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8/224)

슥슥슥슥.

일일 찻집 내부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은실이 자신의 잘못을 기록하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동빈은 시험 감독 하는 선생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하나라도 빠트리면 알아서 해.”

“무, 물론이지.”

은실이 글을 쓰는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A4용지 한 장을 다 채웠지만 아직도 쓸 것이 많았다.

따르릉.

“어머! 깜짝이야.”

전화가 울리자 은실은 경기를 일으켰다.

여자 일진이라고 날치던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여보세요.”

동빈은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보스 아니면 주철 둘 중에 하나였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내가 문 열어 줄게.”

딸깍.

동빈은 전화를 끊고서 열심히 적고 있는 은실을 쳐다보았다.

“어이, 문 좀 열어.”

“문?”

은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출입문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큰 자물통이 채워져 있으니 문제였다.

“빨리 안 열고 뭐 해? 주철이 놈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데?”

“여, 열쇠가… 화, 화장실 저쪽에 있는데…….”

맞다! 열쇠가 없다. 동빈이 열쇠를 삼키는 장면을 모두가 보았다. 그녀가 화장실을 언급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너 미쳤니? 열쇠를 왜 화장실에서 찾아?”

스윽.

“……!”

동빈이 살짝 손짓하자 열쇠가 튀어나왔다. 은실뿐만이 아니라 일일 찻집에 있던 놈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너 놀라게 하려고 마술 배운 거 아니거든.”

열쇠를 삼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 속임수였단 말인가!

하도 어이없는 장면이라 허탈함마저 느껴졌다.

“뭐 해? 빨리 안 열어!”

“그, 그래…….”

정신을 차린 은실은 열쇠를 받아 쥐었다. 그러고는 출입문으로 다가가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철컹.

묵직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은실은 자물쇠를 걷어 내고는 힘겹게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주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모양이다. 검정색과 회색이 조화된 슈트를 걸치고 있었고 한쪽 손에는 헬멧을 들고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고 들어왔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뭐야? 이 재수 없는 얼굴은?”

“아, 안녕…….”

은실은 주철에게도 찍힌 상태였다.

주철이 눈을 찌푸리자 그녀는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은 무슨… 천박한 파마. 내 눈에 띄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이걸 그냥… 확!”

“엄마야!”

주철이 헬멧으로 때리려 하자 그녀는 잔뜩 몸을 사렸다.

주철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지 바싹 겁먹은 모습이다. 또라이라는 별명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주철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문이나 확실히 잠그고 와라.”

“천박한 파마. 넌 나중에 보자.”

동빈이 만류하자 주철은 화를 가라앉혔다. 서둘러 자물쇠를 채우고는 동빈을 향해 걸어왔다.

“아주 초토화를 만들어 놨구나.”

주변 상황만 보고도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철은 땅바닥에 널린 파편들을 뛰어넘으며 걸었다.

“저 새끼, 강남의 양주철 아니야?”

“그런 것 같은데? 저놈 김동빈과 친구였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자 일진들이 수군거렸다.

개중에는 주철을 알아보는 놈들도 있었다. 과히 좋은 소문은 아니었는지 일진들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상황 진짜 뭐같이 됐네. 졸라 괴물하고 열라 또라이가 만났으니…….”

스윽.

“…….”

주철이 고개를 돌리자 일진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주철은 다시 발걸음을 했다.

“갑자기 웬 사고냐?”

주철은 계산대 위에 헬멧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좀 그렇게 됐다. 오토바이 타고 왔냐?”

“네가 급하다고 그랬잖아.”

“그랬나?”

주철은 계산대에 허리를 기대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동빈이 저지른 피해를 가늠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과격한 편이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 물건이야 변상하면 되지만 진짜 사람이라도 죽으면…….”

경기 연합 때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다. 괴로운 신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뭘 모르는 놈들이 인명 사고를 치지. 쇠심줄보다 독한 것이 사람 목숨이고… 어떨 때는 가느다란 실보다 약한 것도 사람 목숨이지.”

“이놈이 절에서 살았다더니 선문답이나 배웠나… 그게 무슨 소리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뜻이냐?”

“살생에 도가 튼 놈은 말이야, 어떻게 하면 죽는 않는지도 잘 알고 있거든.”

“또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헛소리야, 이놈이? 어디 보자… 저놈들은 대충 알겠는데… 조폭 같은 놈들은 뭐냐?”

주철은 동빈의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TV나 인터넷에서 이상한 소리 듣고 우길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주철은 구석에 몰려 있는 일진들을 한번 훑어보았고, 입에 뭔가를 물고 꽁꽁 묶여 있는 사람들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조폭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조폭이다.”

“뭐라고? 너 미쳤니?”

대형 사고가 분명했다.

일진이야 대충 해결하면 되지만 조직 폭력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깡패 놈들은 됐으니까. 일진회부터 정리해 주라.”

“너 제정신이냐? 조폭이 달리 조폭인지 알아? 이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얼마나 골치 아픈지 알기나 하냐?”

“이상하네? 난 조폭들 상대하는 게 더 편한데?”

“미친다.”

이쯤 되면 대화가 필요 없었다. 계속 말해 봤자 주철이 입만 아플 뿐이었다.

“일단 정리를 하자. 나는 진짜 일진들만 처리해 주면 되는 거지?”

“당연하지.”

“좋아. 난 일진을 처리할 테니… 조폭은 니 맘대로 하세요.”

주철은 말다툼을 끝내고 일진들에게 다가갔다. 쓰리 스타의 아들이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라는 불안한 믿음이 작용했다.

뚜벅뚜벅.

주철은 일진들 주위를 맴돌았다.

아는 얼굴이 있나 살펴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동네는 창석고가 잡고 있지. 창석 짱 어디 있냐?”

“어버…어버…….”

뒤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장천이? 너 많이 컸다. 어버어버? 나 놀리는 거냐?”

“어버어버!”

주철이 인상을 쓰자 장천은 더욱 당황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더욱 요상한 소리를 내어 주철의 심기를 자극했다.

“주철아, 저놈은 며칠 말 못 한다.”

“네가 저렇게 만들어 놨냐?”

“그렇게 됐다.”

“미친다. 또 뭐가 그렇게 돼?”

동빈이 나서자 오해가 풀렸다.

어버어버를 연발하던 장천도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창석 짱, 그럼 내 말만 똑똑히 들어.”

끄덕끄덕.

주철은 장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천을 지목하여 말했지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내가 동빈이, 이놈 때문에 많이 쓰는 말인데… 괜히 골치 아프게 만들지 말자. 조폭하고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너희들도 좋을 것 없잖아?”

끄덕끄덕.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다. 장천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일진들이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친 놈들은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는 게 좋을 거다. 괜히 병신 만들지 말고… 치료비는 내가 줄 테니까. 좋게 좋게 끝내자. 응?”

“야? 치료비는 왜 줘?”

가만히 듣고 있던 동빈이 반기를 들었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넌 빠져라. 나보고 해결하라며?”

“난 잘못한 거 없어. 저놈들이 먼저 덤볐단 말이야. 게다가 나도 돈 있어. 치료비를 주려면 내가 줘야지.”

“내가 너보다 훨씬 많이 사고 쳤거든? 이번에는 조용히 내 말 따라라. 그리고 넌 잘못한 것 없다며 왜 돈을 준다는 거야? 내가 저놈들 불쌍해서 주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자, 응? 너희들도 불만 없지?”

끄덕끄덕.

동빈은 약간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지만 어쨌거나 일은 잘 풀렸다. 일진들은 주철의 제안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다 해결됐으니까, 너희들은 꺼져라. 열쇠는 여기 있다.”

우르르.

주철의 허락이 떨어지자 일진들은 한꺼번에 입구로 몰려갔다.

멀쩡한 놈들은 제 발로 걸었고 몇몇은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빠져나갔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놈은 들쳐 업고서 일일 찻집을 벗어나는 분위기였다.

“아차! 천박한 파마, 넌 남아야겠다.”

“……!”

은실은 좋다 말았다. 출입구를 빠져나가려 했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주철은 동빈과 달랐다. 한번 돌면 남자건 여자건 구별이 없었다.

“얘, 얘들아… 나, 나만 두고 가면…….”

은실은 참담한 심정으로 동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철저한 무시를 당했다.

주철에 대한 소문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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