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뒤.
혜영을 담당하는 여의사는 웃는 모습으로 상담실을 들어섰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그냥요…….”
“큰일이네. 언제쯤 혜영이의 웃는 모습을 볼까?”
피식.
혜영은 엷은 미소를 지었고 여의사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약은 잘 먹고 있지.”
“네…….”
여의사는 차트를 살펴보고 혜영은 자그만 음성으로 대답했다. 언제나 풀이 죽은 모습이 혜영의 특징이었다.
“저번에 친구들 이야기하다 말았지?”
“네…….”
혜영의 대답은 습관성이었다. 내용의 진위를 떠나서 무조건 그렇다고 말하는 모양새였다.
“오늘은 남자 친구에 대해서 말해 볼까?”
“…….”
혜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 껄끄러운 내용이라는 그녀만의 표현이었다.
“왜?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어?”
“대부분 내가 왕따라서 싫대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어머님 말로는 혜영이를 따라다니던 남자도 있었다고 하던데?”
피식.
혜영은 다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처럼 기운 없는 웃음이 아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웃으니까 보기 좋다. 혜영이도 많이 좋아했나 보네?”
“그냥요.”
“이름이 김동빈인가? 체격이 크고 믿음직하게 생겼다던데?”
“어, 어떻게 아셨어요?”
“혜영이 친구 면담할 때 들었지.”
“기지배들…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혜영은 쓸데없는 원망을 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철저히 약속을 지켰다. 동빈이 직접 여의사를 찾아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왜 그 남학생을 거부했지? 잘될 수도 있었다고 하던데?”
“자신이 없어요.”
“자신이 없다니?”
“내 진짜 모습을 보면 실망할 거예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무엇이 혜영이의 진짜 모습인데?”
“잘 아시잖아요…….”
대화를 계속 할수록 혜영의 몸은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뭔가에 대해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동빈 학생 말이야, 혜영이가 왕따라고 찰 정도로 독하진 않아. 오히려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선생님이 어떻게 아세요?”
“그냥 느낌이지. 의사들의 직감은 아주 무섭거든.”
여의사는 농담까지 섞어 가며 상담을 이어 갔다. 분위기를 좋게 하자는 의도였지만 혜영의 행동은 점점 불안하게 변했다.
“두, 둘이 있으며 좋지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 엄마나 아빠 그리고 다른 친구들처럼… 나,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질 거예요.”
“아니야, 혜영이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야. 부모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동빈 학생도 혜영이를 원망하진 않아. 혜영이가 빨리 낫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 저도 잘하려 하는데… 모,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날 괴롭힌 그 애들만 생각나면… 저도 모르게 그만…….”
혜영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경련이 일어나는지 손까지 심하게 떨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면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됐어. 말하기 힘들면 그만 해도 좋아. 대신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은 잘못된 거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죄, 죄송해요. 저, 저도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날 비웃는 그 애들의 눈빛…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아프다고 해도 계속 때리고…….”
“혜영아 그만 하자.”
여의사는 심하게 떨리는 혜영의 몸을 안아 주었다. 더 이상 상담하기 불가능한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다.
“선생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괜찮아… 안 좋은 기억을 억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어.”
거칠었던 혜영의 숨소리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여의사는 혜영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마음의 안정을 찾길 기다렸는데, 바로 그때였다.
쿠앙.
갑자기 출입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남자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에요! 환자가 놀라잖아요!”
여의사는 재빨리 혜영을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간신히 진정시킨 혜영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상담 중에 간호사들이 함부로 뛰어 들어오는 경우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 선생님 괜찮으세요?”
상당히 다급한 일이 발생한 것인가? 남자 간호사들은 여의사의 안위부터 챙겼다.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니 급하게 뛰어온 모습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총무과 전화를 받고 급하게 왔습니다. 누, 누군가 창문 밖에서 엿보고 있다고…….”
“네? 여기는 5층이에요!”
깜짝 놀란 여의사는 창문 쪽으로 급하게 고개를 돌렸는데…….
파파팟.
“……!”
창문 밖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검은 그림자가 바람처럼 지나간 느낌이었다.
“빨리 살펴봐!”
남자 간호사들은 부리나케 창문으로 뛰어갔다.
드르륵.
급히 창을 열자 하얀 밧줄이 늘어진 것이 보였다. 간호사가 놀라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떤 미친놈이!”
사람이 분명했다. 늘어진 줄을 잡고 오르는 장면은 원숭이가 울고 갈 정도였다. 그가 옥상까지 올라가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모습은 순식간이었다.
“진짜 황당하네… 저렇게 빠른 사람도 있었어?”
남자 간호사는 혀를 내두르며 창문 밖으로 내밀었던 고개를 빼냈다.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던 모습이 아직도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으음? 이건 뭐지?”
남자 간호사는 창문 틈에 낀 하얀 종이를 발견했다.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이라 판단했는지 서둘러 살펴보았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이세혁 사인이잖아. 선생님 겁니까?”
“어, 어디요.”
여의사는 남자 간호사가 전해 준 종이를 서둘러 넘겨받았다.
진짜 영화배우 이세혁의 사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세혁이란 이름은 확실히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추가적인 내용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 있는 혜영이에게. 남자 친구 김동빈.
“세상에…….”
여의사의 입에서는 장탄식부터 튀어나왔다.
다음 주에 다시 오겠다는 동빈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아차! 제가 깜박했네요. 이거 제 거 맞아요.”
여의사는 서둘러 종이를 접었다. 물론 남자 간호사들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여의사는 남자 간호사들을 문밖까지 배웅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혜영이는 영화배우 이세혁 좋아해?”
“네. 예전부터 수진이가 좋아해서 저도 좋아요.”
목숨 걸고 사인 받으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수진이 하도 유난을 떨기에 혜영도 이세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부터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야. 잘 참고 견디면 내가 보상을 해 줄게. 이세혁 사인 정도면 되려나?”
“정말요?”
“그럼, 난 벌써 받았잖아.”
팔랑팔랑.
여의사는 이세혁의 사인을 흔들어 보였다.
언젠간 줘야겠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