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동빈은 평상시와 똑같은 시간에 2층에서 내려왔다.
종업식 날이라고 해서 수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전 수업이 잡혀 있기에 가방까지 메고 학교를 가야 했다.
“동빈아, 잠시 이쪽으로 앉아라.”
소파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장군이 동빈을 불렀다.
학교에 잘 갔다 오라는 인사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동빈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조용히 신문을 접었다.
“오늘부터 방학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장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모양이다. 동빈의 시선은 신문이 놓인 탁자를 향했다. 장군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송 교관에게 들으니… 훈련을 빠지고 싶다고 했다던데…….”
“완전히 빠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주일 정도 제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며칠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여행이라…….”
장군은 소파에 등을 대고 고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개인적인 일로 국가의 훈련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들의 부탁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으니… 오랜만에 겪어 보는 아버지로서의 고민이었다.
“이젠 수험생이나 다름없으니 놀러 갈 시간도 없겠지… 며칠 정도를 생각하고 있느냐?”
“예정은 일주일인데…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더냐?”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은데… 아직 확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끄덕끄덕.
장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장군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행을 끝내고 와서 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하겠습니다.”
“그래… 만날 반복되는 훈련보다는 친구들과의 여행이 더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겠지. 내가 손을 써 보겠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동빈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예상보다 쉽게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장군이 안 된다고 강하게 나왔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늦겠다. 어서 가 보거라.”
“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동빈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이제야 방학을 맞는 학생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동빈이 현관문을 나서자 장군은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는 모양이다.
장군은 수화기를 들지 않고 스피커 단추를 눌렀다.
뚜-.
요란한 통화대기음이 흘러나왔다.
아무 번호나 눌러서 소리를 막고 싶을 정도로 볼륨이 높았다. 장군은 망설임 없이 리다이얼 단추를 눌렀다.
방금 전에 통화를 했던 상대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띠띠띠띠띠.
뚜르르. 뚜르르.
자동적으로 번호가 눌러지는 소리는 매우 빠른 고음이었다. 정신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한층 낮아진 통화음으로 이어지자 훨씬 안정감이 들었다.
-네, 장군님.
딸깍.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장군은 수화기를 집었다.
장군이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의 음성이었다.
“오늘 일정 중에 변경된 사항 있나?”
-네? 아, 아직은 없습니다.
보좌관은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방금 전에 통화를 했는데 그사이 변할 일이 있겠는가? 행여 있다 하더라도 보좌관이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빈이의 동계 훈련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장군님.
장군이 약간 뜸을 들이자 보좌관이 선수를 쳤다.
장군과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이번 통화의 요점임을 눈치 챈 것이다.
“미국 측에 연락해서 훈련 일정을 연기하자고 전해. 사유는 자네가 알아서 만들고.”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나 연기될 것 같습니까?
“글쎄… 대략 일주일 정도 잡으면 되겠지만 더 연기될 수 있는 사항이야.”
-제가 알아서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장군님…….
이번에는 보좌관이 뜸을 들였다. 그도 껄끄러운 내용을 말하려는 모양이다.
“말해 보게.”
-그쪽을 한번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골치 아프군…….”
장군도 ‘그쪽’이 누군지 아는 기색이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냥 점심이나 하시면서…….
“알았어. 일정 조정해서 그쪽에 통보해. 대신 업무에 차질 없는 시간으로 잡아.”
-알겠습니다, 장군님.
“오늘도 수고하고.”
딸깍.
그쪽에 대해서 감정이 안 좋은 모양이다. 전화를 끊은 장군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명성고등학교의 오전 수업이 끝났다.
종례 겸 종업식도 끝나자 학생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청소를 맡은 학생 몇 명만이 교실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와! 진짜 방학 기분 안 난다.”
주철은 불만을 터트리며 비질을 했다. 무늬만 방학이나 진배없었다. 일 주 후에는 보충수업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어우, 먼지… 저놈은 청소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허리를 편 주철은 동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청소는 하지 않고 딴짓거리를 일삼았다. 한쪽 귀퉁이 자리에 앉아서 석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우 수상한데…….”
주철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동빈을 바라보았다.
싸움깨나 하는 놈들은 청소 같은 잡일을 빠지며 으스대는 경우도 있지만 동빈은 달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청소하고 끝마무리까지 책임지던 동빈이 아니었던가?
저렇듯 딴청을 피우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설마, 이것들이 또 나만 빼놓고…….”
청소 당번도 아닌 석진이 남은 것도 수상했다.
주철은 빗자루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무슨 수작을 꾸미는 것인지 몰래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어라? 저게 뭐야? 공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언듯 보니 책상 위에는 두꺼운 인쇄물이 놓여 있었다.
프린트로 뽑아서 제본까지 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동빈과 석진은 그 인쇄물을 살펴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궁금해서 안 되겠는데…….’
주철은 최대한 기척을 줄이면서 계속 접근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간 것이다.
화악.
주철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책상 위에 있던 인쇄물을 손에 넣었다.
“헤헤헤. 뭘 그리 보고 있으셨나. 어디 보자… 함무라비 프로젝트? 제목도 촌티 나게시리…….”
주철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의 압박이 심했다.
“장난치지 말고 내놔라.”
“네가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동빈이 손을 내밀자 주철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인쇄물을 가슴께로 끌어당기며 순순히 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시간 없으니까, 줘.”
“도대체 뭔데 그래? 나만 빼고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
“꿍꿍이는 무슨! 저번에 석진이한테 부탁한 거야. 너도 그때 피시방에 있었잖아.”
“피시방이라면… 동빈이, 네 팬카페 게시판 말이야?”
“그래.”
주철의 기억은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동빈의 팬카페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석진이 판단하기에 정말 비상구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을 선별했던 작업. 그날 급한 것을 하나 처리했고 나머지는 석진이 따로 정리하기로 했었다. 이 두꺼운 인쇄물이 바로 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꺼워?”
주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구원을 바라는 글들이 많았단 말인가? 묵직한 부피부터가 장난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부스럭.
주철은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석진의 꼼꼼함을 느낄 수 있는 인쇄물이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뭐… 전국에 있는 불량 서클이 다 나왔잖아!”
“자료 정리하느라 죽는지 알았다.”
석진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게시판 글을 선별하고 따로 분류하는 작업만 해도 몇 날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부스럭부스럭.
“이렇게 정확하고 자세한 학원 폭력 계보는 처음이다. 내가 봐도 엄청난 자료야… 그냥 경찰에 넘겨도 되겠다.”
페이지를 넘기는 주철의 손이 빨라졌다.
직접 피해를 당한 학생들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나 어떻게 당했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첨부되어 있는, 매우 현실적인 자료였다.
“그런데 이거 만들어서 뭐 할 건데?”
주철은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경찰에 넘길 것도 아닌데 왜 만들었냐는 뜻이었다.
“내가 직접 해결할 거야.”
“너 제정신이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놈들을 다 잡겠다고?”
“물론이지. 석진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데…….”
“우와! 내가 미친다.”
주철이 답답함을 느낄 충분한 상황이었다.
전국 방방곡곡 흩어져 있는 모든 불량 서클과 싸우겠다는 소리였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말을 할 리 없었다.
“우린 수험생이야! 이놈들 잡으러 다닐 시간이 없다고!”
“그러니까 이번 방학에 한꺼번에 처리해야지.”
“야! 진짜 미쳤어? 얼마 되지도 않는 방학이잖아. 빡세게 놀아도 시원치 않은데 말이야.”
“너나 빡세게 놀아라. 석진이는 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뭐, 뭐라고? 순진한 석진이는 왜 끌어들여!”
주철의 충격은 배가 되었다. 대책 없는 동빈이야 그렇다 치고 석진이까지 왜 이런단 말인가?
석진이부터 만류하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석진아, 이놈 말이 사실이야?”
“응.”
“응은 또 뭐가 응이야!”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갔다.
동빈의 어쭙잖은 계획에 석진이가 단단히 세뇌된 모양이었다.
“석진아,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스키장 가자. 콘도도 이미 예약했거든.”
“벌써 동빈이랑 약속했는데? 게다가 난 스키도 없고…….”
“난 보드 타면 되니까 내 스키 장비 모두 빌려 줄게. 너한테 맞지 않으면 통째로 사 줄게.”
“정말? 어디에 있는 스키장인데?”
석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설득하면 넘어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강원도에서 제일 물 좋은 곳이야. 내가 승용차까지 준비했으니까 아주 편안한 여행이 될 거야.”
“그럼 당연히 가야지.”
“고맙다, 이놈아!”
주철은 와락 석진을 끌어안았다. 이로써 동빈의 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생긴 것이다. 잘만 하면 동빈까지 포기시킬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동빈아, 이제 어쩔 거냐?”
“뭘?”
“석진이가 빠졌는데 너 혼자 갈 거냐고?”
주철은 승부수를 던졌다. 이 대 일. 다수결의 원칙에 동조하라는 추궁이었다.
“무슨 소리야? 석진이는 스키장에 간다고 했지, 나랑 약속을 깬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
“그게 그 소리거든.”
“내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은데?”
스륵.
동빈은 석진에게 시선을 돌렸고 자연스럽게 주철의 시선도 따라왔다. 인쇄물을 열심히 읽는 석진을 볼 수 있었다.
“석진아, 너 뭐 하는 거냐?”
주철이 불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스키장을 가기로 했으면서 왜 인쇄물을 보고 있단 말인가? 음흉하게 웃는 석진의 표정도 마음에 걸렸다.
“일정 좀 보고 있어… 스키장 근처에도 일진들이 있을 거야. 동빈아, 강원도부터 들러도 상관없지?”
“물론이지.”
“…….”
주철은 멍한 눈으로 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석진처럼 제대로 실속을 챙기는 애도 드물었다.
동빈과 주철과 어울리면서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어떤 일진도 석진을 괴롭히지 못했다. 셋이 라볶이를 먹을 때 가장 많이 먹는 애가 바로 석진이었다.
주철의 머릿속은 석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으로 넘쳐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