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5/224)

올 수능은 입시 한파가 없다.

비교적 포근한 날씨 속에서 수능이 치러지고 있었다. 명성고등학교가 수험장으로 쓰였기에 동빈은 등교할 필요가 없었다.

“학원 다녀오겠습니다.”

오후가 갓 지난 시간.

동빈은 피아노 학원을 가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자 송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빈아, 엿 먹고 가라우.”

“네? 여, 엿요?”

송 교관은 먹음직스러운 엿이 빼곡히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무작정 하나를 꺼내서는 동빈에게 전해 주었다.

“아주 쫄깃하고 맛있어야. 어서, 먹어 보라우.”

엿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있었다. 동빈은 비닐을 벗겨 내고는 한입에 쏘옥 넣었다.

“음! 맛있네요.”

질겅질겅.

엿의 기술도 발전하는 것인가?

쫀득하고 새콤한 맛이었다. 입에 잘 들러붙지도 않아 뒷맛도 깔끔했다.

“마음껏 먹으라우.”

“네!”

송 교관은 상자를 통째로 내밀었다.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으라는 뜻이었다.

“대충 집으라우. 다 맛있어야.”

동빈이 이것저것 고르자 송 교관의 독촉이 바로 들어왔다.

동빈도 빨리 고르고 싶었지만 종류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무엇부터 먹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이 계속되었다.

부스럭부스럭.

“도대체 웬 엿이에요? 종류도 엄청 많고… 제가 수능을 보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몰라야. 장군님이 어제 사 오셨지.”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촤르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자 동빈은 무작정 한 움큼 쥐었다. 다 맛있어 보이니 아무거나 걸려도 상관없다는 행동이었다.

“지금 피아노 학원 가는 거 맞지?”

“네.”

“그럼 말이야, 이 엿 좀 장 여사 전해 주라우. 어서, 가방 벌리라우.”

우르르.

동빈이 집고 난 나머지 엿은 피아노 원장의 몫으로 떨어졌다. 동빈의 가방에는 빵빵할 정도로 엿이 들어갔다.

“그런데 교관님… 그냥 엿 드시라고 하면 됩니까?”

“조금 어감이 그렇지?”

“많이 그렇죠.”

송 교관이 정 여사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했다. 오해가 될 만한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했다.

“그럼 말이디, 공손히 전해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 우리 교관님이 주셨습니다.’ 이 정도만 하라우.”

“네, 알겠습니다.”

송 교관은 동빈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성의를 보였다.

“엿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서 가라우.”

“걱정 마세요.”

송 교관은 동빈의 뒷모습을 끝까지 주시했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별로 진척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 누가 봐도 일방적인 관심이라 할 수 있었다.

동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피아노 학원은 학교를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수능이 한창인데도 수험장을 떠나지 못하는 부모들을 볼 수 있었다. 내년이면 동빈도 수능을 봐야 했지만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동빈은 학원 앞에서 잠시 안정을 취했다. 새로운 기분으로 피아노를 연습하기 위함이었다.

“그래! 열심히 배워 보자!”

불끈.

어느 정도 지나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이 기세를 살려야 했다.

드르륵.

동빈은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워, 원장님?”

학원 안으로 들어선 동빈은 주춤했다. 책상에 앉아 조용히 눈물짓는 원장을 본 것이다.

“도, 동빈이 왔구나. 미, 미안…….”

원장은 무언가를 서랍 속에 감추며 눈물을 훔쳤다. 자그만 크기의 사진이 분명했다. 동빈의 순간적인 파악 능력은 최고의 수준이었다.

“미안한데… 조, 조금만 기다려…….”

끼이익.

“네…….”

1층은 학원이고 2층은 살림집이었다.

원장은 2층으로 연결된 문을 열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제자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엄마.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때마침 2층에서 유나가 내려왔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물었지만 원장은 더욱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어머, 동빈이 왔네. 안녕.”

“그래… 안녕.”

유나는 원장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동빈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동빈이, 넌 또 표정이 왜 그래?”

“저기… 너희 어머니가 사진을 보고 우시던 것 같은데…….”

동빈은 자기가 본 내용을 털어놓았다. 남자든 여자든 운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드륵.

“아! 이거 말이야?”

“야! 어머니 물건을 함부로 꺼내면 어떻게 하냐?”

유나가 서랍에서 사진을 꺼내자 동빈은 깜짝 놀랐다.

모녀 사이에도 사생활은 존중해 줘야 하지 않은가? 유나의 행동이 너무 당돌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봐 봐.”

“정말 봐도 돼?”

“물론이지.”

“유나가 허락을 했으니까…….”

스윽.

동빈은 살짝 고개를 빼고 사진을 관찰했다. 원장과 고등학생 정도의 남학생이 다정하게 찍은 모습이었다.

“군대에 있는 너희 오빠?”

동빈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다. 동빈이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기 직전 군대에 갔다는 말을 들었다. 몇 차례 휴가를 나오기는 했지만 동빈이 볼 수 있던 기회는 없었다.

“원장님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겠지. 날씨가 점점 추워지잖아. 1년이 지났으면 상병인 거 같은데… 겨울이 되면 아무래도 고생이 심할 거야. 유나야, 너도 시간 내서 면회…….”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동빈은 말이 많아졌다.

청산유수처럼 계속 떠들었지만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다.

“우리 오빠 아닌데?”

“그럼 누구야?”

“잘 봐 봐. 진짜 누군지 모르겠어?”

동빈이 반문했지만 그녀는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계속 사진을 보여 주며 맞혀 보라고 성화였다.

“글쎄… 도대체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는데…….”

동빈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비슷한 인상을 가진 사람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유나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더욱 답답했다.

“유나야, 힌트라도…….”

“뭐야? 정말 모르나 보네. 기태 선배잖아.”

“기, 기태 선배……!”

동빈의 눈은 몰라보게 커졌다. 사진 속의 인물을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았다.

“정말 너무한다. 엄밀히 말하면 너의 형이잖아. 물론 살아 있다면 말이야. 그런데 진짜 몰랐어?”

“응… 이름만 알고 있었어. 집안에 사진도 없고… 그러고 보니 장군님과 많이 닮았네.”

얼굴 윤곽과 코는 장군님을 빼닮았다.

유난히 큰 눈과 약간 도톰한 입술은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동빈은 장군의 방에서 본 중년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장군은 아들의 사진을 모두 치웠지만 아내만은 결코 치우지 못했다.

“그 오빠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엄마한테 레슨을 받았으니까… 우리 엄마하고는 꽤 인연이 깊어. 옛날부터 우리 엄마를 참 잘 따랐는데… 아마 기태 오빠의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일 거야.”

끄덕끄덕.

유나는 추가적인 설명을 했다.

사진에 시선을 고정시킨 동빈은 고개만 끄덕여 잘 듣고 있음을 표시했다.

“오늘이 수능이라 더욱 생각나나 봐. 그 오빠가 살아 있다면 한창 시험 보고 있을 텐데… 우리 엄마가 기대를 참 많이 했었지. 최고의 음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셨어.”

‘맞다. 그래서 장군님이 엿을 사 오셨구나!’

이제야 동빈은 장군이 엿을 사 왔던 이유를 깨달았다.

원장이 이럴진대 장군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가족에 대한 기억이 없던 동빈도 뭔가 울컥하는 심정을 느꼈다.

부스럭.

동빈은 엿으로 빵빵한 가방을 집었다.

지금 원장에게 전해 줄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유나야.”

“왜?”

“엿 먹을래… 우리 아버지가 사 온 거다.”

동빈은 가방을 열고 엿 하나를 꺼내 주었다. 몇 개 빼 먹는다고 티가 나지는 않았다.

“유나야, 안 먹을 거야? 그럼 내가 먹지, 뭐…….”

“너 진짜 매너 없다. 숙녀한테 엿 먹어가 뭐니, 엿 먹어가.”

동빈이 실수한 게 분명했다.

평소라면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졌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부스럭.

유나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엿을 싼 비닐을 벗겼다. 그러고는 한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엿이 무지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엿은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유나가 이상하게 쳐다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동빈은 우적우적 엿을 씹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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