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 식당.
전통 한옥의 멋을 제대로 살린 곳이었다. 기와를 얹은 높은 담장과 고풍스러운 솟을대문은 조선 시대 권세가의 저택을 연상케 했다. 한때는 최고급 요정으로 유명세를 탔으나 지금은 부유층이나 외국 손님을 위한 곳으로 탈바꿈했다.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이던 입구가 한가하다.
점심이라 하기에는 너무 늦고 저녁이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부르릉.
한산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현관으로 차량 한 대가 들어섰다.
종업원들이 급히 뛰어나와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일렬로 늘어서서 손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지배인은 차량의 뒷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갖추며 문을 열었다.
딸깍.
“어서 오십시오.”
장군이 내리자 지배인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장군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그 인사에 답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자네는 좀 쉬고 있게.”
“네, 장군님.”
장군은 운전기사를 보내고 지배인을 따랐다.
종업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솟을대문을 지났다. 잘 꾸며진 정원은 이곳의 품격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겨울에도 푸른 잎을 간직한 사철나무와 각양각색의 정원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정원이 끝나는 부근에서 양 갈래로 나뉘는 길이 나타났다.
지배인은 비교적 한가해 보이는 길로 장군을 안내했다. 특별한 당부를 받았는지 과도할 정도로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
고풍스러운 한옥 건물이 보였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장군을 맞이했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장군을 안내할 모양이다. 지배인은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들어가시지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안내한 곳은 밀실에 가까운 방이었다.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드르륵.
전통식 미닫이문이 열리자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통 자개로 만든 가구와 화려한 색채를 지닌 병풍이 조화를 이루었다. 벽면은 산수화로 장식했고 방 중앙에는 고풍스러운 교자상이 놓여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정말 오랜만이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반백이 성성한 노신사가 반색을 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조끼를 걸친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주름 진 얼굴로 보아 60은 훨씬 넘어 보였다.
“이쪽으로 앉게.”
그는 직접 자리를 권하는 성의를 보였다. 장군이 자리에 앉자 한복을 입은 여인이 다가섰다. 주문을 받으려는 행동이었다.
“자네 식사는 했나?”
“네, 점심 선약이 있었습니다.”
장군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고 노신사는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표정 관리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다시 편안한 인상을 회복하고는 한복을 입은 여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식사는 했다니 할 수 없지… 그냥 가벼운 것으로 준비해 주게나. 독하지 않은 술도 괜찮을 것 같고…….”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은 여인은 다소곳이 인사하고 물러났다. 둘만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노신사는 그녀가 방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지냈는지 모르겠네. 먼저 떠난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을 게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회장님도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장군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노신사의 안부를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나라가 시끄러우니 편히 쉴 수 있겠나? 민주화가 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데모질이나 하고, 젊은것들은 반미 감정도 모자라 빨갱이들의 사상에 빠져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퇴역을 하셨으면 조용한 말년을 지내셔야지요.”
노신사도 장성 출신이었다. 장군은 예의를 갖추어 그의 말을 경청했다.
“자네는 이 나라가 어떻게 될는지 걱정되지 않는가? 요즘은 답답해서 잠도 오지 않아.”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을 선동하는 불순 세력들이 문제 아닌가? 내가 현역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바로 자네 같은 사람이 나서 줘야 하는데…….”
“군인이 나서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일반 국민들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할 때 나라가 발전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저 나라만 잘 지키면 됩니다.”
“쯧쯧쯧. 자네의 생각은 여전히 고리타분하구만.”
“회장님의 생각이 너무 과격하신 겁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장군이 강한 어조로 말을 끝냈기 때문인지 모른다. 노신사는 주위를 환기시킬 모양인지 탁자 위에 있는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문한 음식이 나온 모양이다. 방 안이 조용했기에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들어와.”
노신사는 담배를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장군의 시선도 이미 방문 쪽을 향한 상태였다.
드르륵.
나직한 문소리와 함께 종업원들이 들어왔다.
한복을 입은 여인이 먼저 들어왔고 음식을 든 남자 종업원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고는 여인의 손짓에 따라 교자상에 음식을 배치했다.
“가벼운 음식이 아니군요.”
“여기가 원래 푸짐하게 나온다네.”
주문보다 과한 상차림이 등장했다. 넓은 교자상이 꽉 찰 정도로 가짓수가 엄청났다.
“맛있게 드십시오.”
“수고했네.”
한복 여인은 상차림을 꼼꼼히 살펴보고 물러갔다.
노신사는 그녀의 뒷모습에 인사를 하고는, 음식이 빼곡히 차려진 교자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윽.
노신사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술이 담긴 하얀 사기 주전자였다. 무심코 자기 잔부터 따르려다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네도 술 한잔할 텐가?”
“감사합니다.”
장군은 공손하게 잔을 내밀었다. 분위기를 맞추려는 행동이 분명했다. 장군은 평소에도 술을 즐겨 하지 않았고 낮술은 더더욱 삼가는 편이었다.
또르르.
“자네와 술 한 지가 언젠지 모르겠어…….”
노신사는 천천히 술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주십시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장군이 노신사의 잔을 채워 주었다.
또르르.
“여전히 술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아니야, 나이 때문인지 나도 많이 약해졌지.”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내 평생 자네의 아부는 처음이군. 어서 들지.”
“고맙습니다.”
팅…….
청명한 건배 소리.
장군은 반쯤 마시다 내려놓았고 노신사는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음… 자네가 따른 술이라 색다른 맛이군… 참, 요사이 국방부에서 시끄러운 일이 벌어졌다고 하던데?”
노신사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무 광범위한 질문임이 분명했다. 장군은 노신사의 술잔을 채우는 것을 잠시 멈추고 반문했다.
“무기 구입 말이야. 비슷한 성능을 가졌다면 어느 쪽을 밀어줘야 할지 잘 알 것 아닌가?”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사업입니다. 신중에 신중을 거쳐서 결정할 생각입니다.”
장군은 노신사의 술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매우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소신대로 하겠다는 뜻은 확실히 담겨 있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과감해질 때는 과감해져야지. 자그만 불평까지 일일이 챙긴다면 아무것도 못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자네는 알걸세.”
“저에게 로비를 하시는 겁니까?”
“로비라니,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를! 내가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럼 됐습니다. 제 소신껏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
노신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술잔을 쥔 손에도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자네가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누구 덕이라 생각하나? 좋은 자리에 있을 때 힘을 써 보게. 이것도 다 나라를 위한 일이야.”
“나라가 아니라 회장님을 위한 일이겠지요.”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내가 잘되면 자네를 외면할 것 같은가? 자네가 만족할 정도의 충분한 보답을 약속…….”
“싫습니다.”
장군은 노신사의 말까지 끊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네는 너무 욕심이 없는 게 탈이야.”
노신사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장군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그리 부드럽지 않았다.
“그런 욕심이 있었다면 기업가나 정치인이 됐을 겁니다.”
“혼자만 뻣뻣한 나무는 부러지기 십상이지.”
“제가 부러질 것 같습니까?”
장군은 눈까지 치켜뜨며 반문했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는 장군으로서는 대단한 감정 표현이었다.
“이제 그만 하지. 오랜만에 만나서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있겠나. 술이나 드세.”
“아닙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장군은 확실한 매듭을 짓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노신사의 얼굴은 처음보다 더 굳어진 상태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퇴역 후에도 사람 모으는 일을 열심히 하시더군요.”
“내가 사람 좋아하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노신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인맥을 관리하는 것이 뭐가 대수냐는 반응이었다.
“회장님이 누구를 수하로 삼으시건 제 알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비밀 코드에 관련된 사람들은 건들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제 군인이 아니야. 사람을 가려서 만나라니…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할 법한 소린가?”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일로 충돌이 없기를 바랍니다. 술 맛이 괜찮군요. 어서 드시지요.”
장군은 반 잔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그러고는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연거푸 들이마셨다.
노신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