. 내일 보자.”

부슥.

전화를 끊은 동빈은 다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이제야 사람 꼴이 되었다. 뽀얀 피부는 아니지만 피 얼룩은 사라지고 없었다.

스윽스윽.

몇 번 빗질을 하자 무질서하게 뻗쳤던 머리카락이 정돈되었다. 물기도 많이 가신 상태였다. 헤어드라이어까지 쓸 필요도 없었다.

“이제 짐을 챙기고 옷을 입으면 되는데…….”

본격적인 여행 준비로 들어섰다. 짐을 넣을 가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별로 티는 안 나겠지?”

동빈이 찾은 것은 군대에서 썼던 배낭이었다.

특별히 제작된 것이라 짐도 많이 들어가고 방수도 철저했다. 색상도 단순하여 군용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양말… 속옷… 세면도구…….”

동빈은 필요한 물건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꼼꼼한 준비가 여행의 핵심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야전삽은 필요 없고… 반합도 필요 없고… 그럼 뭘 넣지?”

군장을 싸는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인가? 군용 물품을 빼고 나니 허전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맞다. 옷이 문제지…….”

그냥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피 튀기는 여행이 될 것이다.

싸울 때마다 옷을 버려야 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옷가방을 따로 꾸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동빈은 옷장 쪽으로 다가갔다. 방에 있는 가구 중에서 옷장이 가장 컸다. 군복과 사복을 한꺼번에 보관해야 했기 때문이다.

털컹.

동빈은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평소에는 반쪽만 사용했던 문이었다. 교복과 사복은 오른편에 그리고 군복과 특수복은 왼편부터 걸려 있었다.

“흠…….”

동빈은 잠시 고심에 빠졌다.

이번에는 군복 몇 벌을 챙기기로 결심했다. 피가 묻어도 상관없는 특수복을 염두에 두었다. 다만 사복과 군복을 어떻게 배분할지가 관건이었다.

스윽스윽.

동빈은 사복부터 결정했다.

두툼한 겨울옷 몇 벌을 골라서 침대에 던졌다. 그러고는 군복이 있는 왼편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슥부슥.

최대한 군복 티가 안 나는 것을 위주로 했다. 두어 벌을 침대에 던지고는 침투복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입고 가는 게 편하겠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정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의 싸움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스륵.

동빈은 침투복을 입기 시작했다.

놈들의 본거지에 도착해서는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다.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침투복은 진한 검정색이었다. 군복이란 느낌은 없었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신 거울에 모습을 비췄는데, 예상보다 더 심한 결과가 나타났다.

“진짜 도둑놈이 따로 없네!”

영화에 등장하는 도둑들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검은색 침투모까지 쓰고 나니 완벽하게 똑같았다.

“잠시니까 뭐…….”

지금은 개성 시대 아니던가? 생각을 바꾸니 그리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옷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기에 마음은 편해졌다.

멈칫.

옷장을 닫으려는 동빈의 손길이 주춤했다.

빠뜨린 것이라도 있는 것인가? 옷걸이 아래에 있는 서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맞아… 이건 전쟁이지.”

드르륵.

동빈은 굳은 표정으로 맨 위 서랍을 열었다.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형광등 빛을 받아 번쩍이는 칼날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온갖 종류의 칼들을 모아 놓았다. 대부분 단검이었고 특수부대의 수중 침투용, 지뢰나 폭발물 제거용, 사냥용과 격투용 등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스윽.

동빈은 크고 오목한 형태에 완만한 날을 가진 단검을 집었다. 한참을 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른 것을 집어 들었다. 넓은 검신에 약간 둥그런 모양을 가진 칼이었다. 앞쪽에는 톱날처럼 깎아 놓은 부분도 있었다.

“아직은…….”

동빈은 조용히 서랍을 닫았다.

칼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잔인한 조폭들을 상대하려면 어느 정도 대비를 해야 했다. 다만 칼을 들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껄끄러운 것이었다.

드르륵.

동빈은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무기들은 아니었다. 몸에 걸치는 수많은 특수 장비들이 드러났다. 손이나 발 그리고 어깨에 찰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물론 사용법은 동빈만이 알고 있었다.

“이거 정도면…….”

동빈이 선택한 것은 장갑이었다. 특수작전에서 쓰던 물건이었지만 큰 기능은 없었다. 피아노를 쳐야 했기에 손만은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벌떡.

배낭을 멘 동빈이 몸을 일으켰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떠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스윽.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서둘러야겠는데.”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예상보다 짐을 챙기는 시간이 길어진 결과였다.

“빠진 건 없겠지…….”

마음속으로 중요한 사항만 점검했다. 설령 빠졌다 해도 현지에서 구할 수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좋아, 이제 하나 남았군.”

동빈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단축키를 눌렀다.

최신곡의 통화연결음이 흘러나왔다. 신나는 댄스곡이지만 동빈의 표정은 점점 껄끄럽게 변했다. 반가운 인물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어머! 동빈 오빠!

그러나 상대는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 선아냐?”

-네, 선아예요. 이게 웬일이래요,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말이에요. 오빠 방학했죠? 나하고 영화 보러 가요. 저번처럼 전쟁 영화도 괜찮아요. 나도 군복 준비했어요.

“미안한데… 나 전쟁 영화 안 좋아하거든.”

선아가 완전히 잘못 짚었다. 그때 동빈은 어쩔 수 없이 전쟁 영화를 본 것이다.

-그럼 멜로 영화 보러 가요. 아니면 공포 영화? 나는 장르를 안 가리고 보니까 오빠가 결정해요. 요즘은 판타지나 SF도 괜찮고요. 맞다! 액션 영화 어때요?

“…….”

선아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동빈이 먼저 전화를 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은 없었지만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저기…….”

-네, 어서 말해 봐요!

동빈이 입을 열자 선아가 조용해졌다.

“영화는 나중에 보고…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거든.”

-당연히 들어줘야죠. 뭔데요? 돈도 빌려 줄 수 있고요. 여자 친구 역할도 대환영이에요.

“내 팬카페에 공지 좀 넣어 줘.”

-에게? 고작 그거예요…….

선아는 실망이라는 반응이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야 만날 구실을 만들 것 아닌가? 팬카페의 공지 하나 올리는 것은 너무 쉬운 부탁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써.”

-네…….

선아는 받아 적을 준비를 끝냈다. 대충만 적어 놓고 나중에 컴퓨터 작업을 하면 금방 끝날 일이었다.

“학교 폭력 자진 신고 기간…….”

-오빠? 그거 끝난 지가 언젠데요? 지금은 학교 폭력 집중 단속에 들어갔어요. 가해 학생은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하는 동시에 상담 치료 등 선도 활동도 지속적으로 실시할 방침이라고…….

“경찰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제목은 학원 폭력 자진 신고 기간. 대상은 전국에 있는 모든 일진.”

-어머! 어머! 드, 드디어 전국 평정 나선 거예요!

선아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전국에 있는 일진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아야? 김동빈이 전국 평정 나선 거야? 그런 거야?

-시끄러 이년아! 전화 받고 있잖아.

-빅뉴스! 빅뉴스! 김동빈이 전국 평정 나섰대!

-시끄럽다고, 이년들아!

선아 혼자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녀 친구들의 격양된 목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에게 가히 메가톤 급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오빠. 친구들이 있어서…….

“내가 부른 거 다 적었어?”

-어디 보자… 제목은 학원 폭력 자진 신고 기간… 그리고 대상은 전국에 있는 모든 일진.

“좋아, 그러면 이어서 적어. 만약 자진 신고를 하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조치가 뒤따를 것이다.”

동빈은 차분하게 말했고 선아는 신중하게 기록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라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다 적었어요. 그런데요, 자진 신고 기간이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라는 게 있어야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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