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224)

언제나 그랬듯이

주춤주춤.

은실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동빈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용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쪽에 앉아.”

추르르.

동빈은 멀쩡한 의자를 발견하고 발로 걷어찼다.

의자는 빙글빙글 돌면서 은실 앞에 정확히 멈추었다.

“고, 고마워…….”

은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엉덩이만 걸쳤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여차하며 튀겠다는 자세였다.

“아까 밖에서 조용히 만났으면 됐잖아. 안 그래?”

“미, 미안…….”

“미안?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닌데?”

“아, 아니야. 나 열라 반성 많이 하고 있어. 다시는 혜영이 그년……! 아, 아니… 혜영이 절대 건드리지 않을게.”

“기가 막혀서…… 그동안 별짓 다 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이면 다 끝나? 나도 너와 똑같이 하고 미안하단 말 한마디로 끝낼까?”

“…….”

동빈은 계산대에 몸을 기댄 상태였다.

팔짱을 끼면서 흘깃한 눈으로 묻자 은실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잘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한 방에 조폭들이 피를 쏟으며 나가떨어지는 주먹이었다.

“내, 내가 어…어떻게 하면 되는데……?”

은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 평생 괴롭지 않으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세상 참 불공평하지. 넌 이렇게 잘 지내는데 우리 혜영이는 고생이 많거든.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 사실은 나도 불쌍한 애야. 우리 엄마 아빠는 매일 싸운다? 너도 TV 봐서 알 것 아니야. 폭력적인 집안에서 자라면 자신도 모르게 물들게 되고…….”

“그래서? 네 잘못이 아니라 집안 탓이라는 거야?”

“완전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은실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동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동빈이 말을 꺼내려는 기색을 보이자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넌 고생 좀 많이 해야겠다.”

“고, 고생이라니…….”

“내일 당장 정신과 치료부터 받아. 사람 괴롭히는 것도 큰 병이거든. 그리고…….”

따르릉. 따르릉.

동빈의 충고가 한창으로 치달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주철이냐?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동빈은 은실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전화기를 들었다.

누군지 뻔한 상황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물었는데…….

“누, 누구…….”

동빈은 수화기를 고쳐 잡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주철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깡패들은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닌데요.”

동빈은 꽁꽁 묶여 있는 조폭들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

진짜로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도 의식을 못 차린 놈도 여럿 있었다.

“장난 아닌데요. 왜 사람을 못 믿는 겁니까? 보스고 뭐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동빈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예의 바른 동빈이 이럴 정도면 상대가 아주 막무가내로 나온다는 뜻이었다.

“네∼. 맘대로 하세요. 죄송하지만 전화 끊습니다. 급한 전화가 있어서요.”

딸깍.

동빈은 전화를 끊고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약간 짜증이 났다는 반응이었다. 몇 번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은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저, 저, 정신병원…….”

은실은 말까지 더듬으며 서둘러 대답했다. 동빈이가 전화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 정신병원. 꼭 더러운 성격 고치고 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직접 고쳐 줄 테니까.”

“……!”

은실은 소름이 돋았다.

낮게 깔리는 동빈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방은실, 너는 내가 계속 주목할 거야. 다른 애들 괴롭히는 거 내 눈에 띄면 진짜 재미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또, 혜영이가 다 나을 때까지 노는 것도 금지야. 집구석에 처박혀서 열심히 반성해.”

“…….”

“왜, 말이 없지? 알았어? 몰랐어?”

“저, 저기… 노는 게 금지면 말이야… 노, 노래방은 어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빠직.

“아, 아니야. 내가 잠시 실수했네.”

동빈이 인상을 구기자 은실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손사래까지 치면서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미 동빈의 분노를 자극하고 말았다.

“너 진짜 안 되겠구나?”

부슥.

계산대에 허리를 기대고 있던 동빈이 몸을 바로 세웠다. 은실은 깜짝 놀라 주춤했고 동빈은 인상을 쓰며 다가섰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네가 한 짓을 적어. 그리고 네가 실수한 애들한테 용서한다는 각서 받아 와.”

“저, 저기…….”

동빈이 바싹 얼굴을 들이밀자 은실은 더욱 허둥거렸다.

“왜, 싫어?”

“시, 싫은 게 아니라… 종이하고 볼펜이…….”

“그것까지 내가 챙겨 주리?”

“아, 아니야. 내, 내가 찾아야지.”

은실은 계산대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볼펜은 구했으나 종이가 문제였다. 사고 친 것이 워낙 많아서 메모지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