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3/224)

비상구가 없다

계속 흘렸고 수능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학교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3학년 교실뿐만이 아니라 2학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능이 끝나면 2학년이 곧 수험생이 되는 것이었다.

동빈은 오늘도 늦게까지 자율 학습을 했다. 석진의 옆에 자리를 잡고는 뜨거운 학구열을 불태웠다.

“동빈아, 진짜로 유나랑 주철이라 사귀는 거냐?”

“쉿!”

동빈은 무조건 석진의 입부터 막았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아니거든. 다신 그런 소리 하지 마. 주철이나 유나 귀에 들어가면… 목숨을 장담 못 해.”

“목숨씩이나…….”

“나도 처음 봤는데…….”

두리번두리번.

동빈은 말을 끊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다른 애들이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유나도 한 성질 하더라.”

“유나가? 설마…….”

석진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부반장 유나라면 천사표에 가까웠다. 반에서 일어나는 궂은일은 도맡아서 할 정도였다.

“나도 처음 봤다고 했잖아. 주철이는 송 교관님 때문에 억지로 끌려갔는데… 이야! 유나가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

“그래? 다행이구나. 그럼 별거 아니었네?”

“당연히 별거 아니지. 근데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난 너하고 유나가 잘됐으면 했거든.”

“뭐라고!”

벌떡.

깜작 놀란 동빈은 자리까지 박차고 일어났다.

조용했던 교실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다른 학생들은 무슨 일인가 하여 동빈을 쳐다보았다.

“동빈이가 화난 거 같은데? 얼굴까지 붉어졌잖아.”

“글쎄? 석진이하고는 친하지 않았나?”

학생들이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다. 동빈은 얼굴이 붉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뭐, 뭘 보고 있냐… 고, 공부… 열심히 하자.”

풀썩.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동빈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자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고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는 혜영이가 있잖아. 한번 여자 친구는 영원한…….”

“혜영이는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친구인데 여자인 애 말고, 진짜 여자 친구 사귀어 보면 어떨까 해서.”

“친구인데 여자인 애하고 여자 친구하고, 뭐가 다른데?”

동빈은 비유적 표현에 매우 약했다.

직접적으로 말해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했다.

“너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책임감이나 연민 같은 것 때문에 혜영이를 못 잊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그게 어때서?”

“그게 어때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 보라는 뜻이야. 친구만 해도 그래, 나하고 주철이밖에 없잖아?”

“내 얼굴만 보고도 슬금슬금 피하는데… 정말 대책 없다.”

학생들 사이에서 동빈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먼저 마음을 열려 해도 겁을 먹고 피하니 정말 대책이 없었다.

“그러면 여자라도 사귀어 봐. 솔직히 공부 빼고 꿀릴 것도 없잖아. 얼굴도 되고, 몸 되고, 집안도 빵빵하고… 동빈이 너와 잘 맞는 애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야, 너도 주철이화돼 가는 거냐?”

“내가 어때서?”

화들짝.

갑작스러운 주철의 등장에 동빈은 경기를 일으켰다. 몸을 석진이 쪽으로 바싹 붙이고는 경계의 눈빛으로 주철을 바라보았다.

“너, 너… 어, 어디부터 들었어?”

“어디부터는? 나도 석진이 의견에 찬성이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 내가 좋은 여자 소개해 주리?”

‘다, 다행이다. 앞부분은 못 들었구나!’

동빈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유나와 얽힌 사건은 못 들은 모양이다. 들었다면 벌써 난리를 쳤을 것이 분명했다. 동빈이 그렇게 주의를 기울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동빈이, 너 많이 수상하다.”

“뭐, 뭐가?”

“얼굴 말이야… 왜 그리 땀을 흘리지? 조폭 수십을 한꺼번에 상대해도 멀쩡한 놈이 말이야.”

“더, 더워서 그래. 어휴∼. 땀난다.”

주철의 의심을 받자 동빈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열심히 공부하던 영어 책을 덮고는 수학 책을 꺼내 들었다.

“야, 책은 왜 다시 꺼내? 야간 자율 학습 끝났거든.”

“끝났냐…….”

당연히 끝났다. 그렇기에 주철이 앞자리로 찾아온 것이다.

동빈은 의심을 살 만한 짓을 골라 한 셈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한둘 가방을 챙기면서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공부한다고 석진이 옆 자리로 가더니 장난만 치고 말이야. 아직도 나한테 불만이 남은 거지. 그렇지?”

“아니라니까. 네가 계속 음악 틀어 놓고 있으니 신경 쓰이잖아. 주철이, 네가 음악만 듣지 않으면 내 자리로 돌아갈 의향이 있다.”

“헤드폰 끼고 듣잖아? 그게 들려?”

“난 들리거든.”

“진짜 할 말이 없다. 뭐 하냐? 어서, 가방이나 싸라. 오늘도 내가 라면 쏜다.”

주철이 먼저 포기를 했다. 더 이상 말했다가는 말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만날 라면이냐? 오늘은 종목 좀 바꾸자.”

“좋아. 오늘은 특별히… 라볶이?”

“그래! 라볶이 정도는 돼야지.”

동빈은 환호성을 울렸지만 석진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참… 있는 놈들이 더하네…….”

말은 안 했지만 석진은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고작 라면에서 라볶이로 바뀌었으니… 석진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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