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파티
경기가 어려운 탓인가?
연말이 되어도 들뜬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번화가에 들어서야 축제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주철아, 많이 기다렸냐?”
“나도 방금 왔다.”
동빈과 주철은 화려한 네온이 반짝이는 건물 앞에서 만났다.
이곳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산타클로스의 모형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크리스마스트리도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돈 좀 들었을 것 같은데… 누가 빌린 거냐?”
“전국 연합 우두머리… 엄청난 부자거든.”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허접한 일진들의 일일 찻집과는 규모부터 달랐다. 꽤나 유명한 클럽 전체를 대여한 것이다.
“너희 집보다 더 부자냐?”
“아마도… 고교 황태자란 별명을 가졌으니까.”
주철이 인정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그러나 어떠한 배경도 동빈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동빈은 거침없이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고교 황태자라… 누군지 더 궁금해지는데…….”
“천천히 좀 내려가라. 초청장은 내가 가지고 있단 말이다.”
주철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동빈의 걸음이 워낙 빨랐기에 따라잡기기 쉽지 않았다.
지하 3층까지 내려가자 클럽 입구가 나타났다.
스윽.
입구를 지키고 있던 놈들이 동빈의 앞을 가로막았다.
“초청장 없이는 못 들어가.”
육체미 선수인가? 잘 발달된 근육이 옷을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겨울철인데도 얇은 옷만 걸치고 있었다.
“내 친구가 가지고 있는데?”
동빈은 뒤를 보라는 시늉을 했다. 놈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빈의 뒤를 따르던 주철에게 이어졌다.
“이게 누구신가? 강남의 양주철 아니야?”
주철과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과장된 말투와 행동이 수상하다. 좋은 관계는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정말 기뻐서 이러는 거냐?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닌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반갑지… 그 잘난 얼굴을 아작 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사태가 점점 심각하게 돌아갔다. 근육질의 학생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주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단순히 사이가 안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미안하지만 너하고는 볼일 없을 것 같은데? 난 정식으로 초청장 받고 왔거든.”
스윽.
“……!”
주철이 초청장을 내밀자 놈의 표정이 달라졌다.
초청장을 지닌 사람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모양이다. 노려보기만 할 뿐 어떠한 물리적인 행동도 하지 못했다.
“잘생긴 얼굴 처음 봐? 이제 좀 비켜 주겠어?”
“넌 들어가도 상관없는데… 같이 온 놈은 누구야? 이놈은 초청장이 없잖아.”
놈은 목표를 바꿨다. 주철을 건드리지 못하자 동빈에게 괜히 시비였다.
“너 입구에 처음 서 보냐?”
주철은 착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동빈이 사고 치기 전에 먼저 수습하려는 행동이었다.
“원칙은 지켜야지. 너와 연관된 새끼는 모두 재수 없어서.”
“초청장에 동반 1인은 허용한다고 적혀 있지 않나?”
“씨발… 그랬나?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데려와서 내가 잠시 헛갈렸다. 요즘은 남자로 취향이 바뀌셨냐?”
“너 진짜 많이 컸다. 그리고 운도 좋아진 것 같고… 오늘만 아니었으면 그냥…….”
주철은 극도의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심하게 떨리는 눈 주변이 바로 그 증거였다.
“미친 새끼… 그런다고 내가 쫄 것 같냐. 네놈 눈치나 보던 시절은 예전에 지났어.”
“넌 지났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거든?”
“오늘 그냥 가지 마라. 조용히 만나서 과거를 청산해야지.”
“그래… 시간 없어서 그냥 들어가는데 조금 있다 보자. 꼭!”
툭.
주철은 놈의 어깨를 밀치며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동빈이 뒤를 따랐고 근육질의 살벌한 눈총은 계속 이어졌다.
쿵쾅쿵쾅.
문을 열자마자 중저음의 스피커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도록 내부를 꾸몄지만 흐르는 음악은 경쾌한 댄스곡이었다.
“어째…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당연하지. 내가 예전에 사고를 단단히 쳤었거든.”
주철을 대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조용히 외면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놈들도 여럿 있었다.
동빈이 괜히 무안해질 정도였다.
“정말 괜찮겠냐? 힘들면 그냥 돌아가도 된다.”
멈칫.
주철은 순간적으로 발길을 멈췄다. 그러고는 동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미쳤니? 내가 얼마나 참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절대 불가하다는 강력한 표현이었다.
지금 나가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이 정도 반응은 이미 각오를 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안해서 그렇지…….”
“미안할 필요 전∼혀 없거든.”
“그래, 오늘만 좀 희생해라.”
“희생은 무슨 희생이냐? 내가 왕따라도 당하는 것 같아? 여기에 있는 새끼들은 나도 마음에 안 들어!”
주철다운 발상이었다.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따를 시킨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동빈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역할은 했다.
“너무 흥분하지는 마라. 조금 쉬었다가 우두머리를 찾아보자.”
“누가 흥분을 했다고…….”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함인가? 동빈은 클럽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일 찻집처럼 불량스러운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술도 가벼운 맥주가 전부였고 그렇게 심하게 마시는 학생도 없었다.
“처음부터 느낀 건데… 일일 찻집 분위기와 너무 다르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여기에 있는 애들하고 어떻게 생양아치들하고 비교를 하냐? 노는 수준부터 다르지.”
주철도 동빈의 의도를 깨달은 모양이다. 동빈의 질문에 장단을 맞추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노는 것도 수준이 있냐?”
“주체도 못 하게 술 처먹고, 줄담배 피우고, 괜히 여자나 찝쩍이는 것은 생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들이 어른이 됐다고 단단히 착각하는 거지. 여기에 있는 애들은 인맥 관리 차원에서 참석하는 놈들이야. 매너 없이 꼬장 부리면 당장 쫓겨나.”
대부분 춤을 추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다.
몇몇이 담배를 피우기는 했지만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건전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런 모임은 자주 있냐?”
“아니, 끼리끼리는 자주 모이지만 이런 규모는 흔치 않지. 수능이 끝나서 전체적인 자리를 마련한 거야.”
“수능?”
“오늘은 3학년을 위한 자리야. 이놈들은 놀 땐 놀고 공부할 때는 확실히 하거든.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됐다.”
주철은 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줄지어 있는 테이블을 지나서 확 트인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저쪽 같은데…….”
주철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반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특별한 사람만이 출입이 가능한 모양이다. 주철이 접근하자 한 무리의 학생들이 황급히 막아섰다.
“이곳은 특별한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야.”
“뭐야? 처음 보는 얼굴들이네? 나도 특별한 손님인데…….”
주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얼굴을 모르니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괜히 객기 부리지 말고 조용히 놀아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주철의 예상은 적확히 맞아떨어졌다.
놈들은 접근 자체를 허용치 않았다. 주철을 툭툭 밀쳐 내며 특별한 공간과의 거리를 더욱 벌리려 했다.
“미안한데 저 안에 있는 사람 좀 만나러 왔거든. 강남의 양주철이 왔다고 전해 줬으면 좋겠는데?”
“강남의 양주철!”
“어라? 이름은 들어 본 모양이네?”
불행 중 다행인가? 주철이 이름을 밝히자 놈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서로가 눈치를 보며 양주철이 맞는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출입이 허용된 이름인데… 너 양주철 얼굴 본 적 있어?”
“아니, 안 올 게 확실하다고 해서 신경도 안 썼는데. 넌 어때?”
“나도 모르지?”
한고비 넘었나 싶었지만 문제가 또 발생했다. 그들 중 누구도 주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어이? 내가 진짜 양주철이라니까?”
“처음 본 놈을 어떻게 믿어? 우리가 믿게 증명해 봐.”
주철은 황당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자신이 주철이 아니면 누가 주철이란 말인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밝히려 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 안에 들어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이곳은 특별한 공간이야. 안에서 부르기 전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우와! 미친다. 이것들이 장난하나!”
쓸데없이 시간만 흐르는 상황이었다. 그토록 참았던 주철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털컹.
“어머! 이게 누구야? 주철이 아니야?”
“안녕, 누나.”
때마침 안에서 나오던 여자가 주철을 알아보았다.
그래도 여자들과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주철을 맞이해 주었다.
“진짜 뜻밖이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일이 좀 있었잖아. 안에 태균이 형 있지?”
“그럼, 어서 들어가자. 태균이도 좋아할 거야.”
그녀의 등장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주철과 동빈은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정적.
주철이 들어서자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룸에 있던 학생들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주철을 바라보았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리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벌떡.
“이게 누구야!”
원형 테이블 중간 자리에 있던 학생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180이 넘는 키에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서둘러 입구까지 나와서는 주철의 손부터 잡았다.
“짜식! 그렇게 잠수만 타더니…….”
“내가 왜 잠수했는지 형도 잘 알잖아.”
“진작 좀 찾아오지. 난 네가 수험생인 줄 알았다.”
태균은 한동안 헤어졌던 친동생이라도 만난 반응이었다. 태균은 주철을 꽉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동안 잘 지냈지?”
“그럭저럭… 태균이 형은 여전히 즐거워 보이네.”
“나야 워낙 낙천적인 성격 아니냐.”
염세주의자와 낙천주의자.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사이는 좋아 보였다. 태균과 주철은 어깨동무까지 하며 우애를 과시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섭섭하네? 형이 초청장 보냈잖아.”
“난 기대도 안 하고 보냈지. 아무튼 잘 왔고… 참! 다른 애들한테도 인사해야지.”
룸 안에는 7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자 넷, 여자 셋. 이미 커플이 짜여 있는지 주철은 남녀를 묶어 가며 인사했다.
“종국이 형은 시험 잘 봤다며?”
“시험 결과는 점수가 나와 봐야 알지… 여하튼 반갑다.”
그들은 태균만큼 주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어색한 인사는 계속 이어졌다.
“진이 누나는 유학 준비한다는데, 사실이야?”
“유학은 무슨… 내가 시험 망쳤다고 하니까 아빠가 괜히 해 본 소리야.”
주철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었다. 첫 커플과 가벼운 악수를 주고받고는 곧장 다른 커플로 향했다.
“진수 형은 살 많이 빠졌다. 그런데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 많이 본 얼굴인데?”
“내 여자 친군데… 아마 TV에서 봤을 거야.”
“아! 요즘 한창 뜨는 드라마…….”
“안녕하세요. 한혜원이에요.”
“우와! 실물이 훨씬 예쁘시네요.”
주철은 매우 과장된 표정을 연출했다.
장난기가 다분한 행동이었지만 서먹했던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는 역할은 충분히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도 점점 나아졌다.
“수윤이 누나는 아까 봤고… 태균이 형이랑 잘 지내지?”
“나도 오랜만에 태균이 만났어.”
주철의 신분을 확인시켜 준 여자는 태균의 여자 친구였다. 처음 볼 때와 마찬가지로 주철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태균이 형, 인사는 이만 하면 됐지?”
“뭐야? 한 사람 더 남았잖아? 커플 아니라고 차별하는 거야?”
“저놈은 별로…….”
주철은 나머지 한 놈은 그냥 무시했다. 태균이 인사하라고 눈짓했지만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무슨 소리야? 선배들 빼면 정우가 유일한 동기잖아. 안 좋은 감정이 남은 건 알겠는데, 이 기회에 풀어 버리면 좋잖아.”
태균은 주철의 등을 계속 떠밀었다. 그러나 못마땅한 것은 정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주철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단번에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