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이 띄엄띄엄 지나가는 서일여고 앞.
피아노 학원을 간다고 집을 나섰던 동빈이 보인다. 서일여고 교문에 등을 기댄 채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동빈아? 여기는 어쩐 일이야?”
교문을 나서던 수진이 먼저 동빈을 발견했다. 동빈이 약속을 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혀 뜻밖이란 표정이었다.
“안녕… 석진이한테 전화했더니 학교에 있을 거라고 해서…….”
“응… 서클 일로 애들 좀 만나고 오는 중이야. 그런데 나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그래, 꼭 찾을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꼭 찾을 사람?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수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요즘 동빈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소식을 석진을 통해서 들었다.
“혜영이를 괴롭혔던 여자애 있잖아. 카페에서 한 번 만났는데, 조금 싸가지 없는 말투에… 머리 이상하게 파마하고 다니던…….”
“은실이 말이야?”
“맞다. 은실이. 걔 지금 어디 있어? 일요일이라 학교는 안 나왔겠지? 주철이 말로는 노는 애들끼리 자주 다니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동빈이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서일여고 일진 방은실이었다. 그녀의 행방을 알기 위해 수진을 찾은 것이다.
“아마 일일 찻집에 갔을 거야.”
“일일 찻집?”
“이 지역 일진들이 모여서 가끔 일일 찻집을 열거든.”
“어디서 하는데? 나도 티켓 살게.”
“아니야, 내 꺼 줄게… 나도 억지로 한 장 떠맡았거든. 잠시만 기다려 봐.”
수진은 지갑을 열고 노란색 종이를 꺼냈다. 확실한가 한번 살펴보고는 곧장 동빈에게 넘겨주었다.
“여기… 그냥 버리나 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고마워. 나중에 티켓 값만큼 맛있는 거 사 줄게.”
동빈은 일일 찻집 티켓을 살펴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운이 좋은 것인가? 장소도 멀지 않았고 지금이 한창 붐빌 시간이었다.
“나한테는 진짜 필요 없던 거야. 거긴 티켓 있어도 들어가기 힘들거든. 조금 논다는 애들만 출입이 가능해.”
“아무튼 고마워. 나 먼저 간다.”
“그래. 힘내고…….”
동빈은 티켓에 적힌 약도를 확인하고는 큰 걸음으로 걸었다.
마음이 급한 것이 분명했다. 수진이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동빈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동빈은 후미진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티켓의 약도를 계속 확인하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이쯤이 맞는 것 같다는 표정이지만 정확한 장소는 찾지 못했다. 썰렁한 골목 분위기를 봐서도 찻집이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저긴가?”
동빈의 시선은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서는 2층 건물에 집중되었다. 이 골목에 일일 찻집이 있다면 가장 신빙성이 높은 장소였다.
뚜벅뚜벅.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동빈은 지체 없이 낡은 2층 건물을 향해 걸었다.
“미안하데… 여기가 일일 찻집 하는 장소 맞아?”
“그런데?”
건물 입구에는 2명의 학생이 지키고 있었다. 동빈이 티켓을 보여 주며 묻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하로 내려가면 되나?”
“미친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가려고?”
“여기 티켓도 있는데?”
동빈이 일일 찻집 티켓을 보여 주었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입구를 지키던 놈들은 잔뜩 인상을 쓰며 동빈을 위협했다.
“니가 어떤 새낀지 알고 함부로 들여보내? 까불지 말고 그냥 꺼져라. 응?”
“이거 내 친구가 만원 주고 샀다는데?”
“뭘 모르는 새끼 아냐? 샀으면 그만이지 여긴 왜 와?”
“참… 애들 돈 뺏는 수작도 가지가지네.”
동빈은 허무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수진이 말한 것을 이해했다는 눈치였다.
“그럼 말이야, 서일여고 다니는 은실이 좀 불러 줄래?”
“은실이? 어떻게 아는 사인데?”
입구를 지키는 놈들도 은실을 아는 모양이다. 은실이란 이름이 나오자 태도가 약간 변했다.
“설명하면 복잡하고… 그냥 혜영이 남자 친구라고 하면 알 거야.”
“봉구야, 니가 들어가 봐.”
“알았어.”
경비가 삼엄하다. 동빈을 직접 들여보내지 않고 함께 입구를 지키던 다른 놈이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데? 어디 학교야?”
“많이 알면 다치거든.”
동빈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놈을 외면했다. 은실을 만날 때까지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지하로 내려갔던 놈이 다시 입구로 나왔다.
놈의 얼굴이 좋지 않다. 괜히 고생만 했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은실이가 뭐래?”
“졸라 패서 쫓아 버리래. 혜영이란 이름만 들어도 재수 없대.”
“이 병신 새끼… 어디서 개폼을 잡고 난리야.”
입구를 지키던 놈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별것도 아닌 놈 때문에 고생한 것이 분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냥 갈래 맞고 꺼질래?”
“은실이가 패서 보내래.”
“씨발! 그럼 어쩔 수 없이 패야지.”
동빈은 차분하게 놈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우악스러운 표정으로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취하지 않았다.
“어쭈?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본……!”
퍼억-.
앞서 다가오던 놈의 고개가 세차게 젖혀졌다.
동빈의 가벼운 주먹을 맞고는 심하게 몸을 휘청거렸다. 동빈은 재빨리 놈의 머리카락을 잡고는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쿠앙-.
하얀 벽면이 붉게 물들었다. 놈의 몸은 천천히 아래쪽으로 허물어졌다.
“이 새끼가!”
후웅-.
두 번째 놈이 분을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동빈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퍼억.
동빈의 발이 더 빨랐다. 놈은 허우적거리며 날아가다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동빈은 지체 없이 달려가서 놈의 목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이어진 공격은 강력한 무릎차기였다.
푸악-.
“크억…….”
놈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동빈이 손을 놓자 놈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무나 쉽게 2명을 제압한 것이다.
뚜벅뚜벅.
동빈은 몸에 묻은 피를 대충 닦고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중간쯤 내려가자 음악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소리가 더욱 커졌다.
끼이익-.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굉음에 가까운 음악 소리가 동빈을 맞이했다.
쿵쾅쿵쾅.
일일 찻집 내부는 밖과는 또 딴판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엄청난 출력의 음향. 영화에서 보는 파티를 연상케 했다. 환기가 잘 안 되는지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테이블 곳곳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
천천히 테이블 사이를 누비던 동빈의 눈이 빛났다.
목표를 발견한 것이다. 여자 3명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특별한 좌석인지 다른 곳보다 조금 동떨어져 있었다.
풀썩.
동빈은 상대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빈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여자들의 반응은 곱지 않았다.
“넌 뭐야?”
“너한테는 볼일 없고… 방은실. 진짜 오랜만이다.”
“날 알아?”
“이번에는 내가 방해꾼이 됐네?”
은실이 쳐다보자 동빈은 모자를 가볍게 한 번 들췄다 썼다. 누구인지 확실히 알리려는 모습이었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
“눈 큰 건 여전하네? 그때 젓가락으로 맞혔어야 했는데 말이야.”
동빈이 젓가락을 던지는 시늉을 하자 은실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은실로서는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었다.
“여, 여기는 왜 온 거야?”
“나도 이런 데 들어오기 싫었어. 그런데 불러도 안 나오데?”
“마, 말도 안 돼? 네가 혜영이 남자 친구?”
은실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언제까지 커질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뭘 그리 놀라? 저번에 함께 있는 거 봤잖아?”
“그, 그런 애하고 왜 사귀는 거야? 얼마나 재수 없는…….”
은실은 마지막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동빈의 인상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은실이 계속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다른 여자들도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은실아. 얘는 뭔데 이러니?”
“미안하지만 넌 조용히 좀 해 줄래?”
“허! 여자라고 깔보는 거야? 넌 여기가 어떤 자린 줄 알아? 우리는 이 지역 짱들의 여친이야.”
“짱들의 여친? 진짜 이상하네? 내가 원래 여자들 앞에서는 말을 잘 못하는데… 오늘은 말이 술술 나온다. 아무래도 너희들이 여자로 안 보이나 보다. 이젠 입 좀 닥쳐 줘.”
동빈은 진한 화장의 여자와 말싸움을 벌였다.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말투도 점점 거칠어졌고 여자라고 봐주는 경우도 없었다.
“너 학교 그만 다니고 싶니?”
“학교 다니고 안 다니고는 내 맘이야. 그리고 난 방은실하고 말하고 싶으니까 나머지는 빠져 줬으면 좋겠어.”
“그, 그래… 영미야. 그만 해. 내가 해결할게.”
은실이 만류하자 화장 진한 여자는 빠졌다. 기분이 상한 듯 동빈을 한 번 흘겨보고는 팔짱을 끼며 토라졌다.
“이제 조용해졌네. 방은실. 왜 혜영이를 괴롭혔지?”
“그 기지배가 재수…….”
“너한테 재수 없게 굴었어?”
“그, 그래…….”
“어쩌지… 나도 네가 재수 없게 보이는데?”
“……!”
은실은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동빈과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잔뜩 움츠린 자세로 눈만 깜박이고 있었는데…….
“어떤 새끼가 남의 여자를 건드려?”
“장천아, 마침 잘 왔다. 저 새끼 좀 어떻게 해봐. 아까부터 계속 은실이를 괴롭혀.”
뜻밖의 방해꾼이 출현했다. 동빈이 못지않은 체구의 학생이 끼어들었다.
진한 화장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 고자질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장천은 동빈을 노려보았다.
“넌 뭔데 우리 은실이를 괴롭히는 거냐?”
“나는 혜영이 남자 친구. 그러는 넌 누군데?”
“허! 여자 친구 있다고 유세 떠는 놈은 처음이네? 그럼 난 은실이 남자 친구다. 그리고… 창석고의 짱이기도 하지. 이제 말해 봐. 왜 은실이를 괴롭히는 거냐?”
“네 여자 친구가 내 여자 친구를 괴롭혔거든. 만약 여자 친구를 괴롭히는 놈이나 년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냐?”
“당연히 죽여 놔야지. 꼭 너 같은 새끼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동빈은 시선은 계속 은실을 향해 있었다.
장천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동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은실은 죽을 맛이었다.
“저기… 자, 장천아. 그, 그만 해…….”
은실은 장천의 옷을 잡아끌었다. 싸우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오히려 장천의 화를 돋우는 역할만 했다.
“뭐가 그만 해? 너 이 새끼한테 빚진 거 있어?”
“미치겠네… 제발 내 말 좀 들어.”
“장천이라고 했지. 그냥 은실이 말 믿고 조용히 빠져라. 네가 무슨 죄가 있겠니? 잘못은 철없는 여자 친구가 했는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와장창창.
장천은 탁자를 발로 걷어차며 뛰어들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은실의 모습에 화가 난 모습이었다. 탁자에 있던 잡스러운 물건이 날리면서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후웅-.
장천의 주먹은 동빈의 얼굴을 노리고 들어왔다. 대단한 파괴력이 느껴진다. 체격에 비하여 주먹이 상당히 컸다.
스르륵-.
동빈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얼굴만 틀어 장천의 공격을 피해 냈다. 주먹이 얼굴을 살짝 스쳐 가는 묘기에 가까운 장면을 연출했다. 동시에 팔을 쭉 뻗어 상체가 바싹 숙여진 장천의 목을 찔렀다.
퍽.
소리는 크지 않았다.
동빈은 손가락을 모은 상태에서 장천의 목 중앙을 찌른 것이다.
“……!”
순간적으로 움찔했던 장천… 눈은 점점 커졌고 목을 부여잡으며 괴로운 신음을 발했다.
“크억… 켁! 끄윽… 칵…….”
숨을 쉴 수 없는 모양이다. 온갖 종류의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아무나 붙잡고는 살려 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자, 장천이가 한 방에 쓰러졌어?”
학생들의 시선이 동빈에게 쏟아졌다. 한 방이 문제가 아니다. 동빈은 앉아 있던 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방은실… 이제 다시 대화 좀 해볼까?”
“…….”
“크억… 켁! 사… 살려…….”
동빈은 은실을 노려보았고 은실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장천은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아무나 잡고 매달렸다.
“저, 저 새끼 누구야?”
“씨발! 장천이가 당했는데, 저 새끼가 누군지가 중요해! 졸라 까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