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했던 창고가 잠잠해졌다.
동빈이 용덕고 일진들을 제압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처절한 탈출이 비극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결국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하고 창고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냐?”
“글쎄…….”
동빈과 주철은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오늘 일은 사건도 아니었다. 간단한 몸 풀기 정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괜히 헛짓거리하는 거다. 피라미 새끼 몇 마리 잡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
동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만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놈들이 쓰던 각목을 한꺼번에 넣었기에 거센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대충 정리됐으니까, 찬수라는 애 깨어나면 떠나자.”
“…….”
“야, 내 말 안 들려? 진짜 시험공부 안 할 거야?”
“주철아…….”
“왜… 그런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사람 불안하게시리…….”
주철은 뚱한 얼굴로 동빈을 바라보았다. 불꽃에 일렁이는 동빈의 얼굴이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전국 연합 우두머리 좀 만날 수 있을까?”
“무슨 일인데?”
“그냥… 얼굴 한번 보고 싶어서.”
“…….”
이번에는 주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빈의 시선까지 외면하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상당히 곤란한 부탁이란 뜻이었다.
“그놈과 잘 아는 사이라며?”
“좀 알지…….”
“만나면 껄끄럽나?”
“당연히 껄끄럽지…….”
주철은 괜히 뒷말을 흐렸다.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은근히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전국 연합과 좋게 끝낸 관계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친구로서 부탁한다.”
“이럴 때만 꼭 친구냐?”
“친구라고는 너하고 석진이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석진이한테 부탁할 수는 없잖아? 좀 안 되겠니?”
“어쭈? 말솜씨도 많이 늘었는데?”
주철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물론 동빈의 썰렁한 농담이 통한 것은 아니었다.
“동빈아, 무작정 사고 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냐?”
“당근이지.”
주철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동빈의 막무가내 정신이었다. 전국 연합 전체와 붙으려는 불상사는 막고 싶었다.
“한 번만 내 자존심을 접겠는데… 대신 부탁이 있다.”
“뭐, 뭔데?”
반색하는 표정을 지었던 동빈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승낙을 받아 내긴 했지만 조건부였으니 문제였다. 동빈은 차분한 표정으로 주철의 말을 기다렸다.
이상한 조건이 아니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제발 인상 좀 펴고 다녀라. 요즘 옆에서 지켜보기 상당히 거북하거든.”
“그, 그게 다냐?”
“당연하지. 그럼 내가 살인 청부라도 할지 알았냐?”
피식.
동빈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오랜만에 지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머지 시험 잘 보고. 이번 크리스마스에 시간 비워 둬라.”
“크리스마스? 난 불교에 가까운데…….”
“무슨 소리야? 전국 연합 우두머리 보고 싶다며!”
“그렇게나 빨리?”
예상보다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동빈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주철이 걱정이었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반문이었다.
“걱정 마라. 때마침 초청장이 왔거든.”
“초청장?”
“이번 크리스마스에 전국에서 잘나간다는 놈들이 모두 모여서 파티를 하거든.”
“이상하다. 나는 못 받았는데?”
올해 가장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 바로 동빈이었다. 그런 초정장이 있다면 동빈이 제일 먼저 받아야 했다.
“위험인물은 간혹 빠트리기도 하지. 난 그냥 버리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잘됐네. 친구 놈 웃음도 찾고 말이야. 저놈 깨어난 거 같으니 어서 가자. 빨리 시험공부 해야지.”
찬수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많이 맞은 것 같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조심해서 들어가.”
“네… 고맙습니다.”
“동빈아, 빨리 타라.”
주철은 찬수를 보내고 출발 준비까지 끝마쳤다.
동빈이 뒷자리에 타면 곧장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동빈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참! 주, 주철아?”
“또 무슨 일인데?”
동빈이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주철이 더 긴장했다.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 뜻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진짜 이번 시험 포기할 거야?”
“그게 아니라… 내일 무슨 과목이냐?”
“내가 미친다.”
주철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만날 공부 타령만 했던 사람이 할 소리란 말인가! 저러고 나서도 누구 때문에 공부를 못 했다고 난리 치니… 성적표 나올 때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