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고아원.
윤지나의 소개로 동빈이 봉사 활동을 하게 된 공간이었다. 집에서 거리가 멀긴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함께 봉사 활동을 나온 사람들도 친절했고 아이들도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말썽의 소지가 없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힘 좋은 학생. 물 좀 마시고 하지?”
“감사합니다.”
남자 대학생이 커다란 짐을 옮기고 돌아오는 동빈에게 물을 건넸다. 마침 목이 말랐는지 동빈도 기꺼이 물병을 받았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것 같아. 그렇게 힘들게 일을 했는데 지친 기색도 없고 말이야.”
“뭐… 이 정도 가지고요…….”
동빈은 가볍게 웃어 주고 물을 마셨다.
오늘 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할 일도 많다는 뜻이었다. 겨울철을 대비하여 건물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진짜 고등학생 맞아? 힘센 것은 둘째 치고 말이야, 어떻게 예비역들보다 삽질을 잘해?”
“삽질이야 기본이지요.”
“학생 같은 사람 몇 명만 더 있었으면 벌써 끝났을 거야.”
“칭찬이 너무 과하십니다. 물 잘 마셨습니다.”
물병을 돌려준 동빈은 목재가 널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이야 몇 개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시간 전까지도 층층이 쌓여 있었다.
동빈이 혼자 다 옮겼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읏샤!”
동빈은 2명이 들어도 벅찬 무게의 목재를 가볍게 어깨에 짊어졌다. 약간 삐뚤어진 모자를 바로잡고는 여유롭게 걸었다.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였다.
목재를 모두 옮긴 동빈은 땅파기 작업에 들어섰다.
잠시 쉬라는 주위의 권유는 가볍게 무시했다. 힘세고 오래간다는 건전지의 선전 문구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퍼억퍼억.
동빈이 곡괭이질을 할 때마다 땅이 푹푹 파였다.
힘과 기술의 승리였다. 얼마나 괴물처럼 일했으면 아이들이 조르르 따라다닐 정도였다.
“우와! 형은 진짜 키 크다.”
“키만 큰 게 아니야 기운 엄청 세잖아.”
아이들은 우주 악당을 물리치는 정의의 로봇을 바라보는 눈길을 보냈다. 이렇게 조용히 지켜보는 아이들은 그래도 양반에 속했다. 알통 한번 만져 보자고 대책 없이 떼쓰는 꼬마들도 많았다.
“형은 뭘 먹어서 그렇게 커요?”
“짬밥.”
“짬밥요?”
동빈은 사실대로 말했지만 아이들은 못 알아들었다.
동빈은 아이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열심히 곡괭이질을 했다.
“형, 형, 저기가 어딘지 알아요?”
“어디?”
“저기요. 저기.”
곡괭이질을 멈춘 동빈은 아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녹음을 간직한 산 중턱에 몇 개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글쎄? 병원이나 요양소 아닐까?”
“보통 병원이 아니에요. 정신병원이에요, 정신병원. 미친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쯧! 미친 게 아니지. 고민이 많은 사람들일 뿐이야.”
동빈은 단호하게 미쳤다는 말을 수정해 주었다.
동빈도 오랫동안 신경정신과를 다닌 경험이 있었다. 아이들의 논리라면 자신도 미친 사람이나 진배없었다.
“형, 고민이 많은 사람이 미친 사람이에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고민이 많으면 미치는 거예요?”
‘정말 미치겠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으면 미칠 수도 있나 보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동빈이 바로 그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막상 입을 열긴 했지만 특별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한없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들의 우상이 실없는 사람으로 추락할 위기였는데…….
“얘들아! 재미있게 놀았니?”
“우와! 원장님이다.”
쪼르르.
시내로 잠시 외출을 나갔던 원장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아이들은 방금 택시에서 내린 원장을 향해 신나게 달려갔다. 50대 후반의 여인이 바로 이 고아원의 원장이었다.
“휴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동빈은 원장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택시를 타고 온 이유는 무거운 짐 때문이었다.
“짐 주세요.”
“너무 무거워. 사람들이 더 있어야겠는데?”
“이 정도는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번쩍.
동빈은 커다란 박스를 가뿐히 들어 어깨에 올렸다.
하나로는 양이 차지 않는지 다음으로 무거운 박스까지 넘봤다.
“기사 아저씨, 저 박스도 올려 주세요.”
“학생, 정말 괜찮겠어? 이것도 상당히 무거운 거야.”
노년의 택시 기사는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동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어서 이쪽에 올려 주세요.”
“어이쿠… 무거워.”
“제가 이쪽을 받쳐 드릴게요.”
택시 기사는 원장의 도움까지 받아서 박스를 들었다. 동빈이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자 간신히 어깨에 올릴 수 있었다.
“가뿐하네요. 원장님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내 사무실.”
“먼저 갑니다. 원장님은 천천히 따라오세요.”
양쪽으로 박스를 짊어진 동빈은 성큼성큼 걸었다.
보폭이 컸기에 원장이 뛰는 속도와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도, 동빈 학생. 조금만 천천히…….”
“앗! 원장님… 이름은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요.”
“미, 미안… 내가 깜박했네.”
동빈의 이름은 일급비밀이었다. 다른 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나온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윤지나에게 전화를 받은 원장도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러나 몇몇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고는 곧바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성실한 학생이 왜 이상한 소문에 시달릴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동빈과 원장은 사무실까지 가면서 담소를 나눴다.
“동빈 학생은 엄청 빠르다고 소문났던데? 싸우지 않고 그냥 피하면 되잖아?”
“피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꼭 실력 행사를 해야 말을 들으니 저도 미치겠습니다.”
동빈을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원장이 사다 준 과자 봉지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둘만 있기에 편안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몸 생각도 해야지. 다치면 어쩌려고…….”
“절대 다치지 않습니다. 싸움 자체는 저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싸우기 전까지가 골치 아플 뿐입니다.”
“어머나… 동빈 학생은 소문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네?”
피식.
동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난기가 다분한 원장의 표정이 재미있기도 했고 예전부터 줄곧 들어 본 말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군대를 들어갔을 당시 동빈의 별명은 위험한 아이였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문 열어 줄게.”
끼이익-.
사무실에 도착한 원장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동빈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붙잡아 주었다.
“어디가 놓을까요?”
“탁자 위에 올리면 될 거야.”
쿵쿵.
묵직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짐을 내려놓은 동빈은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뭐 좀 마실래?”
“아니요. 일하러 가야 합니다.”
“또 일하러 간다고?”
음료수를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던 원장은 주춤했다.
싸움만 무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도 무섭게 했다. 제발 쉬라고 만류해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말이야, 이 서류 좀 병원에 전해 주겠어?”
“서, 서류요?”
“다음 달에 우리 아이들 상담이 있거든. 급한 일은 아니니까 천천히 갖다 주면 돼.”
원장은 하얀 봉투에 담긴 서류를 전해 주었다. 전혀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종이 몇 장 들어 있는 간단한 서류였다.
“이런 건 여자 시키세요. 저는 힘쓸 일이 많습니다.”
“아니야. 동빈 학생이 직접 갔다 와. 난 악덕 원장 소리는 듣기 싫거든. 동빈 학생은 힘들게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줄 몰라도 내가 불편해.”
원장의 의도는 간단했다. 일을 핑계로 동빈에게 쉴 시간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누구한테 전해 주면 됩니까?”
동빈은 원장의 성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서류를 받았다.
“봉투에 써 있는 의사 선생님 전해 주면 될 거야. 만약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시면 기다렸다가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동빈은 조용히 사무실 문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병원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여유롭게 걸었다.
휴식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