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빈의 방식
기말 고사 기간.
동빈은 시험을 철저히 망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상시라면 어떻게 대학을 가냐고 난리를 쳤겠지만 이번에는 증상이 달랐다.
너무 충격이 컸던 탓인가?
무거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계속 상념에 빠져 들었다.
‘복잡해… 복잡해… 너무 복잡해…….’
동빈의 머릿속은 실타래가 얽인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장군의 친아들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내가 뭘 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알지도 못하는 학생이 유서를 보내어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렇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젠장…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하지…….’
날이 갈수록 동빈의 고민은 깊어졌다.
장군의 친아들과 생판 모르는 학생 그리고 병원에 있는 혜영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시원스럽게 정리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빙글빙글.
“헤헤헤. 삶은 계란은 내 거다.”
주철은 삶은 계란을 돌리며 동빈을 자극했다.
라볶이에 얹혀 있는 계란을 처음으로 먼저 집은 것이다. 주철은 기쁨을 주최할 수 없는 표정이지만 상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던 주철만 오히려 뚱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야, 야! 오늘은 특별히 석진이가 사는 거잖아. 얼마나 시험을 망쳤는지 모르지만 계속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엉!”
“그래, 동빈아.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
“…….”
소 귀에 경 읽기가 따로 없다.
석진까지 나섰지만 동빈은 침묵만 유지할 뿐이었다.
“아! 진짜 못 봐주겠네.”
탁.
마침내 주철이 삐친 것인가?
기분이 상한 듯 팽개치듯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분위기가 더욱 썰렁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너까지 왜 이래.”
“시파! 저놈 얼굴 좀 봐라. 친구들이 이만큼 하면 괜찮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동빈이가 괜히 이러겠냐? 무슨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겠지. 주철이, 네가 조금만 더 참어.”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말이야. 더 이상은 못 참아!”
겉으로 보면 매우 심각하게 티격태격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주철이나 만류하는 석진의 모습이 수상하다. 이따금씩 동빈의 상태를 살펴보며 목소리의 수위를 조절했다.
“석진아…….”
“그래, 동빈아. 우리 집에서 공부할까?”
어설픈 연극이 효과를 본 것인가? 동빈이 입을 열자 석진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혹시… 기태 선배에 대해서 알고 있어?”
“기, 기태 선배? 조금 알고는 있지…….”
약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이었다. 석진은 반색했던 표정을 추스르며 동빈을 바라보았다.
“얼핏 자살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왜 죽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어?”
“글쎄…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었지. 자살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찾을 수 없었거든. 그 선배가 학교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고…….”
“학교 폭력은 어때?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던데?”
동빈은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반문했다.
유나에게 직접 들은 말이라 신빙성도 매우 높았다. 현재로써는 학교 폭력이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그 소문 때문에 학교가 엄청 시끄럽기도 했었지. 그러나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결론 났을 거야. 몇 명이 자퇴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을걸.”
‘반대로 말하면… 간접적인 이유는 됐다는 소린가?’
풀리지 않던 고민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다. 동빈도 학교 폭력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었고 나름대로 해법을 찾기도 했었다.
‘가해자 몇 명 처벌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피해를 당한 학생 그리고 가족들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상처가 깊어지는 건 아닐까?’
동빈은 또다시 고민 모드로 들어섰다.
뭔가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면서 미궁 속으로 다시 빠져 들었다.
“괜히 우울한 이야기 꺼내지 말고… 겨울 방학에 뭐 할지나 결정하자. 스키장 갈까? 수험생이 되기 전에 한번 신나게 놀아야 할 거 아니야.”
가만히 듣고 있던 주철이 끼어들었다.
주철도 전학을 왔기에 예전 학교 일은 전혀 몰랐다. 따돌림을 당하는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던 모양이다.
“주철아, 난 방학 계획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거든.”
“무슨 소리야? 지금이라도 생각하면 되잖아?”
주철은 화제를 계속 방학으로 몰아갔다. 시험을 치느라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다. 우울한 이야기는 제발 피하자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미안한데…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무슨 문제? 공부 잘하는 석진이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게 아니라…….”
시험 문제라면 당연히 석진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동빈의 고민에는 확실한 답이 없었다. 특히 공부만 하는 석진에게는 더더욱 물어볼 필요가 없었는데… 갑자기 동빈의 머리가 맑아졌다.
‘잠깐! 주철이 놈이라면 혹시…….’
석진보다 괜찮은 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찌릿.
동빈은 눈에 힘까지 주고는 주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의 노려보는 수준에 가까웠다.
“왜… 그, 그런 눈으로… 사, 삶은 계란 때문에 이러는 거냐?”
“그게 아니라…….”
부슥.
동빈은 저돌적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눈빛이 장난 아니다. 병든 닭이 졸지에 싸움닭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주철은 애매한 표정으로 동빈의 강렬한 눈빛과 맞섰다.
“삶은 계란이 아니면? 대체 뭐가 불만인데?”
“똑같은 대학민국 학생들끼리 왜 괴롭히고 싸우는 거지? 조금만 양보하고 상대를 배려하면 되잖아. 학교 가는 게 무섭고 힘들면 되겠어?”
“야…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고? 난 쓸데없이 애들 괴롭힌 적 없거든.”
주철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질문의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뜻이었지만 동빈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그럼 해법을 말해 봐. 어떻게 해야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들 수 있지? 예전에는 귀찮은 정도였는데… 요즘은 답답하고 짜증 나서 공부가 안 돼.”
“말은 바로 해야지… 공부는 예전부터 못했잖아. 그리고 해법도 이미 가르쳐 줬을걸? 그런 새끼들은 보는 족족 아작을 내면 그만이야. 여태까지 잘해 왔잖아.”
“그렇게 많이 싸웠는데 별로 변한 게 없잖아. 괜히 쓸데없는 짓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진들 사이에서 동빈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이제는 멋모르고 덤비는 놈들도 사라졌다. 폭력의 정점에 동빈이 서 있음을 모두가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이지. 일진을 동경하는 놈들이 많이 사라졌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즘 일진이라 설쳤던 놈들이 할 말 없게 됐거든. 이젠 일진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쪽팔린 일이지. 주먹의 정점에는 동빈이 네가 있으니 말이야. 놈들은 이진이나 찌질이로 전락한 신세가 됐거든. 어때, 조금 도움이 되었냐?”
주철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끝냈다. 그러고는 조용히 동빈의 반응을 살폈다.
의사 전달이 제대로 됐는지 살펴보는 모습이었다.
“글쎄… 약간 고민이 풀린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하지만 넌 고민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거든. 넌 직접 몸으로 해결하는 타입이잖아. 이 기회에 확실히 고교를 평정해 버리는 거야.”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려나?”
“당연하지. 계속 우거지상만 짓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끄덕끄덕.
동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철의 말에 수긍한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진중한 고민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뭐라도 해야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또한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동빈의 성격이었다.
“석진아. 저번에 했던 말 기억나?”
“무, 무슨…….”
너무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석진은 라볶이를 가득 문 상태에서 동빈을 바라보았다.
주철과 동빈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쉬지 않고 먹었던 것이다.
“그만 좀 먹어라. 너무 심하게 먹는다.”
꿀꺽.
석진은 서둘러 입 안에 있던 음식을 삼켰다. 냅킨으로 입 주위를 닦아 내며 경청할 준비를 끝냈다.
“미안… 배, 배가 고파서…….”
“치사하게 우리는 손도 안 댔는데… 여하튼! 저번에 내 팬카페에 대해서 언급했잖아. 누굴 때려 달라고 글 올리는 애들… 넌 그 애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지?”
“그, 그렇지…….”
단역배우 아르바이트 끝내고 석진의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에서 주고받은 대화였다.
공부 잘하고, 성격 좋고, 거기다 여자 친구도 있으며 엄청난 효자인 석진이 중학교 때 말썽을 피운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석진은 동빈의 팬카페에 글을 올리는 애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분명 말했었다. 석진이 화까지 내었기에 동빈이 많이 당황했던 사건이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 좀 구분해 줄 수 있어? 진짜로… 비상구가 없는 애들이 누군지 말이야?”
“그야 어렵지 않지. 내가 기말 고사 끝나고…….”
“아니, 난 지금 당장 필요해!”
“뭐라고?”
석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은 기말 고사 기간이 아니던가? 내신에 반영되는 시험이었다. 밤새 공부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어서 일어나. 저기 피시방 있다.”
“자, 자, 자, 잠깐만.”
“뭐가 잠깐이야? 빨리 시작해야 빨리 끝나지?”
“라, 라볶이는 다 먹고 가야지.”
“그냥 주철이 다 먹으라고 그래.”
동빈의 급한 성격이 또 출현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석진의 팔을 잡고는 반강제적으로 끌고 가려 했다.
“너희들 진짜 피시방 가는 거야?”
주철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시험공부 안 하고 진짜 피시방에 가냐는 반문이었다.
“넌 빠지든가.”
“에이… 씨! 이것들이 꼭 나 빼고 놀려고 그래.”
주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뭔지는 몰라도 따돌림을 당하기는 싫었다.
석진 대신 계산을 하고는 재빨리 따라붙었다.
시험 기간이라 한가한 피시방.
동빈 일행은 두 개의 자리를 잡았다. 주철은 혼자서 게임을 했고 석진과 동빈은 팬카페에 접속했다. 한창 유행하는 노래와 함께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우리에게는 삼 빈이 있다. 원빈, 현빈 그리고 동빈!
화면 상단에 자리 잡은 글귀가 매우 이색적이었다. 상당히 굵은 글씨였고 깜빡거리는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촌티 나는 문구야. 삼 빈이 뭐니 삼 빈이?”
“주철이 넌 게임이나 해라.”
물론 선아의 작품이었고 동빈도 마음에 들진 않았다. 주철에게 트집을 잡히자 동빈은 몸으로 화면을 가렸다.
“동빈아, 비밀 게시판을 보려면 관리자로 접속해야 하는데?”
“잠깐만.”
동빈은 자판을 자신 쪽으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차례대로 입력했다.
톡톡톡톡.
탁.
엔터키를 누르자 화면이 전체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관리자 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어디 보자…….”
석진은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이며 글을 검색했다. 우선은 제목부터 확인했고 의심 가는 글이 있으면 재빨리 클릭했다.
“동빈아, 이 아이가 조금 그런데?”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인가? 석진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동빈이 원하는 글을 찾아냈다.
“어디 학교야?”
“청운…초등학교…….”
“…….”
고개까지 들이밀었던 동빈은 할 말을 잃었다. 내용만 대충 확인했던 석진도 무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또다시 주철이 끼어들었다.
“당연한 일인데 뭘 그리 뚱하냐? 학교 폭력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심하다. 여기에 글 올린 애들도 대부분 초딩이나 중딩일걸?”
“석진아, 저놈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찾아봐.”
“알았다.”
동빈은 주철의 충고를 탐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철의 말에 점점 무게가 실렸다.
“동빈아, 대부분 초등학교나 중학생들이다. 가끔 유치원생도 있는데? 이것도 그렇고… 이것도 좀 그렇고…….”
“내가 뭐랬냐?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시험공부나 하자니까.”
“…….”
동빈은 주철의 빈정거림을 침묵으로 응수했다. 워낙 올라온 글이 많았기에 자신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찾았다. 이 애는 고등학생 같은데?”
“그렇지!”
기쁜(?) 소식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동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건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또 찾았다. 이것도 그렇고… 뭐야, 왜 이리 많아?”
다급한 사연을 가진 글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이제는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석진아. 제일 급한 거를 찾아봐.”
“그런 것까지 내가 어떻게 아냐? 자세히 살펴보려면 몇 날을 밤새워도 모자라겠다.”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급한 것 하나만 찾아 줘. 될 수 있으면 서울에 있는 학교로 말이야. 나머지는 따로 정리해 줄 수 있어?”
“오늘은 안 되고… 시험 끝나면 시간 내서 해 줄게.”
“정말 고맙다.”
석진의 손이 빨라졌다.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가장 급한 내용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몇 번이나 내용을 검토해 보고는 최종적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애가 가장 급한 것 같다. 학교도 서울이고.”
“흠…….”
동빈은 차분하게 화면에 나타난 글을 읽었다.
내용으로 봐서는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글을 선택한 석진을 믿는 것이었다.
“인적 사항과 비상 연락처까지 자세하게 남겼어. 장난으로 쓴 글은 분명 아닐 거야.”
“용덕고등학교 1학년 정찬수… 그런데 어디 있는 학교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까, 주소가 강남으로 되어 있어.”
“그래? 아주 좋아.”
“야? 왜, 왜… 나를 보는 거야? 시험공부 해야 한단 말이야.”
주철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동빈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주철의 죄는 강남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