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4/224)

드르륵.

동빈은 피아노 학원을 나섰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을 너무 소비한 것 같다. 간단한 레슨을 받고 일주일 쉬겠다는 뜻을 전하고 나왔는데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빈은 해가 지면서 더욱 추워진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이 켜 있는 대로를 지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골목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이 길이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

누군가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상당히 호감 가는 얼굴이었고 동빈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여긴 웬일이야?”

갑자기 나타난 인물은 윤호였다. 동빈은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윤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웬일은… 그냥 지나다가 들렀지.”

“나는 누가 뒤를 밟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

“진짜로 미행을 한 건 아니야. 이곳은 나도 잘 알고 있거든. 기태하고 몇 번 왔었는데… 피아노 원장님은 잘 계시나?”

“안부 묻고 다니는 게 취미야?”

씨익.

윤호는 대답 대신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 정도 동빈의 말에 수긍한다는 반응이었다.

“여행 떠난다고 하던데… 준비는 다 끝났어?”

“어떻게 알고 있지?”

“나도 소식통은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함무라비 프로젝트라… 너의 코드도 7로 시작되는 거였나?”

“둘만 있는 경우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기밀 사항을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텐데?”

동빈의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입김이 펄펄 나는 날씨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충고는 새겨듣지. 군을 제대한 지 하도 오래되어 놔서…….”

“함무라비 프로젝트를 기억할 정도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알고 있는 것은 아마 2차 프로젝트일 거야. 내가 배치된 작전이 1차였지. 그나저나 학원 폭력 전체와 전쟁을 선포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보네. 매우 위험한 작전명을 따다 붙였으니 말이야.”

“내가 제대한 지 얼마 안 돼서… 달리 생각나는 게 있어야지.”

동빈이 제법이다. 항상 말싸움에서 밀리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피장파장인 상황을 만들어 윤호를 다시 웃음 짓게 했다.

“이젠 사회인 다 됐는데? 그 정도면 전국 연합이나 학생 조폭의 술수에 걸려 어이없이 당할 일은 없겠어.”

“쉽게 당할 거면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어.”

“전쟁이라고 하니 장군님의 말씀이 기억나네.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수단과 방법이 용인되는 것일까?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었지.”

“너한테만 특별히 말씀하신 게 아니지. 나도 많이 들어 본 말이야.”

동빈은 이럴 때가 가장 기분 나빴다.

아들인 자신보다 장군을 더 잘 알고 있다는 말투와 행동. 윤호를 만날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난 장군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 주권국가라고 하면서도 국방에 대해서조차 자주권이 없으니 말이야. 핵을 갖지도 못했고, 미사일이나 다른 첨단 기술의 제약은 날로 심해지기만 하니… 그나마 제약을 덜 받는 인력에 승부를 걸어야겠지. 동빈이, 너 같은 괴물 하나만 잘 키워도 대단한 전력이 되겠지.”

“어이, 추워 죽겠는데 쓸데없는 칭찬만 할 거야?”

“난 칭찬한 게 아닌데.”

“……!”

동빈은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직감했다.

윤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함무라비 프로젝트. 전쟁 시 상대국으로 잠입, 본토에서 아군이 희생된 만큼 적들을 처리한다. 강대국일수록 자국민의 희생을 두려워하게 된다. 전쟁터에서 몇 명이 죽는 것보다 여배우의 스캔들이 더 큰 관심을 받는 게 현실이지. 동빈이 너는 몇 명이나 해치울 수 있을까? 나보다는 많이 처치할 수 있겠지?”

“그만… 1급 비밀 누설… 즉결 처분 대상이지.”

촤라락.

동빈은 말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강력한 발차기로 윤호의 얼굴을 공격했다. 파워보다는 신속함이 두드러지는 장면이었다.

쩌엉.

윤호는 손목으로 동빈의 발차기를 막았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하다. 쇠망치로 철판을 내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목에 뭘 찬 거야?”

“일대일로 붙어서 살극무를 배운 사람을 이길 수는 없지. 번거롭지만 널 만날 때마다 많은 준비를 하는 편이다. 너도 잘 아는 장비들이야.”

“특수 장비 불법 소지… 죄가 점점 늘어나는데?”

동빈은 뻗었던 다리를 회수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윤호가 특수 장비를 착용했다면 쉽게 제압하기 힘들었다.

“우리끼리 싸우면 장군님이 섭섭해하시지 않을까? 최소한 기태를 죽인 놈들은 처치하고 우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난 규칙대로 행동할 뿐이야.”

“내가 소란을 피우면 장군님의 입지가 또 흔들려. 그냥 말로 해결하는 게 좋을 덴데?”

“미안하지만 네놈은 소란을 피우지 못할 거야.”

“내가 장군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인가?”

“아니… 내가 금방 끝내 줄 테니까!”

사락.

동빈은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공격을 펼친 상태였다.

파공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은밀했기에 윤호가 의식을 못 한 것이다.

“……!”

윤호가 반응한 시점은 동빈의 발이 지척까지 이른 다음이었다.

스팟.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튀었다.

동빈의 발끝이 윤호의 얼굴에 스친 것이다. 그리 많은 양의 피가 튀지는 않았다. 윤호의 반사 신경이 뛰어났기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화화확.

동빈의 현란한 손 기술이 뒷걸음치는 윤호를 압박했다.

살극무의 연속 동작이 펼쳐진 것이다. 속전속결. 빠른 시간 내에 윤호를 제압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사사사삭.

살극무의 위력은 대단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윤호가 꼼짝 못하고 당하는 형국이었다. 윤호는 엄청난 속도로 물러났지만 동빈의 접근을 따돌리지 못했다.

후웅.

“……!”

각도가 전혀 없는 곳에서 동빈의 발차기가 쏟아졌다.

뒷걸음치기 급급한 윤호에게는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다. 물러서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동빈의 발차기를 간과할 수도 없으니… 윤호의 최종 선택은 정공법이었다.

빙그르.

순간적으로 몸을 틀면서 동빈의 발차기를 피해 냈다.

스팟.

고개를 조금만 늦게 돌렸다면 큰 부상을 당했을 위기였다. 귀가 약간 찢어지는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했다. 이제는 다시 뒷걸음치면 되는 상황. 그러나 윤호는 눈앞이 허전함을 느껴야 했다. 동빈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뒤……!”

기척을 파악했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윤호의 목을 검은 그림자가 휘어 감기 시작한 것이다. 윤호는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꾸악.

“크윽…….”

윤호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목을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동빈이 계속 힘을 준다면 목뼈가 으스러질 수도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게 뭐지?”

윤호를 불쌍하게 생각한 것인가? 동빈은 더 이상 힘을 주지 않고 물었다.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만 유지했다.

“벌써 잊었나? 난 특수 장비를 착용했어. 특수 장비에는 무기도 포함되거든. 너 정도면 내가 뭘 쥐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장군님도 꽤나 고생하시겠지.”

윤호의 한쪽 손이 안쪽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두꺼운 외투 때문에 밖에서는 무언지 알 수 없었다. 동빈이 힘을 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너 완전히 미쳤구나.”

“수많은 작전에 참가했으니 죽음을 초월한 지 오래지.”

“조용히 풀어 줄 테니까 허튼짓은 하지 마.”

“아니지, 그럼 내가 손해잖아. 너하고 같이 죽는다면 나한테는 영광이거든.”

“그래서? 같이 죽자는 소리야?”

동빈도 죽음에 대해 초월한 지 오래였다. 자신의 목숨보다는 장군의 안위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었다.

“내 질문에 답변을 해 줘. 그러면 조용히 떠나지.”

“뭐가 그리 궁금한 거야.”

“아까 물었잖아. 적국의 수도에 잠입하면 몇 명이나 해치울 수 있지? 말해 봐. 어차피 나밖에 들을 사람이 없잖아.”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 동빈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윤호가 알아챌 리 없었다.

“적군의 전투력에 따라 다르다. 일반 특수부대면…….”

“아니, 아니! 군인에 한정 짓지 말고 민간인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함무라비 프로젝트에 민간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오직 적군만을…….”

“이를 어쩌지? 1차 계획은 조금 달랐는데?”

“……!”

동빈이 참가한 함무라비 프로젝트는 2차였다. 원조인 1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동빈이 입을 다물자 윤호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 임무는 적국의 민간인을 해치우는 거였어. 우리 땅에서 어린이 한 명이 죽으면 적국의 어린이를 찾아 죽이고… 젊은 여자가 죽으면 젊은 여자를… 노인이 죽으면 또 노인을… 이것이 바로 전쟁의 함무라비 법칙이야.”

“…….”

“왜 아무런 대꾸가 없지? 내 말을 믿지 못하겠어?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수단과 방법이 용인되는 것일까… 내가 코드를 부여받았을 때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지.”

“나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데? 힘들었겠다, 안됐다, 졸라 불쌍하다, 이런 말이 듣고 싶어?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거야. 장군님이 그렇게 명령했으면 당연히 따랐어야지.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아.”

“후후… 역시 대단한 놈이야…….”

조금은 의외의 장면이다. 동빈이 강하게 나오자 윤호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잔인한 임무를 수행했던 과거와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표정이었다.

“징그럽게 웃지 말고 질문을 다시 해. 아니면 대충 내가 꾸며서 말해 줄까?”

“그럴 필요 없어. 벌써 충분한 대답을 들은 것 같거든. 이제 목 좀 풀어 줬으면 좋겠는데.”

스륵.

동빈은 윤호의 목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자유의 몸이 된 윤호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 상태를 파악했다. 물론 안주머니에 넣은 손은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우둑우둑.

“이거… 며칠 고생하겠는데…….”

목을 움직일 때마다 거북한 소리가 일었다. 동빈의 팔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 주는 단면이었다.

“다음에 걸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그때는 뭘 숨기고 와도 소용없어.”

“너무 자신만만하군. 난 침투와 암살이 전문이야. 목표를 정해서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어.”

“계속 지껄일 거면 내가 떠나고.”

동빈은 골목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말대꾸에 진력이 난 표정이었다.

“참, 골목 끝에 손님들이 오신 것 같은데?”

“…….”

동빈은 윤호가 뭐라고 하건 상관하지 않았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더욱 빠른 속도로 걸었다.

“조직 폭력배인 모양이야. 아주 거칠어 보이던데?”

“…….”

“학원 폭력과 전쟁을 선포한 것도 모자라 이젠 조직 폭력배까지 상대하는 건가? 힘들겠지만 잘 해 보라고.”

“…….”

동빈은 끝까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뚜벅뚜벅.

동빈은 큰 걸음으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조직 폭력배가 기다리고 있다는 귀띔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행동이었다. 상대가 누구건 그냥 쳐부수면 되는 것이다.

골목을 벗어나서 왼편.

주황색 불빛의 가로등이 보였다. 그 밑에는 검은색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을 감시하는 놈도 셋이나 보였다.

“……!”

담배를 피우던 조폭이 동빈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화들짝 놀라 담배까지 떨어트리고 동료에게 다가갔다.

툭툭.

“왔어, 왔어.”

다른 동료의 어깨를 치며 동빈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나 말이 짧았던 게 문제였다.

“뭐가?”

동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냥 왔다고만 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 왔다니까!”

“아, 글쎄, 뭐가 왔냐니까!”

“기, 기, 기, 김동빈!”

“에이… 씨! 진작 그렇게 말했어야지!”

놈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차량 밖에 흩어져 있던 세 놈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저놈 표정이 좀…….”

“괜찮아. 우리도 준비 많이 했잖아.”

어느 쪽이 싸움을 걸러 왔는지 헛갈릴 지경이다. 동빈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고 놈들은 바싹 겁먹은 표정이었다.

“어서, 큰형님 모셔 와.”

“아, 아, 아, 알았어.”

놈들의 큰형님은 멀리 있지 않았다. 동빈과 처음 눈이 마주친 놈이 차량 앞문을 향해 다가갔다.

똑똑똑.

“큰형님, 왔습니다. 김동빈이 왔습니다.”

덜컥.

문이 열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김동빈이란 말이 나오자 큰형님이 재빨리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저 고삐리 새끼…….”

동빈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일일 찻집에서 봤던 인상 더러운 행동대장이었다. 여기저기 생긴 얼굴의 상처 때문에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보였다.

“가자!”

“네, 큰형님.”

행동대장이 앞장서자 나머지 수하들이 따랐다. 그러나 그동안 많이 당했는지 함부로 덤비지는 않았다.

“김동빈…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새끼…….”

“…….”

오늘따라 동빈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행동대장은 심한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동빈의 반응은 별로였다. 그냥 노려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너는 우리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지. 난 졸라 반가운데.”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리 끝내자.”

동빈은 곧바로 싸울 태세로 접어들었다.

이런 놈들은 공격 자세까지 취할 필요도 없었다. 동빈은 자연스럽게 한쪽 발만 내민 상태를 유지했다.

“오늘 상대는 우리가 아니야. 널 잡아 주실 분을 아주 어렵게 모셔 왔지.”

“누구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데려와.”

“긴장 좀 해야 할 거다. 이 바닥에서 아주 유명한 해결사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성격이 일품이지. 어서 모셔 와.”

“네, 형님.”

행동대장이 눈짓하자 한 놈이 차량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뒷문 쪽으로 가더니 창문을 두드렸다.

“저희 큰형님이 나오시랍니다.”

덜컥…….

나직한 소리와 함께 차량 문이 열렸다.

스윽.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매우 천천히 차량에서 내렸다. 검은 구두를 신은 발이 보였지만 아직 몸을 일으킨 상태는 아니었다. 보는 사람들이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게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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